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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7-11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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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사회적 상황과 인물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2,755)  

1. 재해와 구휼
 왕조실록의 기사 가운데서 비교적 자주 등장하는 것이 바로 기상이변이나 재해에 관한 내용이다. 기상이변은 전형적인 농업사회를 이루고 있었던 조선시대에는 백성들의 기본적인 생계는 물론 심한 경우 국가의 재정을 위협할 만큼 중요한 사안이었을 것이다. 제천과 청풍 일대에서도 기상이변과 자연재해가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으며, 재해에 대한 대비와 구휼의 움직임이 동반되어 나타난다.

더구나 재해에 대한 구휼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하고 있느냐에 따라 수령의 능력이 평가되는 경우가 많아 인사(人事)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자연재해에 관한 <조선왕조실록>의 기사
연     대
내          용
태종 16년 04월 17일
충청도 충주, 청풍등에 지진이 있었다
세종 24년 10월 23일
충청도 단양, 청풍, 은진에 지진이 일다
단종 01년 06월 02일
충청도 지방에 지진이 일어나 해괴제를 지내다
연산 09년 08월 23일
서울과 충청도 및 경상도 고을에 지진이 일어나다
중종 12년 05월 09일
충청도 단양, 청풍에 우박이 내리다
중종 14년 04월 17일
충청도 청풍군에 우박이 내렸으나 화곡은 상하지 않다
중종 15년 02월 04일
충청도 청풍군에 지진이 발생하다
중종 23년 04월 13일
제천현 등에 흙비가 내리다
중종 23년 05월 13일
충청도 여러 고을에 우박이 내리다
중종 26년 05월 16일
충청도 충주, 보은 등에 번개 치고 비가 내리다
중종 39년 02월 03일
경기, 전라, 충청, 황해도 등지의 고을에 같은 날 지진이 일어나다
명종 01년 04월 20일
충청도 청풍에 우박이 내리다
명종 02년 09월 07일
충청도 청풍에 폭풍이 내려 나무가 뽑히다
명종 04년 03월 29일
충청도 제천, 옥천 등지에 우박이 내리다
명종 10년 04월 24일
충청도 청풍에 서리가 내리다
명종 10년 05월 18일
충청도 청풍, 경상도 흥해 등지에 비와 우박이 내리다
명종 13년 07월 16일
충청도 제천 객사의 능금나무에 꽃이 피다
명종 17년 04월 03일
충청도 청풍에 서리가 내려 농작물에 피해가 발생하다
선조 24년 04월 04일
충청감사가 제천 등에 우박이 내려 농작물에
손상을 입혔다고 보고하다
선조 29년 06월 12일
충청도 단양, 청풍, 제천 등에 우박이 내리다
인조 25년 07월 13일
충청도, 강원도에 큰물이 지다
인조 25년 10월 01일
충청도 일대에 우박이 크게 내리고 청푸에 지진이 일다
인조 26년 07월 07일
충청도에 큰물이 져서 농사와 인명 피해가 심하다
숙종 20년 08월 15일
충청도 여러 고을에 천둥과 번개, 우박이 내리다

 제천과 청풍 일대의 기사 가운데서 특히 자연재해에 관한 것은 그 빈도가 상당히 많다. 이것은 당시에 이 지역 외의 다른 지역에 관한 기사들 통해서도 상당수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기후에 관한 기사가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은 조선이 기본적으로 농업에 의존한 사회였기 때문이다. 농업은 전적으로 자연조건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되기 때문에 상당히 민감한 사안이었을 것이다. 피해 사례는 다양하여 우박이 내리거나 천둥 번개가 치고 큰비가 내려 수해를 입는 경우, 그리고 지진이 발생하는 경우 등이 있다. 구체적인 피해 사례가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당시의 상황을 자세하게 파악할 수 있음은 물론이다.

단종 1년 6월 2일에는 지진이 일어난 충청도 지방에서 해괴제(駭怪祭)를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해괴제는 조선시대에 지진이 일어났을 경우 중심이 되는 고을에서 지내던 국가 단위의 제사를 말한다. 한 지역에서 일어난 지진에 대해 국가단위의 제사가 이루어졌다는 것은 이러한 재해가 당시의 사회에서 그만큼 민감하고도 중요한 사안이었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특히 이때의 기록에는 자연재해와 기상이변을 비롯하여 특이한 자연현상에 관한 기록도 있다. 제철이 아닌 때에 꽃이 피거나 흙비가 내리는 등의 현상은 농업과 상관없이 그 시점의 사회적 상황과 연관하여 해석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더욱 주목되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구휼관련 기사
연     대
내          용
세종 05년 03월 12일
충청도 단양, 영춘, 청풍 등지의 백성에게 진휼하다
세종 05년 09월 13일
호조에서 강원도 흉년 구제 용도의 대비책을 건의하다
세종 06년 03월 22일
충청감사가 도내 기민의 숫자와 구제용 곡식의 양을 정산하여
보고하다
세종 09년 07월 11일
제천현감 등에게 가뭄에 굶주린 백성을 진휼할 것을 당부하다
세종 21년 07월 28일
제천현감 이흥손을 불러 보다
세종 26년 05월 16일
기근으로 부황이 난 청풍군의 여인을 관찰사에게 교유하여
진휼하게 하다
세종 26년 05월 16일
경기, 충청, 강원, 황해도 관찰사에게 진휼에 힘써 백성들이
굶어죽지 않게 할 것을 교유하다
명종 05년 06월 20일
감사의 장계에 따라 충청도, 황해도에 진휼을 명하다
명종 17년 04월 19일
충청감사가 제천현에서 여역이 발생하여 사망자가 많음을
치계하다
선조 27년 02월 03월
병조참판 심충겸이 군량 마련이 어려운 사정을 보고하다
현종 13년 12월 19일
어사 유상운이 충청도의 수재에 대해 상소한 처결하다
숙종 09년 01월 27일
재황을 이유로 충청도 백성들의 부역을 견감할 것을 청하다
숙종 38년 05월 12일
흉작이 심한 고을의 진휼책에 대한 상소
정조 13년 05월 29일
경기, 관동, 영남, 관복, 호서에 진구를 마치다.
정조 17년 05월 24일
호서의 진휼정사가 끝나자 여러 관리에게 차등있게 가자하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재해 관련 기사들은 지속적으로 이어진 재해 가운데서도 사실상 가장 대표적이며 규모와 피해가 큰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재해관련 기사와 구휼 관련 기사의 발생빈도와 비교해 보았을 때 그 선이 명확히 일치하지 않는다. 재해 관련 기사들이 폭우나 번개, 우박 등의 일시적인 피해 사례에 대한 것이라면 구휼과 관련된 기사는 장기적인 가뭄과 재황을 구제하는 방편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 쪽에 치중하여 나타난다. 부역을 견감하고 기민을 구제하기 위한 구제용 곡식을 충당하는 등의 조치가 관찰사나 감사 등을 통해 이루어지도록 정부 차원에서의 지시가 이루어지고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강원도 일부 지역에서 흉년으로 타격을 입을 경우 제천창(堤川倉)에 보관되었던 곡식을 내어 기민을 구제하는 데에 이용했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된 기사는 세종 5년 3월과 9월에 각각 나타난다. 제천창의 규모가 다른 곳에 비해 비교적 크고 저장된 곡식의 양도 많았기 때문에 충청도 일원이나 강원도 등지에서 부족분이 발생할 경우 이것을 메우는 데에 제천창의 곡식이 활용되고 있다. 한편 가뭄이나 수재(水災) 외에도 여역( 疫), 즉 돌림병으로 인해 사망하는 사람들이 생겼을 경우의 구제방안도 등장한다. 실제로 명종 17년 4월 19일에는 진천현과 제천현에 여역이 발생하여 많은 사람이 죽자 의관(醫官)을 파견하여 구휼(救恤)하도록 하였다.


2. 제천의 인물
 <조선왕조실록>에서 찾아볼 수 있는 제천의 인물에 관한 기사는 크게 두 가지 양상으로 나타난다.

 첫째는 그 지방 출신의 유능하고 청렴한 인물의 졸기나 올바르게 행동하지 않은 관료에 대한 징계에 관한 것으로, 한 인물에 대한 매우 구체적인 내용이다.

 둘째는 효행을 한 인물에 대한 것으로 효행 자체가 부각될 뿐 인물에 대한 설명은 거의 배제되어 나타난다. 전자의 경우로 여겨지는 인물들은 제천과 인근 지방에서 태어난 사람들이라기보다는 본관이 청풍이거나 이 근방에서 치적을 쌓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엄밀히 말한다면 이 지역 출신 인사의 행적을 기록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또한 인사(人事)와 인물(人物)에 관한 내용을 정확히 구별해보면 <조선왕조실록>의 기사는 대부분 인사에 관련하여 인물의 자질을 논하는 쪽에 치중되어 나타난다.

 효행에 대한 포상과 조치가 어떻게 취해졌는가를 살펴보면, 우선 연산군 6년 2월 17일과 중종 28년 4월 5일의 기사에서는 효행에 대한 포상의 조치가 나타난다. 아버지의 대변을 맛보아 가며 병구완을 했던 청풍(淸風) 사람 충찬위(忠贊衛) 유자하(柳自河)의 경우 절의(節義)와 효행(孝行)을 인정받아 정문(旌門)을 하사 받았다. 더불어 복호(復戶)를 받는 특혜를 누리기도 한다.

 중종 28년 4월 5일에는 청풍군 중의위 윤임의 처 안씨가 화재 때 시어머니를 구하다 목숨을 잃자 그것을 기려 포장(褒奬)하였다.

 중종 29년에는 윤계손(尹季孫)이 제천현감으로 있다가 병을 얻자 그 아들 윤개(尹漑)가 아비의 병세를 돌볼 수 있도록 사은사로 선발했던 것을 취소하고 다른 사람을 차출하여 대신 보내었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효행을 장려하는 모습이 아주 구체적으로 나타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효와 충은 유학을 근본으로 하는 조선사회에서 가장 일반적이면서도 구체화된 사회적 덕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충실히 따르는 사람들을 포상하고 배려하는 움직임은 곧 국가적 이념을 바로 세울 수 있는 중요한 계기였을 것이며 아울러 백성들이 그것을 충실히 따를 수 있는 동기 부여책으로 작용하기도 했을 것이다.

제천의 인물 관련 기사
연     대
내          용

성종 04년 08월 05일

월천군 김길통의 졸기

성종 18 년 04년 03월

청릉군 김순명의 졸기

선조 28년 07월 18일

별전에 나아가 주역을 강하다(여율의 공을 치하)

선조 34년 06월 01일

송영구를 청풍군수로 삼다

현종 02년 06월 05일

김남중, 이태연, 민희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현종 05년 06월 01일

동부승지 목겸선이 출사하지 않자 파직시키다

숙종 01년 04월 27일

부제학 홍우원이 김우명과 김수항을 논척하는 상소

경종 01년 09월 02년

판충추부사 문순공 권상하의 졸기

영조 35년 10월 15일

봉조하 김재로가 죽자 성복하고 찬림하겠다고 한다

영조 48년 07월 29일

전판서 김시묵의 졸기

 <조선왕조실록>상에 나타난 인물 가운데서 청풍과 관련하여 가장 많이 언급된 인물은 바로 청풍부원군 김우명(金佑明/1619∼1675)이다. 김우명은 현종의 장인으로 본관이 청풍이다. 김재로(金在魯/1682∼1759) 역시 본관이 청풍으로 1702년(숙종 28) 진사가 되었고, 이후 많은 벼슬을 거쳐 봉조하에 이르렀다. 왕조실록에는 권상하(權尙夏/1641∼1721)도 역시 청풍과 관련된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우암 송시열과의 사제관계 때문이다. 실제로 왕조실록에는 청풍이나 제천 등지의 인물에 관련된 내용이 드문 편이다. 대체로 본관이 청풍인 인물이나 청풍과 제천 등지에서 수령으로 근무했던 사람들에 관한 내용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이를 통해 제천의 인물들에 대한 풍부한 정보를 얻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보다 구체적인 내용은 제천의 인물지나 『환여승람』 등의 부수적인 자료를 통해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3. 수령의 치적 및 징계사항
 
수령에 관한 <조선왕조실록>의 내용 가운데서는 긍정적인 것보다는 부정적인 내용이 훨씬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태종 02년 10월 27일에는 물놀이를 하다 기생을 물에 빠뜨려 죽인 지단양군사(知丹陽郡事) 박안의(朴安義)가 파직당했다. 단종 01년 01월 10일 사간원에서 지방수령들의 비위사실을 규찰하도록 청함에 의해 제천현감 최돈(崔敦)이 미곡(米穀)을 강제징수한 혐의로 추핵되었으며 이어 술을 마시고 창고에 불을 내어 물의를 빚기도 했다 이밖에도 관찰사나 수령들이 파직 당한 이유는 다양하게 나타난다. 백성을 돌보지 않고 업무를 소홀히 한 것이나 분양된 말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고 잃어버린 일로 파직 당하거나 자급(資級)을 감봉 당하기도 하였다. 인조 14년에는 청풍군수 권경기(權 敬己)가 공물선(貢物船)을 개조하면서 면포(綿布)를 남용하였다가 정배(定配)되었다.

 한 고을 수령의 자질에 따라 백성들의 삶이 윤택하기도 하고 그렇지 못하기도 했기 때문에 성품이 탐욕스럽거나 일을 능수 능란하게 처리하지 못한 것, 백성을 재난에서 구휼하지 못한 것 또한 탄핵의 대상이 되었다. 수령에 대한 탄핵은 주로 어사에 의한 감찰에서 드러나는 죄상이나 소홀함 등을 근거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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