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천의 역사와 전통을 알아 볼 수 있는 게시판 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제천의 지명과 행정구역의 변화 지역적 특성과 산물 등을 알려드립니다.
작성일 : 22-07-26 15:14
[봉양읍] 장평리(長坪里)
글쓴이 :
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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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장평리(長坪里)
장평리는 본래 제천군 근우면 지역으로서, 장뜰[장평] 옆이 되므로 ‘장뜰’ 또는 ‘장평(長坪)’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고모동(古母洞)을 병합하고, 1920년 9월 봉양면에 편입되었다. 옛 제천 고을이 있었다고 한다. 1980년 4월 1일 제천시 승격에 따라 제원군 봉양면 장평리가 되었다가 1991년 1월 1일 제천시 봉양면이 되었다. 1995년 1월 1일 시군통합과 동시에 봉양면이 읍으로 승격하며 제천시 봉양읍 장평리가 되었다.
가구 수가 많았던 때는 200가구 정도까지 마을에 거주하였으나 젊은 층들이 조금 빠지면서, 현재는 170여 가구 정도가 큰 변동 없이 마을에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주된 성씨는 따로 없고 다양한 성씨들로 마을이 이루어져 있다. 마을에서는 주로 논농사를 생업으로 하고 있다.
◎ 장평리 지명유래
· 거북바위 : 구미 앞 논 가운데에 있는 바위. 거북 형상으로 생겼는데, 전에 밑에 큰 내를 이루었으므로 이 바위에 앉아 낚시질을 했다고 함.
· 고모동(顧母洞, 古母洞) → 구못골.
· 고산(高山, 孤山) : 장뜰 남쪽에 있는 산.
· 고산동(高山洞) → 고산적골.
· 고산사 터 → 고산절 터.
· 고산잣골 → 고산적골.
· 고산적골[고산동, 고산잣골] : 고산 밑에 있는 마을. 고산절이 있었음.
· 고산절터[고산사터] : 고산적골에 있는 고산사의 터.
· 구모골 → 구못-골.
· 구못골[구모골, 고모동] : 고산골 동쪽에 있는 마을. 지형이 젖먹어 송아지가 어미소를 돌아보는 것처럼 생겼다고 함.
· 구미(九美, 龜美) : 새터 동쪽 구렁에 있는 마을.
· 구미교(九美橋) : 구미와 새터 사이에 있는 다리.
· 능곡(陵谷) → 능꼴.
· 능꼴[능곡] : 장뜰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 능이 있었다고 함.
· 대미럭골 : 장뜰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
· 덕포(德浦) : 구미 동남쪽에 있는 마을. 앞에 개가 있음.
· 도롱골 : 새터 북쪽에 있는 골짜기.
· 바깥구못골 : 구못골 바깥쪽에 있는 마을.
· 보래[보례] : 구못골 서남쪽에 있는 마을.
· 보례(保禮) → 보래.
· 봉양역(鳳陽驛) : 장평 남쪽에 있는 기차역. 중앙선 개통과 함께 세움. 이곳에서 충북선과 중앙선이 교차됨.
· 봉양중학교 : 장평리에 있는 남녀공학 중학교.
· 봉양초등학교 터 : 장평리에 있던 봉양초등학교는 연박리로 이전되고, 부지는 매각되어 양조장으로 사용됨.
· 새터[신대] : 장뜰 동쪽에 새로 된 마을.
· 서제천고속도로진입로 : 구미 마을 앞에 있는 중앙고속도로 진입로. 북쪽으로 원주를 거쳐 춘천으로, 원주에서 영동고속도로 연결되고, 남쪽으로 대구로 연결됨. 1995년 원주 제천간 개통. 2001년 말 전구간 개통.
· 섬논 : 구미교 옆에 있는 논. 가운데에 바위가 있는데, 마치 물 가운데에 있는 섬처럼 보임.
· 소맷골 : 구못골 뒤에 있는 골짜기. 꼴이 좋으므로 소를 매어 놓고 먹임.
· 신대(新垈) → 새터.
· 안고못골 : 구못골 안쪽에 있는 마을.
· 안산 : 장뜰 맞은편에 있는 산.
· 어레빗산 : 보래 앞에 있는 산. 봉우리가 어레빗처럼 생겼다고 함.
· 원장평(元長枰) : 장평리의 원 마을.
· 장네미 ; 장뜰에서 왕암리 왕바우로 가는 고개.
· 장뜰1 → 장평리.
· 장뜰2[장평] : 장뜰 앞에 있는 들.
· 장뜰다리[장평교] : 장뜰과 고산적골 사이에 놓인 다리.
· 장평(長坪)1 → 장평리.
· 장평(長坪)2 → 장뜰.
· 장평교(長坪橋) → 장뜰다리.
· 휘치리고개 : 도롱골에서 봉양리 안골로 가는 고개.
◎ 장평리 문화유산
· 장평리 유적
중앙고속도로 제천IC에 못 미쳐 도로 남쪽에 장평들이 있다. 유물은 이 장평들의 논에서 채집되었다. 이곳에 논을 경작하고 있는 노인의 말에 따르면 “논을 경작하는 과정에서 다섯 리어카 정도의 기와가 논에서 나와 이것을 논 한쪽에 묻었다. 예전에 이곳에 큰 장이 섰으며, 집이 수십 채 들어서 있었다고 전해 내려오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 것을 통해보면 장평들에 대규모로 건물이 들어섰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에서 채집된 기와는 어골문, 복합문의 고려시대 기와이다.
· 고치향교지(古治鄕校址)
장평리 고산동 마을 바로 동쪽으로는 북쪽으로 짧게 뻗은 가지능선이 있다. 이 가지능선의 정상부(해발 254.7m)에서 약간 내려온 동사면 상단에 향교터가 있으며, 향교터의 바로 동쪽 골짜기가 향교골이다. 향교터에는 현재 무덤 2기가 조성되어 있다.
· 고모동 서낭당
슬레이트 지붕에 흙이었던 벽에 시멘트를 덧발라 벽을 만들었다. 서낭당 내부에는 아무것도 없으며, 제단으로서 나무판자만 놓여 있다. 제의의 명칭은 ‘당고사’다. 고모동 서낭당에서의 당고사는 매년 음력 정월 15일 오후 8시 쯤에 지낸다. 제관 1명, 축관 1명, 유사 2명을 선정하는데, 제관은 생기를 봐서 선출한다. 제물로는 돼지머리 · 백설기 한 시루 · 밤 · 대추 · 곶감 등을 진설한다. 제의의 진행은 초헌 - 독축 - 아헌 - 종헌 - 소지 - 음복의 순으로 이루어진다.
· 고산동사지(高山洞寺址)
고산동 마을 남서쪽에 있는 낮은 구릉의 동쪽 계곡부 상단에 동향으로 자리하고 있는 작은 암자터로 현재 소량의 기와편만이 수습되어질 뿐 주초석 등 일련의 사찰관계 유구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사지의 동쪽 약 10m 떨어진 곳에 사찰과 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작은 규모의 우물터가 있다. 한편 현재 사지의 한쪽 편에 오래된 무덤 2기가 있는데, 이런 사실로 보아 적어도 수십 년 전에 폐사한 암자터임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고산동 마을에 사는 윤용박(84세) 옹의 전언에 의하면 ‘고산사지’가 자리하고 있어 마을 이름이 ‘고산동 마을’이며 예전에는 사지내에 주초석과 기와편이 많았다고 한다.
· 고산동 서낭당
슬레이트 지붕에 블록으로 벽을 쌓았다. 문은 철로 되어 있으며 잠겨져 있다. 금줄을 둘러놓았으며, 서낭목으로 느티나무가 두 그루 있다. 제의의 명칭은 ‘당고사’다. 고산동 서낭당에서의 당고사는 매년 음력 정울 10일 밤 10시에 지낸다. 제관은 2명이며, 생기를 봐서 뽑는다. 축관은 제관이 겸한다. 제관으로 선정되면 금줄을 쳐서 금기를 철저히 지킨다. 제물로는 돼지머리 · 백설기 한 시루 · 탕 · 포 · 밤 · 대추 · 곶감 · 고사리나물 · 무나물 등을 진설한다. 제의의 진행은 유교식 절차에 의해 초헌 - 독축 - 아헌 - 종헌 - 소지 - 음복의 순으로 이루어진다. 당고사가 끝나고 나서는 마을 주민들이 모여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
· 고산동유적(高山洞遺蹟)
유물은 고산동 마을의 남쪽 산 밑자락에 밭으로 경작되는 곳에서 채집되었다. 채집된 유물은 흑색 무문은 도기편과 격자문이 타날된 토기편으로 고려 ~ 조선시대의 것으로 여겨진다. 이 마을의 뒷산으로는 고산사라는 절터가 있으며, 동쪽 야산의 동사면에는 제천 고치(古治) 향교터가 있어서 이 마을 일대에 생활유적의 존재 가능성이 높다.
· 보래 서낭당
참나무가 서낭목이며 슬레이트 지붕에 벽은 함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낭당 내부에는 ‘토지신(土地神)서낭당’이라고 쓰여진 위패가 있으며, 바닥에는 마른 볏짚이 깔려 있다. 제의의 명칭은 ‘당고사’다. 보래 서낭당에서의 ‘당고사’는 매년 음력 정월 14일 10일에 지낸다. 제물로는 백설기 한 시루 · 포 · 밤 · 대추 · 곶감 등을 진설한다. 제관은 돌아가면서 하며, 제의에 드는 비용은 마을기금으로 충당한다. 제의의 진행은 초헌 - 아헌 - 종헌 - 소지 - 음복의 순으로 이루어진다. 현재 축문은 읽지 않는다.
· 사기장재 백자요지
사기장재 고개 마루에서 장평1리 쪽으로 약 100m 내려온 지점부터 비포장 길을 따라 백자편과 기와편이 흩어져 있다. 가마는 길 양쪽 경사진 밭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위치는 확인하기 어렵다. 도편은 전체 기형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없으며, 구연부, 굽을 포함한 저부, 측면의 일부 등으로 크기가 작다. 태토는 비교적 정선되었으나 유색은 회백색이다. 굽 안쪽을 깊게 깎은 점과 굵은 모래를 받쳐 포개어 번조한 것으로 보아 19세기 ~ 20세기 전반의 가마로 추정된다.
· 원장평 서낭당
슬레이트 지붕에 블록으로 벽을 쌓았다. 문 위에는 ‘서낭당’이란 현판이 쓰여진 위패가 있다. 서낭당 내부에는 ‘성황대신위(城隍大神位)’라고 쓰여진 위패가 있다. 원장평 서낭당에서의 당고사는 매년 음력 정월 14일에 지냈으나, 2년 전부터 정월달에 날을 받아서 지낸다. 제관과 축관은 각각 한 명이다. 제의의 명칭은 ‘당고사’이다. 제의의 비용은 마을 기금으로 충당한다. 제물로는 돼지머리 · 백설기 한 시루 · 뫼 · 탕 · 밤 · 대추 · 곶감 · 포 등을 진설한다. 제의의 진행은 초헌 - 독축 - 아헌 - 종헌 - 소지 - 음복의 순으로 이루어진다.
· 윤조원 묘와 신도비
장평리에 있는 관찰사(觀察使) 윤조원(尹調元)의 무덤은 문인석, 망주석, 향료석, 상석 등의 선물을 갖추었다. 봉양읍 장평리 소떼박이(소떼배기)라고 불리는 곳에 윤관찰사의 묘와 윤조원 신도비가 있다. 소떼박이라는 명칭은 과거 이곳으로 소떼를 자주 몰고 다녀서 그렇게 불리어졌다 한다. 묘소 관리는 묘 앞에 거주하고 있는 정순흥(66세)씨가 맡아서 하고 있다.
· 윤효자비각(尹孝子碑閣)
봉양읍 장평리 옷장뜰에 있는 효자 윤하박(尹河博)의 비각이다. 어릴 때 할머니 상을 당하여 3년간 시묘하였으며, 그 뒤 어머니가 앓아눕자 백방으로 약을 썼으나 낫지 않으므로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어 먹여 소생하게 하였다. 돌아가신 뒤에는 3년 시묘를 하였으므로 그 효도를 기리어 1938년 비를 세우고 비각을 지었다. 현재는 빌라건물이 들어설 예정에 있어 다른 곳으로 옮겨질 것으로 보인다.
◎ 장평의 역사 인물
⦁윤조원
윤조원(1572-1636)은 칠원 윤씨로 선조 36년(1603)에 과거에 급제하여 예조⦁병조의 좌랑을 거쳐 광해군 때에 북청⦁익산 등지의 목민관으로 선정을 베풀어 치적을 남겼고, 황해감사로 승진되었으나 모함으로 유배되었다가 8년 만에 인조반정으로 풀려났다. 만년에 고향인 제천 고명리 백암동에 낙향하여 살았다. 부모에 효도가 지극하고 가문을 잘 다스리며, 수차 조정에서 불렀으나 나가지 않고 살다가 인조 14년(1636) 12월에 운명했다. 현재 칠원 윤씨 대종손들은 경북 칠곡지역에 거주하고 있으며, 관찰사 윤조원의 종손은 제천시 금성면 대량리에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이간(李杆, 1677-1727)
비석 전면에는 ‘통정대부행재령군수이공지묘(通政大夫行載寧郡守李公之墓)’라 하였고, 뒷면에는 ‘공휘간자화보계출완산 숙부인동래정씨묘재동록외청룡내좌계지원(公諱杆字和甫系出完山 淑夫人東來鄭氏墓在東麓外靑龍內坐癸之原)’이라 새겨져 있다. 비의 크기는 가로 54~57, 두께 16~18, 높이 126cm로 하나의 돌에 비신과 이수부분을 조성하였다. 후손들이 1998년 3월에 새로이 비를 세워놓았으며 여기에는 ‘통정대부행재령군수겸황주진관병마절제사전주이공간지묘(通政大夫行載寧郡守兼黃州鎭管兵馬節制使全州李公杆之墓)’라 새겨져 있다. 묘소는 중앙고속도로가 건설되면서 현재의 위치로 이장 되었다고 한다. 후손으로 제천시 청전동에 거주하는 이영우(70세, 한국독립유공자 유족회 부회장)의 말에 의하면 이희민이 3,1 독립 만세 운동을 하다가 순국하게 되자 일본군이 집안을 습격하여 모든 서적들을 몰수하여 가져갔다고 한다. 이때 이간과 관련된 모든 자료가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간은 병자호란 때 지금의 제천시 금성면 동막리로 낙향하여 지내게 되었다고 전한다.
⦁이희민(李喜敏, 1867-1919)
본관은 전주이며 호는 맹삼(孟三)으로 본명보다 널리 알려져 있다. 이희민은 국풍으로 유명하던 이간이란 분의 9대손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20세 이전에 사서삼경을 통달하였으며, 성품이 강직하여 의로운 일에 늘 앞장 서 오던중, 3.1독립운동이 일어난 16일 뒤인 1919년 3월 17일 제천 장날을 기하여 제천 남부책임자로 많은 동지들을 규합하여 독립 만세를 부르며 일본군 수비대와 맞서다가 세에 밀리어 해산하였다. 그날 오후 6시경 동지들과 더불어 군중들을 재 규합하여 만세 운동을 전개하다가 일본군 수비대 총탄에 복부 관통상을 입고 다음날인 1919년 3월 18일 새벽에 53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다. 1992년 3월 1일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고, 1993년 3월 1일 국가유공자증이 추서되었다. 묘 뒤편에 통정대부행재령군수 이간의 묘가 위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