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천의 역사와 전통을 알아 볼 수 있는 게시판 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제천의 지명과 행정구역의 변화 지역적 특성과 산물 등을 알려드립니다.
작성일 : 22-07-26 14:51
[봉양읍] 명암리[明岩里]
글쓴이 :
문화원
(조회 : 1,514)
6. 명암리[明岩里]
명암리는 봉양읍 소재 마을 가운데서도 산이 많고 계곡이 깊어 청정한 지역이다. 치악산 줄기인 석기암(905.7m)과 감악산(886m)이 위치해 있다. 명암리는 본래 제천군 근우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횡티리(橫티리)와 직티리(直티里)를 병합하였다. 감악산 꼭대기에는 바위로 된 두 개의 영봉이 있는데, 바위로 된 일출봉(日出峰)과 월출봉(月出峰)의 일(日)자와 월(月)자를 합자하여 명암(明岩)리라 하였다. 1920년 9월에 봉양면에 편입되었다가, 1980년 4월 1일 제천시 봉양면이 되었으며, 1995년 1월 1일 시군통합과 동시에 봉양면이 읍으로 승격하며 제천시 봉양읍 명암리가 되었다.
◎ 명암리 지명유래
⦁가막재 : 요붓골에서 강원도 원주시 신림면 황둔리로 가는 재.
⦁감암사(紺岩寺) → 백련사.
감악산(紺嶽山)은 감암산(紺巖山), 겸암산(鉗巖山), 부용봉(芙蓉峯), 금상봉(金箱峯) 등으로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천현산천조에 “감암산은 현 북쪽에 40리에 있다.”라고 하였고, 『여지도서』 제천현 산천조에는 “감암산은 치악산이 아우르는 지맥이다. 현에서 북쪽으로 40리에 있는데, 동쪽으로 내달아 용두산에 이른다.”라고 하였다. 한편, 사명당의 <백련사 중창기> 에는 “신라인은 이 산을 가리켜 ‘부용봉(芙蓉峯)’이라고 하였으며, 고려인은 금상봉(金箱峯)이라 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감악산(紺嶽山) : 사방이 급경사를 이루는 암석산지이며, 치악산 남동쪽에 위치하고 주위에 용두산, 석기암 등이 있다. 북동쪽 기슭에는 수림이 울창하고 북쪽에 백련사, 서남쪽 기슭에 가나안농군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정상까지의 거리가 짧고 경사도 완만하여 산행 초보자도 쉽게 오를 수 있다. 산행기점은 백련사다. 백련사에서 정상까지는 약 30분 걸린다. 하산은 885봉, 요부골을 거쳐 비끼재로 내려가는 길과 재사동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비끼재를 따라 좀 더 내려오면 가나안농군학교 앞에 이르고 학산리 국도로 나오게 된다.
⦁구대동(舊垈洞) → 헌텃골.
⦁구세정(救世井) → 온수탕.
⦁구양천(九羊泉) → 온수탕.
⦁금수탕(金水湯) → 요붓골 동쪽에 있는 약수. 월출봉의 석굴에서 솟아나오는데, 속병에 좋다하며,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줄지 않는다 함. 밑바닥에 금빛 나는 모래 가루가 있음.
⦁목우너미[목우동] : 목우너미 밑에 있는 마을.
⦁목우너미 : 미럭댕이 동남쪽에 있는 고개. 지형이 소가 풀을 뜯는 것처럼 생겼다고 함.
⦁묵우동(묵우동) → 목우너미.
⦁문바우[문암동] : 비끼재 동쪽에 있는 마을. 문바우가 있음.
⦁문바우[문암] : 문바우 마을에 있는 바위. 길 양쪽에 문기둥처럼 우뚝 서 있음.
⦁문암(門岩) → 문바우.
⦁문암동(門岩洞) → 문바우.
⦁미럭댕이[미륵당] : 명암리 남쪽에 있는 마을. 미륵당이 있음.
⦁미럭댕이[미륵당] : 미럭댕이에 있는 미륵당. 높이 2.1m. 1947년에 집을 짓고 미륵을 모심.
⦁미륵당(彌勒堂) → 미럭댕이
⦁미륵당(彌勒堂) → 미럭댕이
⦁밤나뭇골[율목동] : 문바우 서북쪽에 있는 마을. 밤나무가 많았다고 함.
⦁배향대(陪向-)[백암골, 백양골] : 요붓골 동북쪽 일출봉에 있는 골짜기. 전네 천제를 지냈다 고 함.
⦁백련암(白蓮庵) : → 백련사.
⦁백련지(白蓮池) : 명암리에 있는 못. 백련이 많았다고 함.
⦁백암골(白岩-) → 배향대.
⦁백양골(白楊-) → 배향대.
⦁비끼재[사티, 횡티] : 비끼재 밑에 있는 마을.
⦁비끼재[사티, 횡티] : 미럭댕이 서북쪽에 있는 고개. 조선시대 원주(原州)로 가는 관행 고개.
⦁비끼재 : 비끼재의 위치는 봉양읍에서 중앙고속도로 옆으로 난 길을 따라 북쪽으로 가면 명 암리 미륵댕이 마을을 지나서 비끼재 마을이 나온다. 비끼재 마을에서 북서쪽으로 조금 올라 가면 해발 400m 정도의 안부(鞍部)에 비끼재 고개가 있다. 현재는 편도 1차선 도로로 포장 되어 있다.
비끼재는 『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 7, 제천현지(堤川縣誌)에 “현의 북쪽 30리에 있으며, 감암산(紺巖山)의 남쪽 줄기로 원주로 가는 관로(官路)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 사치(斜峙)1 → 비끼재.
· 사치(斜峙)2 → 비끼재.
· 수련암터(壽蓮庵-) : 명암리 북쪽에 있는 백련사에 딸린 암자 터. 신석(身石) 104cm 높이로되어있으며 윗부분은 유두형(乳頭形)을 하고 있다.
· 신흥사터(新興寺-) : 명암리 북쪽에 있는 감악산에 있는 절터.
· 염불암(念佛岩) : 백련사 어귀에 있는 바위. 바위 위에 ‘아미타불(阿彌陀佛)’ 넉자가 새겨저 있음.
· 오효자비(吳孝子碑) : 오진호(吳鎭鎬)의 효자비.
· 왕도터(王都-) : 헌텃골 위 월출봉 밑에 있는 골짜기. 옛날에 어느 왕이 피난했었다 함.
· 요부동(要富洞) → 요붓골.
· 용마음수지(龍馬飮水地) : 요붓골 북쪽 감악산의 옛 석성 안에 있는 못. 옛날에 말을 먹였었다고 함.
· 율목동(栗木洞) → 밤나뭇골.
· 은수탕(銀水湯)[수세정, 구양천] : 백련사 삼성각 아래에 있는 샘. 밑바닥에 은빛 나는 모래가루가 있음. 가뭄에 기우제를 지냄.
· 은적암터(隱寂庵-) : 백련사에 딸린 절터.
· 장수암터(長壽庵-) : 백련사에 딸린 절터.
· 직-티 → 피재.
· 직티리 → 피재.
· 피-재1[직티리, 피방터] : 피재 밑에 있는 마을.
· 피-재2[직티] : 피재는 직치(稷峙)라고 하며, 명암리 미륵댕이 동쪽에서 제천시 모산동으로 가던 고개.
피재는 『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 7, 제천현지(堤川縣誌)에 “현에서 북쪽으로 20리에 있는데, 모산평(茅山坪)으로 내달은 원주의 한 길이며, 용두산의 남쪽 줄기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피방-터 → 피재.
· 헌덕-동(憲德洞) → 헌텃골.
· 헌텃-골[구대동, 헌덕동] : 피재 북쪽에 마을. 감악산성(紺岳山城) 밑으로 옛 집터가 있었음.
· 황가덕이[황계덕] : 피재 동북쪽에 있는 마을. 금계포란혈(金鷄抱卵穴)이 있다 함.
· 황간원-교(黃澗院橋) : 황가원에 있는 다리.
· 황간원지(黃澗院址) : 『한국지명총람』 3(충북편), 제천군에 “황간원터는 미륵댕이에 있는 조선시대의 원집터”라고 나온다. 미륵댕이 마을은 봉양읍 명암리에 있는 중앙고속도로 바로 옆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 앞쪽의 밭에서 기와편과 백자편이 수습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밭 일대가 원터로 여겨진다. 황간원터에 대한 조선시대 기록을 보면,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천현(堤川懸), 역원(驛院)조에 ‘황간원(黃澗院)은 현의 서북쪽 27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충청도읍지』 7, 제천현지, 역원조에서는 ‘황간원은 현의 서북쪽 27리에 있는데, 지금은 없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조선전기에 황간원이 유지되다가 조선후기에 이르러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 황계덕(黃鷄德) → 황가덕이.
· 횡티1 → 비끼재.
· 횡터2 → 비끼재.
◎ 명암리 문화유산
· 감암산성
감악산 정상 주위에 쌓아진 식성으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감악산성이라 청함, 일부 석축은 천연암벽”으로 기록되어 있다. 제천 북쪽 40리의 원주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지점에 있는 둘레 32,600척의 산성으로 일부는 천연암벽을 그대로 이용하고, 기타는 돌로 쌓았는데, 실측한 주위는 1,188.5m이다. 성내에서 삼국시대의 토기와 기와조각이 발견되고 있다.
· 명암리사지(明岩里寺址)
사찰에 대한 기록이나 유구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토기편, 백자편, 기와편 등이 수습되고 있어 이 일대가 사찰터였음을 말해준다. 수습된 기와들을 살펴보면 고르지 못한 태토를 쓰는 경우가 많으며, 선문계열, 격자문계열, 무문계열이 섞여 있어 고려시대에서 조선시대까지 사찰의 법등이 이어졌다고 판단한다.
⦁미륵불(彌勒佛)
미륵댕이에 높이 237cm의 미륵불이 위치해 있다. ‘미륵당’ 또는 ‘미륵불상’이라 알려져 있는 불상이다. 이야기에는 신라 문무왕대에 성명 미상의 스님이 감악산의 백련사로 가던 도중 도둑을 막기 위해 만든 것이라 전해지고 있다.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 에도 그 현상을 전하고 있다.
학계에서는 후삼국시대 이후 미륵신앙의 재등장과 함께 만들어졌을 거으로 추정한다. 민머리에 육계(살상투)를 표시하였고 백호는 없어졌다. 눈썹은 초생달과 같은 호를 그리고 있으며, 눈은 가느다랗게 뜨고 있는데 눈썹과 눈의 높이는 좌우가 서로 달라 대칭에 어긋나 있다. 눈썹의 양 끝 부분과 높이를 같이한 곳에서 얼굴 양쪽에 귀를 표현하고 있는데, 귀는 아래턱의 높이 까지 내려와 있고, 다시 양 눈썹의 선은 그대로 얼굴 한가운데로 모이면서 코의 윤곽을 잡아 부처님의 코를 표현하고 있다. 절반 이상이나 결손되어 있다.
입은 작고 아래턱은 약간 납작하게 처리되어 듬직한 인상을 주고 있으며, 이러한 느낌은 목을 짧게 표현한 것에 이어져 자연히 두툼해 보이는 목과 함께 얼굴 부위를 넉넉하게 해주고 있다. 목에는 두 줄의 선이 삼도를 대신하여 돌려졌다. 어깨는 신체의 윤곽에 비해 벌어진 모습을 하고 있어 비교적 당당하게 처리되고, 어깨와 앞가슴을 두르는 법의는 앞가슴에서 한번 교차되어 몸을 감싸고 있는데 옷주름이 팔에서는 평행사선으로 나오고, 몸에서는 평행‘U’자형으로 드리워져 있으며 선의 표현이 비교적 명료하다.
두 팔은 몸에 붙여 팔꿈치를 구부리고 오른손과 왼손은 손바닥을 밖으로 보인 채 손가락의 모습이 왼손은 엄지와 약손가락, 새끼손가락을 오므리고 검지와 중지만을 펴 보이고 있고, 오른손은 손가락을 모두 펴서 시무외여원인(施無畏與願印)을 맺고 있는데, 왼손은 엄지손가락을 제외한 나머지 손가락이 모두 떨어져 나갔다. 통견의 법의는 어깨로부터 무릎 하단에 이르기까지 전신을 겹겹이 싸면서 평행‘U’자형 옷주름을 형성하고 있다. 무릎 부위에서 겉옷이 무궁화 잎모양으로 끝마무리를 하고, 속옷은 계속 내려와 발등까지 드리우고 있는데, 여기에는 다리의 윤곽을 표시하는 빗문살무늬를 베푼 뒤 물손질을 하였으며, 길이 방향의 구획선이 있다. 무늬가 찍힌 수직선 무늬가 아주 간략하게 표현되었다.
한편 이러한 법의를 걸친 모습의 표현은 불상의 앞면 뿐 아니라 옆면과 뒷면 까지도 두루 표현하고 있고 신체의 윤곽 또한 두루 표현하고 있어 두리새김의 충실성을 보이고 있다. 발의 표현은 법의에 가려진 채 발가락만 형식적으로 노출시켰으며, 불상의 뒷면이나 대좌의 부위에 광배를 부착시킨 흔적은 없다. 대좌는 연화대좌로 구성하였으며 지대석은 없다. 이 연화대좌는 2단으로 구서되어 하단에는 단엽중판(單葉重辦)의 연꽃잎을 복련(伏蓮)으로 돌리고 꽃잎과 꽃잎 사이에 사잇잎을 배열하였으며, 그 위로 폭을 좁힌 상단을 내어 여기에 홑잎의 연꽃을 앙련(仰蓮)으로 두르고 대좌의 윗면은 평평하게 다듬었다. 전체적으로 대좌는 표면이 심하게 마멸되어 있고, 같은 화강석이나 불상과 대좌는 돌의 재질이 다른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양식을 갖춘 고려시대의 석불 중에서 절대편년을 지니고 있는 작품이 없으므로 이 석불입상의 제작 연도를 설정하는데 다소 어려움이 있지만, 후삼국시대 이후 미륵신앙의 재등장과 함께 이 불상이 지방양식의 석불 중에서는 상당한 수준의 사실성을 추구하고 있음을 감안할 때 적어도 11세기 이후로는 떨어지지 않는다고 추정할 수 있다. 현재 이 불상은 중앙고속도로 건설로 인하여 원래의 위치에서 100여m 떨어진 곳에 이전하였다. 이전시 세운 비석의 전면에는 ‘미륵불’, 후면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이 미륵불의 건립연대는 알 수 없고 다만 백년사보다 먼저 건립되어졌다는 것으로 미루어 신라시대 중기에 건립되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이 미륵불이 세워짐으로써 마을 이름이 미륵당이로 불리게 되고 마을수호신역할을 해왔다 그래서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1월 14일 12시에 제를 올리고 있다 그러나 중앙고속도로 공사관계로 부득이 현재의 위치 명암리 六二九~一번지에서 백여미터 떨어진 六三五~四번지(김주칠씨 기증)에 부지를 마련하여 비각은 사정상 옮기지 못하고 미륵불만 옮기게 되었기 이 표석을 세웁니다.
또한 마을에서는 매년 정월 보름에 이 석불입상 앞에서 당제를 올렸었다. 그러나 지금은 개인적으로 치성을 드릴 뿐 마을제사를 지내고 있지 않다. 미륵불이 위치하고 있어서 ‘미륵댕이’라는 마을의 명칭과 함께 이 불상을 모셔온 내력이 자못 오래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백련사(白蓮社)
감악산 중턱에 있는 백련사는 전하는 바에 의하면 신라 문무왕 2년(662)에 의상조사(義湘祖師)가 백련지(白蓮池) 동쪽에 소암자(小庵子)를 창건하고 백련암이라 하였다. 그 후 효소왕 원년(692)에 큰 비로 인한 산사태로 연지와 사찰도 매몰된 것을 현덕왕 11년(819)에 무착조사가 중창하였다. 고려 공민왕 원년(1358)에 나옹화상(懶翁和尙)이 중수하였으며 조선시대 선조 20년(1568) 벽운대사(碧雲大師), 1624년 학인선사(學璘禪師), 정조 22년(1798) 해련 처봉선사(海蓮 處蜂禪師)가 중수하였다. 그 후 산 이름이 감악산이라 하여 감악사(紺岳寺)라 개칭하였다.
순종 융희 4년(1910) 응파 욱일대사(應波 旭日大師)가 중수하고, 1916년 화재로 전부 불에 타 버렸다. 같은 해 10월 윤인선 주지(尹仁善住持)가 현 위치에 중창하고 백련사라 개칭하였다. 1950년 6․25사변으로 폭파된 후 1959년과 1962년에 중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11년에 간행한 『조선사찰사료(朝鮮寺刹史料)』에 제천군 치악산 백련사 중창기(堤川郡雉岳山白蓮社重創記)에 의하면 만력(萬曆) 16년 무자년(戊子年, 1588) 여름 사명대사인 유정(惟政)이 방문하여 쓴 기록이 나타나는 것으로 볼 때 1937년에 발간된 『조선환여승람』 과 1969년도에 발간된 『제천군지』에 사명대사가 언급된 것은 정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더욱이 월악산 신륵사 극락전 단청과 벽화에 등장하는 <사명대사행일본지도(四溟大師行日本之圖)> 는 제천과 사명대사의 관계를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절 남쪽 계곡의 작은 연못에 예로부터 백련(白蓮)이 자생하였다 하여 백련지라 하고 백련사라 하였다고 한다. 동서 77.5m의 길이에 높이 5m나 되는 석축대 위에 있는 500여평 규모의 넓은 사역(寺域)은 남향하고 있으며 뒤로는 감악산이 솟아 있어 정상이 손에 잡힐 듯이 보이는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다. 사역내에 대웅전(목조기와 10간 포집, 1979년 건립)과 강당(석조기와 3간, 1977년 건립), 삼성각(목조함석 3간, 1962년 건립), 요사(목조함석 8간, 1965년 건립)가 있다. 축대 남쪽으로는 넓은 계곡이 있는데 이곳이 연지(蓮池)였다고 하는데, 한 길이 넘는 갈대가 숲을 이루고 있는 습지대가 전개되고 있다.
사찰은 최근 건물이며 유물도 근년의 작품으로 이루어지고 있어 특정지을 만한 것은 없으나 대웅전으로부터 동남쪽으로 200여m의 곳에 부도 1기가 있으며, 150여m 지점에 부도가 있었으리라고 보이는 자연암반 위에 113X90cm로 다듬은 중앙에 직경 10cm의 둥근 구멍을 판 대석이 있다. 대웅전 불상 뒤에 후불탱화, 신중탱화가 있고, 삼성각 안에 칠성탱화, 산신탱화, 독성탱화가 있다. 백련사 중창기는 『조선사찰사료』 에 수록되어 있다.
백 련 사
백련사는 지금으로부터 1081년(서기918)전 무인 신라 제30대 문무왕 의상조사의 창건으로 역사적 변천과정을 거쳐 다소의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오늘에 이르렀으며, 918년 무인 의상조사가 감악산의 산세가 수려하고 천년 영기가 서려있어 수도 도량으로 적절함을 직관하고 암자를 창건한 직후 현재 밑에 보이는 갈대밭 자리에 있던 연못에서 흰 연꽃이 피어나서 암자 이름을 백련암이라 하였다.
▶ 1358년 무술, 고려왕 왕사 나옹화상 여주 신륵사를 창건하고 백련사를 중수하다.
▶ 1624년 갑자, (이조 인조 2년) 취운학건 선사 중수.
▶ 1798년 무오, (정조 22년) 혜련 처정선사 중수.
▶ 1910년 경술, (순종융황 4년) 웅파 욱일선사 중수.
▶ 1916년 병진, (일제) 화제로 인하여 전소되다.(윤민선 선사 중수하다.)
▶ 1947년 정해, (무룡) 태순선사 중수.
▶ 1950년 경인, 6.25동란 폭격으로 반파되다.
▶ 1957년 정유, 주지 박현장 선사 중창하다.
▶ 1979년 기미, 현주지 이담원 일운선사 중창, 현재이름.
전설에 의하면 무착선사가 수도상 소요 자재로 매일 1회씩 용마를 타고 원주 치악산 상원사를 왕복하던 중 인근 험준한 벼랑을 오르다 미끄러져 부상한 말굽 자취가 지금도 있다.
밑으로 서남방 100m 지점 그 때 용마가 먹던 샘물을 지금 용마수라 한다. 신라말 경순왕이 이곳에서 피난을 하였다는 성터 주위가 2만3천6백여척의 역사적 발자취를 영력히 볼 수 있다.
불기 2543년(기묘) 광복절
· 백련사 아미타불좌상(白蓮寺 阿彌陀佛坐像)
대웅전에 모신 주존불로서 목조불이다. 나발(螺髮)에 육계가 있고 이마에는 백호가 있다. 눈은 봉안(鳳眼)이고 코는 우뚝하다. 입은 다물고 엷은 미소를 담고 있고, 귓밥이 커서 풍만감을 주고, 목에는 삼도가 남아 있고 납의는 통견이다. 가슴은 크게 노출되었고, 어깨는 양쪽이 모두 늘어진 감을 준다. 양 손은 양 무릎에 닿을 듯이 들고 있고 결가부좌한 단정한 모습이다. 양식의 특징으로 볼 때 조선후기 조성으로 지역적인 특징이 가미된 작품이다. 총 높이 90cm, 머리길이 23cm, 신체길이 64.5cm, 무릎 폭 48cm, 머리 폭 15cm이다. 지방유형문화재 제217호이다.
<복장기(腹臟記)>에 의하면 이 불상은 본래 단양군 서면 금수산에 있던 조계사(曹溪寺) 극락전에 봉안되었던 삼존불 가운데 주불이었는데, 후대에 백련사로 이전하여 봉안되었다고 한다. 또한, 1736년(영조 2)에 조성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복장유물 가운데는 ‘대불수능엄신주(大佛首楞嚴神呪)’ 다라니경이 수습되었다.
· 백련사부도(白蓮寺浮屠)
백련사 동남쪽에 있는 신라 현덕왕 때의 승려 무착(無着)의 부도이다. 무착조사 정원석(淨圓石)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높이 18cm의 대석 위에 신석(身石) 104cm 높이로 윗부분은 유두형(乳頭形)을 하고 있다. 양식으로 보아 조선시대 것으로 보여진다.
백련사로 돌아오는 스님
석장을 서서히 나서는 듯 걸음걸음 오르니
표연히 옛 사찰이 높다란 언덕에 있네.
초년에 입산수도하여 일찍이 바리를 받드니
가히 천년의 전등(傳燈)을 전하는 명상이로세.
바위에 금수(金水)가 생겨 숙병을 가라앉히니
산악에 수련이 솟은 기운이 엉기어 상서롭구나.
밝은 거울에 틀이 없음을 알지 않았는가
생각을 물리니 돌이켜 혜능스님 생각하는가
- 정운경(鄭雲慶)의 『송운집(松雲集)』 중에서
· 오진호효자비(吳鎭鎬孝子碑)
오진호의 호는 첨암(첨암)으로 효성이 지극하였다. 하루는 한 밤중에 도적이 침입하여 그의 아버지를 해치려고 하자 맨손으로 흉기를 막아 손가락 세 개가 끊어졌다. 그는 부모를 섬기는 마음이 지극하여 매월 보름날에는 술과 진수성찬을 마련해서 부모를 즐겁게 해드렸다. 그의 아버지가 심하게 앓아눕게 되자 백일 동안 기도를 올려 회복하게 하였다. 아버님이 돌아가시자 장례를 치른 후 5개월을 매일 아침 · 저녁으로 성묘하였으며, 다시 좋은 땅을 선택하여 묘를 옮기고 시묘하였다. 어머님이 돌아가시자 역시 3년을 시묘하고 정성껏 보살폈다.
이에 제천 유림(儒林)에서는 그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정문과 비석을 세웠다. 효자비는 160x49x20cm 크기이고, 비각이 있었던 흔적으로 초석이 있으며, 비 건너편에는 구장 조하원의 선정비가 있다. 오진호의 부모 묘소가 명암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대전에 거주하고 있는 오진호의 후손들이 묘소와 비석을 관리하고 있다. 오진호의 묘소는 대전에 위치한다.
· 조하원선정비(趙河元善政碑)
조하원 선정비는 명암 저수지에서 의림지로 가는 길을 따라 5km정도 올라가면 신림으로 넘어가는 길과 의림지로 넘어가는 갈림길이 나오는데, 길 좌측에 마을회관이 있고, 회관 못 미쳐 길가에 세워져 있다. 그리고 개울 건너편에 오진호 효자비가 위치하고 있다. 조하원 선정비는 135x45x19cm의 비신에 가첨석을 얹었다.
◎ 명암리 이야기
· 경순왕이 머무른 피난터
백련사 부근에 경순왕이 피난 와서 머무르던 성터가 있다.
김진호 : 여기 경순왕이 와서 피란하고 그랬지, 여기서.
조사자 : 경순왕이요?
김진호 : 예, 피란하고 성터가 지금두 있어.
조사자 : 어, 어디쯤 있습니까?
김진호 : 거 백련사 부근에.
조사자 : 아 뒤쪽으로, 터가 있어요?
김진호 : 있어, 거기 터가 있을거여.
조사자 : 그 경순왕이 어떻게 피란왔답니까?
김진호 : 그거는 모르고 그 유래를 백련사 그 전에 많았는데. 백련사 불 탈 때, 해방될 때. 일본, 일제 해방될 때 불이 탔대요. 그래가지고 저, 역사가 싹 타뻐리 가지고 그 역사를 잘 모른다는기여 그게.
조사자 : 그 경순왕이 머물은 데는 정확하게 어딥니까?
김진호 : 그, 그러니까 성을 쌓아 가지고, 그 모르죠 확실한 거는 모르는데. 그래 유래가 경순왕이 와 가지고. 문무왕인가 경순왕이 와 가지고 피란하고 가고. 그 돌멩이를 쌓아논 터는 있어. 성이 이래보면은 있드라구. 근데 그 외에는 잘 뭐.
· 경순왕이 쌓은 성터
옛날 경순왕이 신림에 있는 강돌을 주워 올려서 감악산 정상 부근에 성을 쌓는데, 그 성을 감악산 서어라고 한다.
김진호 : 백련사가 문무 이(2)년에 창건됐으니까 뭐 참 역사가 깊죠, 뭐.
조사자 : 그렇지요, 예.
김진호 : 그래고 그 절이 참, 옛날에 경순왕이 와서 거 성 쌓은 것도 지금 나타나고 이는데. 신림 그 강돌을 주어 올려다가 산에 참 성을 쌓었잖아요.
조사자 : 예.
김진호 : 거기 지금도 그 돌이 많이 눈에 보이고 있습니다.
조사자 : 아- 예, 예예, 강돌이 보여요?
김진호 : 예, 강돌이요.
조사자 : 어-.
김진호 : 그 저 금수탕 올라가는데 보믄.
조사자 : 아- 예예예.
김진호 : 저 금수탕, 은수탕 그 뭐 동자바우니 해서 참 거기 거.
조사자 : 글자가 새겨져 있는 거는 우리 어르신 못 보셨습니까? 혹시?
김진호 : 왜, 나무아미타불이라고 한문으루, 입구에 백련사, 지금은 그 포장이 됐어요.
· 감악산 금수탕과 은수탕
백련사에는 금빛 색깔이 나는 금수탕과 은빛 색깔이 나는 은수탕이 위치해있다.
김진호 : 그 너메 백련사 감악산 일출봉에 가면 은수, 금수탕이라고 있고.
조사자 : 금수탕.
김진호 : 예. 그 보면은 방구가 구멍이 이러, 이렇게 너리방석으로 내리 빠져 나가서 가지구 똥그렇게 홈이 쳐 있는데. 금수탕이란 물이 항시 아무리 죙일 떠 먹어봐도 만날 고 자리에 그냥 고래 있어.
조사자 : 어, 그걸 금수탕이라고 그래요?
김진호 : 예, 예.
조사자 : 왜 금수탕이라고 그럽니까?
김진호 : 왜 그럴 것 같으면. 그거 보면은 뭐 반짝반짝반짝 해. 금 같은 게 이렇게 반짝반짝반짝 비켜 물 속에. 그래서 인자 그 누가. 금수탕이라고 했었고. 거기서 이 동자바우래는 게 건네다 보면은 동쪽으로 동자바우가 있어요. 백련사 마당에서 건네다 보면은 동자바위. 그 밑에 보면은 또 은수탕이 있고.
조사자 : 아, 은수탕이요.
김진호 : 어, 은수탕도 있고, 그 동자바우 밑에서 쭉 내리가면 은수탕이 있고. 거기도 보면 하-얀 게 반짝난짝 해 보이니까. 누가 거 은수탕이라고 그래 짓고. 동자바위는 지나 동자같이 생겼고 동쪽에 있는데.
조사자 : 어디쯤에 있습니까?
김진호 : 그 백련사 이래 있으면 바로 직선 동쪽으로 있어.
조사자 : 동쪽으로 왔어요?
김진호 : 거기서 한 왝(500)메다, 한 오백메다도 더 되겠네. 그건 뭐 칠팔백메다, 한 근 일(1)키로 가까이 되겠는데.
· 소도둑을 잡은 미륵
옛날에 마을에서 소를 길렀는데, 어느 날 소도둑이 들어와 소를 훔쳐가려고 하였다. 이 때 미륵이 소를 가져가지 못하도록 앞을 막아섰고, 도둑이 미륵을 칼로 내리쳐 미륵의 중간 부분이 끊어졌다.
이동화 : 옛날에, 옛날에 이 마을에 소를 길렀는데 인제. 소 도둑놈이, 소 도둑놈이 와 가지고서는 소를 훔쳐갈라고 그랬는데. 그래 소를 못 훔치가게끔 미륵에서 막어 가지고선 그래서 이 미륵을 그 소 도둑놈이 칼로 쳤다는 거여. 그래서 저 중간이 끊어져 있어요. 끊어져 가지고서 잇은거야. 그래소 도둑놈을 못 들게끔 막았다는 그런 얘기가 있어요. 전설이 있는 거지.
전설이 있는 거지.
◎ 명암의 노래
⦁명암아라리
아리랑 아리랑
명암리 산 철경{절경}이 하루나 좋아
감악산 선녀탕에 선녀들이 오라 오라하네
곳곳마다 철경이 하루나 좋아
초가삼간 집을 짓고 문화재 영원히 보전하세
감악산에 월출봉 일출봉에 금수탕 은수탕이 있는데에
요즘에는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서 매우 안타깝구나.
일출봉 월출봉이 네그리 자라서
명암리가 본 바탕에서 스스루 됐네
◎ 명암산채건강마을
명암산채건강마을은 제천 시내에서 의림지를 지나 15분 거리인 감악산 아래 위치한 청정마을로 소 도읍개발 사업으로 시작하는 한방명의촌과, 약용식물원, 주말장터, 체험관 등을 지역주민들이 직접 운영하는 마을 웰빙 사업체다. 제천시 봉양읍 명암리 87가구 216명의 주민들은 주민들은 산림이 96%를 차지하고 있는 전형적인 농산촌 마을에서 농업과 주변 산림을 이용해 생업에 종사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이 마을 주민들은 지난 1997년 마을에 있던 명암분교가 학생 수가 줄어들며 문을 닫게 되자 주민 7명이 1억5천여만 원을 출자, 법인을 설립한 뒤 폐교를 사들여 참기름과 들기름을 생산하는 가내수공업 형식의 공장을 세웠다.
조합 설립 이듬해 폐교된 명암 분교를 사들여 시작한 마을 주민들의 사업은 벌써 10년을 훌쩍 넘어 이제는 연간 매출액이 50억 원을 넘어섰다. 명암산채 영농조합법인은 참기름과 들기름, 산초씨기름, 청결 고춧가루, 내가 본 잡곡 포장 등을 생산해 주민소득 증대에 기여해 오고 있다. 청정 산골에서 생산되고 맛과 향이 깔끔하다는 평가를 얻으면서 종업원 수도 5명에서 50여명으로 늘어났다. 여기에 지난 2007년 주민 출자금 1억원과 국비 지원금 15억여원을 투입, 산채건강마을이 들어서면서 ‘사업하는 농촌마을’로 변신했다. 산채건강 마을에는 11,13,16,21평형 숙박시설 8동이 갖춰져 있으며, 110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대형식당도 마련되어 있다. 찜질방과 산악자전거도로, 족구와 배구장 등이 설치되면서 가족과 단체 휴양객들이 줄을 잇고 있으며, 주민들은 장뇌삼과 더덕 등 각종 산나물을 산채건강마을 주변에 식재해 관광객들에게 농촌체험거리로 제공하고 있다.
주말장터는 산림면적이 95.5%인 마을의 자연환경을 활용해 생산한 무공해산채와 지역주민들이 직접 무공해로 재배 생산하는 농산물, 시골장터음식, 지역특산 가공식품, 계곡수콩나물, 즉석두부, 옥수수, 동동주, 시골음식, 약초음식을 판매한다. 4월부터 11월까지 매주 토요일에 열린다. 체험행사로는 산나물 바로알기 및 채취, 음식 만들기와 토종물고기체험으로 돌메기 낚시, 수서 곤충과 물고기 알아보기, 송이버섯, 야생버섯 요리⦁채취 등 각종 체험을 통한 행사가 다양하게 운영된다. 제천이 약초웰빙특구로 지정 된데다 한방으로 인한 관광사업도 활발하다. 주말을 이용해 한방을 통한 건강 챙기기 및 건강 상담과치료, 자연체험과 건강한 먹거리 구입이 동시에 가능한 패키지 웰빙 관광을 즐길 수 있는 최적지로 인기를 끌고 있다.
한방명의촌은 제천시 한방특화도시2010프로젝트 1호 사업으로 명암 산채건강마을이 공동으로 운영하고 있다. 한방명의촌은 한방진료관과 탕제실, 기 치료실 등을 갖추고 한의사, 기 치료사, 간호조무사 등이 상주하면서 각종 불치병과 난치성 질환을 주로 치료하고 있다. 특히 만성적 성인병(고혈압, 고지혈주, 당뇨, 비만)과 난치병(아토피,다발성 경화증), 불치병, 암 등의 특화된 전문치료를 하는 요양센터로 운영된다.
최근에는 한국의 토종약용식물을 자원화한 ‘산약초타운 조성사업’ 으로 산림청 지원 산림소득공모사업에 이 법인이 지원 사업대상지로 선정되었다. 국비 10억 원과 도비 2억5000만 원 등 25억 원을 지원받게 되었다. 이에 따라 내년부터 진입로와 순환로 개설, 약초테마공원, 삼림욕장, 약초정원 조성사업 등이 추진된다. 또한 약초가공체험장, 약초재배사, 채취 체험시설, 한방건강센터, 한방제품센터, 약초갤러리, 전시판매장 등도 만들어질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