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천의 역사와 전통을 알아 볼 수 있는 게시판 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제천의 지명과 행정구역의 변화 지역적 특성과 산물 등을 알려드립니다.
작성일 : 16-07-12 13:44
[수산면] 골 안에 큰 마을 - 수곡리(水谷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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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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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산면의 남동쪽에 있는 수곡리로 가기 위해서는 우선 적곡리로 향해야 한다. 적곡리는 충주로 가는 597 도로를 타고 2㎞ 정도 가다가 좌측으로 향한 길을 따라 다시 1㎞ 더 가야 도착할 수 있다. 수곡 1구는 적곡리 앞에서 이곳과 덕산면의 선고리를 잇는 적곡-선고도로확장공사가 한참 진행중이라 비포장인 도로를 달려야 한다. 약 1㎞ 정도를 가면 수곡 1구를 볼 수 있다. 수곡 2구는 적곡리를 지나쳐 약 1.5㎞를 더 가면 도로변에서 500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수곡 2구를 지나치기 전에 수리의 옛 자연마을이었던 수레골과 수청골을 지나야 하는데 수곡 1구와 수곡 2구는 멀리 떨어져 있어 도면(圖面)상으로는 두 마을이 같은 마을임을 짐작하기 어렵다. 마을에서는 '수산면에서 밥을 해서 덕산면에서 먹는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행정구역의 구분이 모호함을 보여주는 말이다.
원래 이곳은 충주군 덕산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으로 따라 수촌리와 적곡리를 병합하여 수곡리라 하고 제천군 덕산면에 편입되었다가 그 후 수산면에 편입되었다. 수산면에서 수곡리의 1구와 2구로 가기 위해서는 상당히 먼길을 가야하지만, 덕산면쪽에서 수곡리로 들어오면 가까운 이웃마을이다. 마을이 수산면으로 편입되면서 수곡 1구와 2구는 거의 왕래가 없어졌을 뿐만 아니라 마을민이 시장을 이용하는 시장권도 각각 달리하게 되었다. 수산면으로 편입되기 전에는 주로 덕산장을 이용하거나 덕산장(4·9장)과 수산장(5·10장)보다 컸던 단양장(6·12장)으로 갔는데, 현재는 수산장과 제천장을 이용한다. 마을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 편의상 두 개로 구분하여 살펴보기로 하겠다.
수곡 1구 : 수곡 1구는 수곡 2구가 5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졌던 반면에 '붉으실'이라는 단일한 자연마을로 구성되었고 10반으로 나누어졌다. 7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수곡 1구는 마을의 총 가구수가 120여호, 수곡 2구는 130∼140여호에 이르던 큰 마을이었다. 98년 현재 수곡 1리가 57호 수곡 2리가 41호이며 각각 5개반과 3개반이 존재한다. 마을사람들은 현재의 행정구역 구분과는 상관없이 수곡 2리가 3반, 수곡 2리를 구성하는 물촌리와 짚프실을 각각 1반과 2반으로 여기고 있는데, 70년대에 마을이 번성했을 당시에 비하면 지금의 행정구역 편제에 따라 각 반을 구분하는 자체가 부끄럽다고 한다. 수곡 1구, 붉으실은 남양 홍(洪)씨가 제일 먼저 입향하였고, 이후 예천임(林)씨가 입향했다. 마을의 지명은 마을에 처음으로 입향한 남양홍씨의 성을 따라 '붉으실'이라 했다. 수곡 1구의 주요 경작물은 98년 현재 약초(황기, 당귀, 도라지 등)와 고추이며 7∼8년 전에는 모든 밭작물이 고추였던 경우도 있다. 일제 강점기부터 60년대 말까지 마을의 주요 경작물은 조·보리였으며 벼농사는 거의 하지 않았다. 지금도 경사가 아주 급해서 벼농사는 하지 않기 때문에 주식은 주로 조와 보리를 섞은 잡곡이었다.
일제 시대만 해도 이곳에는 한 아름이 넘는 배나무가 많았다. 이곳을 이르는 말중에 '배가 천석, 조가 천석, 소등 천석'이라는 구전이 이를 증명해 준다. 70년대 이전에 마을산에서 수곡 1구를 보면 울창한 나무들로 마을은 보이지 않고 초가지붕들만 보였다고 전한다. 여름의 진한 녹색으로 들판이 무성해 질 때 황색의 지붕들은 마치 바다에 작은 배들이 떠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이들 나무는 일제시대 말에 모두 일본인들에 의해서 베어졌다. 또 수산면에서 이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마을의 입구를 가리는 마을숲이 조성되어 있었으나 이 또한 일인들에 의해 베어지고 없다. 마을과 외부를 연결하는 길목에 고개 세 개가 있는데 배재, 발람실, 갈고개재이다. 배재와 발람실재는 마을에서 덕산면으로, 갈고개재는 수산으로 넘어가는 길이었다. 배재는 현재 적곡-선고간 도로확장 공사를 하면서 산이 두 동강이 났는데 배나무가 많아서 '배재'였던 이곳은 '배를 째(갈라라)'라 한다. '발람실'은 이곳에 농토를 개척하는 한 사람이 아들을 낳고 며느리 8명을 얻어 개간하였다 하여 원래는 '팔람실'이라 했다. 마을에는 또 선림초등학교가 있었는데 주요 통학권은 덕산면의 도기1구와 2구, 수곡 2구였다. 현재 선림초등학교는 학생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여 폐교한 상태이고, 인근지역의 학생들은 모두 수산초등학교로 등교한다.
수곡 2구 : 수곡 2구에는 총 10개 반이 있으며 내골(1반), 단지실(2반), 본동인 물촌리(3, 4, 5, 6, 7반), 짚실 또는 지프실(8, 9)이라 불렀던 곳과 웃말(10반)이다. 이 중에 내골과 단지실은 대전리로 행정이 변경되었고, 웃말은 수리에 포함되었다. 수곡 2구에는 파평윤씨가 경기도 파주에서 처음으로 입향하였으며 오티리에 7대조의 묘가 있다. 현재 수곡 2구의 주요 경작물은 황기, 고추, 수수가 주종을 이룬다. 일제 시대와 60년대 말까지는 벼농사 35마지기를 차지하였으나, 지금은 3가구 20마지를 경작한다. 벼농사를 주업으로 할 때는 밭작물이 주로 자급용으로 사용되었지만, 쌀의 경제성이 하락되자 이제는 자급용으로 벼농사를 하며, 밭작물이 주업으로 자리하고 있다. 마을에서 밭농사 중심으로 재배작물을 육성하는 것은 환금작물이 농업경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