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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제천의 지명과 행정구역의 변화 지역적 특성과 산물 등을 알려드립니다.

작성일 : 22-07-06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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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환여승람] 명신
 글쓴이 : 문화원
(조회 : 1,950)  
① 정수홍(鄭守弘) : 자는 의백(毅伯), 아호는 동천(桐川)으로 동래(東萊) 사람이며, 대호군(大護軍) 정인(鄭絪)의 후손이다. 문과에 급제하였고, 여러차례 승진을 거듭하여 지방장관에 역임했다. 관직은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이르렀고 문장 실력은 세상에 이름이 나 있었다.
세종(世宗, 1418~1450)이 풍천(楓川)이란 아호를 내려주어 그것을 사용하였다. 문장의 화려함은 붉게 물든 단풍같고, 문장의 요동치는 움직임은 쉬지않고 흐르는 강물을 내포하고 있는 것 같다.
권근(權近)·하륜(河崙)과 더불어 도(道)와 의(義)에 대한 논의를 하였으며, 전주(全州) 학천서원(鶴川書院)에 배향되었다.

② 김시양(金時讓) : 자는 자중(子中), 아호는 하담(荷潭)으로 안동(安東) 사람이며, 현감 김인갑(金仁甲)의 아들이다. 선조(宣祖, 1567~1608) 시대에 문과에 급제하여 호당(湖堂)이 되었다.
관직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이르렀으며, 청백리(淸白吏)로 뽑힌 사람이고,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기억력이 남보다 특출나고 충성과 지략은 사물을 처리하는데 뛰어나 세상의 으뜸이었다. 문집(文集)을 남겼다.

③ 김남중(金南重) : 자는 자진(自珍), 아호는 야당(野塘)으로 경주(慶州) 사람이며 계림군(桂林郡) 김곤(金梱)의 후손이다. 광해군(光海君, 1608~1623) 때 문과에 급제하여 광해군 15년(1623)의 반정시 제일 먼저 한림원(翰林院)에 진입하였다.
관직은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이르렀고, 경주군(慶州君)으로 봉해졌다. 추증된 벼슬은 좌찬성(左贊成)이며, 시호는 정효(貞孝)다. 문곡 김수항(文谷 金壽恒)이 쓴 비문이 있다.

④ 정세규(鄭世規) : 학행 편을 보면 알 수 있다. 인조(仁祖, 1623~1649) 14년(1636) 충청감사가 되었으며, 이 해 겨울에 호란(胡亂―병자호란)이 발생하였을 시 난을 평정하기 위해 제일먼저 남한공(南漢公)으로 군사를 이끌고 왔고 이어 전라·함경 감사에 이르렀다.
관직은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이르렀고, 시호는 경헌(景憲)이다. 후에 임금이 조서를 내려 공신으로 등록하였으며, 송곡 이서우(松谷 李瑞雨)가 쓴 생전의 공덕을 기린 글이 있다.

⑤ 이세근(李世瑾) : 자는 성진(聖珍), 아호는 정헌(靜軒)으로 벽진(碧璡) 사람이며, 습재 이상급(李尙伋)의 증손이다. 윤명재(尹明齋)의 제자로서 글과 학문이 천거되어 존중되었으며, 세상에서 행한 그의 행실 기록은 랑장(옛랑나라 문헌)에 있다. 숙종(肅宗, 1674~1720) 시대에 문과에 급제하여 상국의 사절로 간적이 있다.

⑥ 정익하(鄭益河) : 자는 자겸(子謙), 아호는 겸재(謙齋), 태백산인(太白山人)으로 정보연(鄭普衍)의 손자다. 영조(英祖, 1724~1776) 시대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판서(吏曹判書)가 되었으며, 참찬(參贊)에 이르렀고, 나라에서 명망있는 노인장(老人丈)이 되었다. 시호는 충헌(忠獻)이다.
불천위(不遷位)로 명을 받았고, 영의정 김병학(金炳學)이 쓴 생전의 공덕 기록이 있다.

⑦ 정술조(鄭述祚) : 자는 효선(孝善), 아호는 삼춘당(三春堂)으로 해주(海州) 사람이다. 백정 정이(鄭易)의 후손이다. 학문과 글은 순박하고, 돈독하며 충성과 효성을 겸비하였다.
정조(正祖, 1776~1800) 시대에 문과에 급제하여 상국에 가는 국신 사절단으로 가 송우암(송시열)·송동춘(송준길)을 문묘에 배향할 수 있도록 청원하는 상소문을 올려 황제의 허락을 얻어냈다. 이를 조정에서 듣고, 예관(禮官)에게 명하여 제사를 지내 주도록 하였으며, 효를 기리기 위해 정려(旌閭)를 세워 주었다. 문집(文集)을 남겼다.

⑧ 이지연(李止淵) : 자는 심일(心一), 아호는 학고(鶴고)로 전주(全州) 사람이다. 우재 이후원(李厚源)의 후손이다. 현종(顯宗, 1834~1849)때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이르렀고, 문장은 자신이 쓰고 싶은대로 써도 훌륭하였고, 나라에서 명망이 높은 원로가 되었다.
문집을 남겼으며, 계전 신응조(申應朝)가 쓴 행적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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