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문화사료관 제천학아카이빙

   

제천학아카이빙

제천문화원제천학아카이빙 입니다.

제천의 역사와 전통을 알아 볼 수 있는 게시판 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제천의 지명과 행정구역의 변화 지역적 특성과 산물 등을 알려드립니다.

작성일 : 16-07-11 14:34
목록
[조선왕조실록] 농업과 군사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3,432)  

1. 각림사(覺林寺)와 의림지(義林池)
 
각림사에 대한 내용은 태종 조에 몇 건 등장하고 그 이후로는 찾아볼 수 없다. 주된 내용은 제천창의 쌀과 콩 등을 각림사에 하사하거나 바꾸어주는 일이다. <조선왕조실록> 기사에 의하면 각림사에 대한 각별한 배려는 태종과의 오랜 인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태종은 "각림사는 내가 젊었을 때에 놀던 땅이다. 지금도 꿈속에서 가끔 간다. … 중략… 그러므로 중수하고자 하는 것이지 부처를 좋아하여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태종 16년과 17년, 22년에 걸쳐 나오는 각림사 관련기사에서는 주로 제천창에 보관되어 있는 쌀과 콩, 보리 등을 본궁(本宮)의 것과 바꾸어 하사하였다는 내용을 볼 수 있다. 성종 5년 8월 4일의 기사에서는 의림지를 수축(修築)하는 데 대한 내용을 볼 수 있다.

 이 기사에서 주목되는 것은 바로 "의림지가 관개(灌漑)하는 바가 넓기 때문에" 터진 곳을 다시 쌓아야 한다고 언급한 점이다. 실제로 의림지에 관한 최초의 기록인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의림지가 관개라는 논은 400결에 이르고 있다. 당시에 400결의 논에 관개한다는 것은 의림지의 역할이 그만큼 두드러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의림지의 역할, 즉 제언이나 보의 역할이 농업의 발달과 더불어 한층 더 증대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왕조실록>상에 등장한 의림지 관련 기사는 단 한 건 뿐이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구완회는 이 기사를 의림지의 기능이 일시적으로 정지되었던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또한 중앙정부의 가장 핵심적인 기록에서 의립지에 관한 언급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이유를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해 설명하였다.

 그 이유는 의림지의 기능이 정지되거나 쓸모가 없어져 굳이 언급할 필요성이 없었기 때문이거나 혹은 의림지가 더 이상 논란의 여지가 없을 만큼 지속적인 제언의 구실을 해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구완회는 이 가운데서 후자에 한층 더 힘을 실어주고 있다. 그는 이에 대한 뒷받침으로 이 기록 이후에 쓰여진 <동국여지승람>에서 의림지에 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있었다는 점을 들고 있다. <조선환여승람>에서는 의림지에 관한 다음과 같은 언급을 찾아볼 수 있다.

  "제천군의 북쪽 10리 지점 모산리(茅山里)에 있다. 저수지의 면적은 13.7 정보(町步)이다. 세종(1397~1450)시대에 충청도 도신(道臣) 정인지(鄭麟趾)에게 명을 내려 물을 저장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저수지의 주변에는 큰 소나무가 울창하게 들어서 있다. 저수지의 서쪽에는 물이 넘칠 때 아래로 흘러가는 출구가 있는데 깎아지른 절벽이 천척(300m)이나 된다. 순채·붕어 역시 의림지의 특산물이다. 고기를 잡으면서 즐기는 사람들이 줄을 잇듯 끊이지 않는다. 실제로 의림지는 충북에서는 이르난 곳이다(후략)"


2. 농업(農業)과 양잠(養蠶)
 
중종 20년 12월 19일에는 각 도의 볍씨 종자 부족과 그 해결방안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각 도의 실농(失農)한 고을을 추려 종자가 되는 볍씨를 나누어주거나 혹은 공물을 줄임으로써 스스로 볍씨를 조달하도록 배려하고 있다.
 특히 충청도에서 실농한 열 일곱 고을 중 제천·청풍·단양 등에 4만 9천여 석을 종자로 나누어주었으며 부족한 부분은 공신전(功臣田)·직전(職田)·별사전(別賜田)을 감하여 충당하였다. 선조 28년 5월에는 충청도 관찰사가 벼의 작황을 보고하기도 하였다. 태종 17년 1월 11일의 기사에서는 각 도에 양잠소를 정하는 내용을 볼 수 있다. 이때 충청도 청풍에도 양잠소가 설치되었으며 이의 주된 목적은 백성으로 하여금 본받게 하기 위함이었다.
 당시로서는 각 도에 양잠소를 설치하여 양잠 자체를 국가적인 차원에서 장려하고자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세종 13년 3월 21일에는 임금이 관에서 주도하는 양잠을 위해 민가에서 재배한 뽕잎을 채취하여 관청의 누에 기르는 일을 금하도록 하였다.
 마침 청풍군을 순찰한 최윤덕이 잠실(蠶室)에 속한 뽕나무가 많지 않은 것을 보고 뽕잎의 채취와 조달을 민간에 의탁한 점을 의심하자 임금이 충청도 감사를 통해 이를 적극 감찰하게 하였다.

 이 두 기사는 모두 각 도의 양잠소가 모두 민간을 계몽하기 위한 차원임을 밝히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수행하도록 장려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3. 군사(軍事)
 
단종 1년 6월에는 의정부에서 군기(軍器)의 수를 조정하는 내용의 기사가 등장한다 도회소(都會所)에서 생산하는 군사물자의 양을 정하여 각 지역에서 관할하게 하였다. 세조 3년에는 병조의 건의로 중·좌·우익을 폐하고 거진(巨鎭)을 설치하였다. 이때 충청도는 공주진(公州鎭)·홍주진(洪州鎭)·태안진(泰安鎭)·천안진(天安鎭)·청주진(淸州鎭)·충주진(忠州鎭)으로 개편되었는데 제천과 단양·청풍은 모두 충주진에 소속되었다. 성종 1년에는 각 지방별로 군사의 수를 보다 현실적으로 책정할 것을 논의하였으며 이어 3년에는 하삼도(下三道)의 군액(軍額)이 많은 것을 줄여 보다 정예화 해야함을 재확인하였다. 성종 9년에는 군기 연마에 소홀했던 각 도의 수령들을 징계하여 군기를 더욱 강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임진왜란 2년 후인 선조 27년에는 병조참판 심충겸(沈忠謙)이 군량미 부족에 대해 고하였는데, 이때 충청도 지방의 군량이 가장 모자라 오직 태두(太豆) 10여 석만이 남아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동왕 29년에는 비변사에서 하삼도의 방비를 보다 철저히 할 것을 건의하였다. 조령(鳥嶺)과 죽령(竹嶺) 가운데서 죽령은 청풍과 단양, 제천 및 경상도의 풍기 군사가 맡아 지키는 것으로 역할과 영역을 분담하였다. 조령과 죽령의 경우 그 군사적인 중요성이 두드러진 곳이었으므로 상당히 신중하게 논의하고 있다.

4. 그 외의 문제들
 
세조 12년 대사헌 양성지(梁誠之)는 상소를 올려 실록을 보관하는 문제에 대해 언급하였다. 이 때 사고(事故)의 이전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였는데 그 일부에 따르면, 충청도 충주에 있던 것을 옮겨 청풍의 월악산(月岳山)에 두도록 하였다는 내용이다. 중종 13년에는 청풍군에 귀뚜라미가 나타났다는 기사가 실려 있으나 당시에 귀뚜라미의 출현이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왜 이에 주목하였는가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보이지 않는다.

광해 8년에는 제천 유생(儒生) 장우추(張宇樞)가 "동서남북 붕당의 화를 그치게 할 것, 기강을 세울 것, 세금을 줄일 것" 등을 골자로 여섯 개의 항목을 적어 상소를 올렸다. 이에 대해서 정부차원으로 어떠한 논의가 이루어졌는가에 대한 내용은 나타나 있지 않다.


 
이전글  다음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