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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의 역사와 전통을 알아 볼 수 있는 게시판 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제천의 지명과 행정구역의 변화 지역적 특성과 산물 등을 알려드립니다.

작성일 : 16-07-11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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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지역적 특성과 산물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3,875)  

1. 수도로의 상경로 제천
 
세종조에 전국의 역을 정비하여 교통을 원활하게 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때 충청도도 예외는 아니어서 합리적인 선에서의 역 정비가 이루어지게 된다. 특히 청풍은 육로뿐만 아니라 남한강을 끼고 있는 지역이기 때문에 수로를 이용한 공물의 운반이 이루어졌던 곳이다. 왕조실록에도 역시 이런 내용들이 등장한다.

 세종 14년 1월 8일의 기사에서는 왜인 사신의 상경 경로를 수정하여 기존의 수로(水路) 이용하지 않고 제천과 단양 등지를 통해 들어오도록 하고 있다. 부산포 등에서 상경하는 경로가 대략 상주·문경·충주 등을 거치는 것으로 일괄되어 역촌의 백성들이 고통을 받자 상경 경로를 수정함으로써 민폐를 줄이고자 하였다. 이때 거론된 경로 중 제천과 단양을 경유하는 경로가 바로 경주·안동·영천을 거쳐 단양과 제천을 지나는 지금의 중앙선과 일치한다. 현재에도 제천이 중앙선·충북선·태백선이 통과하는 철도 교통의 요지인 점을 감안하면 상당히 흥미로운 일이다.

 한편 문종 원년에는 대마주(對馬州)에서 보낸 왜인 사신의 청풍을 거쳐 상경하다 숨지자 충청도에서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부산포로 들어오는 왜국(倭國)의 사신은 물론 일반인들이 이용하는 상경 경로는 역시 제천 일대를 거치는 것이었다. 왕조실록의 이러한 기사를 통해 제천과 그 일대가 남쪽에서 수도로 향하는 비교적 일반화된 상경 경로였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세조 6년 2월 5일 기사에는 각 지방의 역(驛)을 정비하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때 청풍군의 황강역(黃江驛)과 수산역(水山驛)·안음역(安陰驛), 단양군의 장림역(長林驛)·영천역(令泉驛), 제천현의 천남역(泉南驛) 등 총 27개의 역을 합하여 한 도로 하고 이를 경기충청우찰방(京畿忠淸右察訪)으로 하여금 맡아보도록 하였다. 역을 정비하는 일은 효율적인 관리를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역촌 근처의 백성들에게 지워지는 민폐를 줄이기 위함이기도 했다.


2. 유배지 제천
 <조선왕조실록>의 내용 가운데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범죄에 대한 사법적인 처리 문제인데, 이는 윤리를 바로잡고 사회의 기강을 세우기 위해서 꼭 필요한 일이었다. 대체로 사람을 죽인 일에 대해서는 교형(絞刑)·참부대시(斬不待時) 등의 중형이 내려졌으며 이외에 수령에 대한 탄핵이나 유배 등의 조치가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실제로 교통의 요지, 혹은 지방에서 서울로 가기 위한 주요 통로 가운데 하나였던 제천은 또한 유배지이기도 했다. 세종 31년 7월에는 익녕군 이치가 제천에 안치(安置)되었다. 세조 1년에는 세종의 후궁인 혜빈 양씨가 청풍으로 유배되었고 이어 세조 2년 5월에는 제천에 부처(付處)되었던 사람들을 석방하였다는 기사를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 유배지로 선택된 곳은 변방이나 섬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가운데서 제천과 청풍 등지가 유배지로서의 역할을 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교통의 요지로 표현될 만큼 소통이 좋은 곳이 유배지로 선택되었다는 것은 언뜻 보아도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들 기사를 꼼꼼히 살펴보면 주로 제천 등지에 안치되거나 부처되었던 사람들이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는 다른 곳으로 옮겨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적어도 왕조실록의 기사에 따르면, 제천 등지는 물론 실제로 유배지였을 테지만 아울러 귀양을 가는 가운데서 머무르는 중간지점 혹은 정확한 판결을 기다리기 위한 대기처의 역할도 함께 했던 것으로 보인다.

연     대

내          용

세종 31년 07월 04일

익녕군 이치를 제천에 안치하다.

세종 31년 07월 05월

익녕군 이치와 이덕생을 극변에 안치할 것을 청한다.

세조 01년 06월 11일

혜빈양씨, 상궁박씨 등을 청풍으로 귀양보내다.

세조 02년 05월 23일

사헌부에서 제천에 부처한 서억수 등을 석방하게 하다.

세조 03년 08월 20일

제천에 안치한 맹규, 중규 등을 자원에 따라 옮기게 하다.

연산 10년 03월 27일

엄씨와 정씨의 자식을 유배보내고 영접하지 못하게 하다.

연산 10년 04월 01일

김세필을 청풍으로 정배하였다.

중종 01년 09월 05일

박원종 등이 폐세자 안치 문제를 아뢰다.

중종 02년 01월 29일

유순 등이 죄인들의 죄를 더하라 아뢰니 따르다.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제천 관련 유배 기사

 또한 역모로 다루어진 사건에 대한 언급이 경종 3년과 정조의 행장에서 각각에서 한 차례씩 등장하는데 이는 대체로 원만히 해결되는 양상을 보인다. 전자의 경우 개인적인 원한에 의한 일을 무고(無告)하여 일어난 것이므로 사실상 정권찬탈을 위한 역모라고 할 수는 없다. 후자의 경우도 원주 사람과 제천 사람 여러 명이 어울려 역모를 일으키고자 하였으나 일찍 발각되었다.


3. 제천의 산물(産物)과 공물(公物)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제천현의 토의(土宜), 즉 토산물은 "기장·피·벼·조·콩·보리·뽕나무·닥나무·칠(漆)"이라고 하였으며 토공(土貢)은 "꿀, 밀, 종이, 돼지털, 곰의 털, 족제비털, 범의 가죽, 여우가죽, 느타리, 석이, 호도, 지초"등으로 나타난다. 근방인 청풍군과 단양군의 산물도 이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조선왕조실록≫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제천 지역의 산물은 석류황(石硫黃)이다. 이것은 보통 유황(硫黃)·유(硫)·황요사(黃 砂)·석류적(石硫赤) 등으로 불리는데 색깔에 따라 각기 다른 이름이 붙여지기도 했다.

 이규경에 따르면 우리 나라에서는 금성(金城)·수안·경주·청풍(淸風)의 학암(鶴巖)·단양 북쪽의 황점곡(黃店谷) 등지에서 생산되었던 것으로 전한다. 석류황에 대한 기사는 총 일곱 건이 등장하는 데 주로 성종조에 편중되어 있다. 석류황이 화약을 만드는 재료였기 때문에 그와 관련된 기사는 모두 군사적인 것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전에는 일본에서 바치는 것을 사용하였으나 그것이 점차 줄어들자 그에 대한 대체 방안으로 청풍의 석류황이 선택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품질이 일본의 것과 같은가를 시험하는 자리가 마련되었으며 공물로 바치는 것을 장려하기 위해 포상하는 제도를 논의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성종 8년 4월 6일의 기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중종실록≫을 보면 녹반(綠礬)의 채취 문제가 논의되고 있다. 녹반 역시 황 화합물이므로 화약과 유사한 용도로 사용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제천 일대에서 나는 산물은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국가적으로 가장 미묘한 사안이 되었던 것은 석류황이나 녹반 등의 광물이었다. 물리적 속성상 모두 화약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므로 군사적인 용도로 보았을 때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을 것이다.

 이밖에 세조 14년에 충청도의 영춘과 제천 등지에 사람을 보내어 옥등석(玉燈石)을 채취하도록 했다는 기사를 확인할 수 있다. 옥등석의 사용처와 필요한 양 등에 대해서는 정확히 기록되지 않아 구체적인 사항은 알 수 없다. 다만 단양과 청풍, 제천 일대에서는 광물의 재취가 비교적 빈번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한편 광해 12년 10월 7일의 기사에는 청풍과 제천, 단양 등지에서 정해진 조세를 목재로 환산하여 바치게 하면 나라와 백성 모두 이익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내용이 등장한다.

 제천과 청풍 일대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었으며 전국적인 조세제도 정비의 일환이었다. 조세제도의 정비는 많은 세금과 부역으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는 백성을 구제하기 위한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제천이나 청풍 지역을 비롯하여 전국을 대상으로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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