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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기행

제천문화원 마을기행 입니다.

제천의 역사와 전통을 알아 볼 수 있는 게시판 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제천의 지명과 행정구역의 변화 지역적 특성과 산물 등을 알려드립니다.

작성일 : 22-07-26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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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학면] 송한리[松寒里]
 글쓴이 : 문화원
(조회 : 2,973)  
송한리는 용두산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소나무 숲이 많이 우거져 있어 큰 가뭄이나 큰 수해가 없는 마을이라고 한다. 석회암으로 형성된 고갯마루인 곱돌고개가 있다. 매끈매끈한 횟돌(곱돌)이 많았으므로 ‘곱돌고래’라 한다. 본래 제천군 북면 지역으로서 쇠가 났으므로 ‘소난이’, ‘솔안’ 또는 ‘송한(松寒)’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굴암리(屈岩里)를 병합하여 송한리라 해서 송학면에 편입되었다. 1980년 4월 1일 제천시 승격에 따라 제원군 송학면 송학리가 되었다가, 1995년 1월 1일 시군 통합을 제천시 송학면 송한리가 되었다. 특산물은 사과, 고추, 수박, 담배 등이 있다.

◎송한리 지명유래

·가실곡(加實谷) → 가실골.
·가실골[가실곡] : 굴바우 서남쪽에 있는 마을.
·굴바우1[굴암] : 굴바우가 있는 마을
·굴바우2[굴암] : 솔안 동남쪽에 있는 바위. 밑에 굴이 뚫려 있음.
·굴암(屈岩) → 굴바우.
·너갈티(汝渴峙) : 너갈티 고개가 있는 산.
·너갈티(汝渴峙) : 솔안 동남쪽에 있는 바위. 밑에 굴이 뚫려 있음.
·능골(윗말) : 미고개 윗 지역
·다랫양지[다양지] : 주막거리 양지쪽에 있는 마을.
·다양지(多陽地) → 다랫양지.
·독정촌(獨停村) → 독종말. 송한2리 마을회관이 있는 마을.
·독종말[독중말, 독종촌] : 주막거리 서쪽에 외따로 있는 마을.
·돌매기 1 [석항] : 돌매기 밑에 있는 마을.
·돌매기 2 [석항] : 산 뒤 서북쪽에 돌매기로 가는 고개. 돌이 많음(마을 사람들은 돌무기라고 부르기도 함.)
·미고개 ¹(未古介)[미현, 미티, 미현동] : 미고개 밑에 있는 마을.
·미고개 ²(未古介, 美古介)[미현, 미티] : 솔안 동북쪽에 있는 고개. 『한국지명총람』 에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 금마리로 가는 고개. 높이 346m. 옛 무덤이 있으며 조선 시대 쇠가 났다.”라고 기록되어 있음.
·미티(美峙) → 미고개.
·미현(美峴) → 미고개.
·미현동(美峴洞) → 미고개.
·바랑 양지들 : 햇살이 많이 쪼이는 들.
·사곡(寺谷) → 점골.
·사그막재 : 솔안 북쪽에서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 금마리 사그막으로 가는 고개.
·산뒤 : 굴바우 동북쪽에 있는 마을. 송학산 뒤가 됨.
·상솔안[상송한] : 솔안 위쪽에 있는 마을.
·상송안 → 상솔안
·상송한 → 상솔안.
·석항¹(石項) → 돌매기.
·석-항²(石項) → 돌매기.
·승광사(僧光寺) : 송한이에 있는 절. 석탑과 옛 기와 조각이 흩어져 있음.
·엄승곡(嚴僧谷) → 엄승골.
·엄승골[엄승곡] : 상솔안 서남쪽에 있는 마을.(엄씨 중이 죽었다고 함)
·오효자비(吳孝子碑) : 산 뒤에 있는 효자(孝子) 오인용(吳仁庸)의 비.
·웃산뒤 : 산뒤 위쪽에 있는 마을.
·은행나무땀 : 솔안 북쪽에 있는 마을. 은행나무가 있음.
·잣나무골 : 솔안 북쪽에 있는 골짜기. 잣나무가 많았음.
·절골[사곡] : 엄승골 동남쪽에 있는 마을. 절이 있었음.
·조리재 : 솔안에 있는 고개. 예전에 제천에서 영월로 가는 관행 길이었음.
·주막거리[주막동] : 솔안 동쪽에 있는 마을. 옛 관행 길가에 주막이 있었음.
·주막동(酒幕洞) : 주막거리. 주막이 있었음.
·중말[중촌] : 상솔안과 하솔안 사이에 있는 마을.
·중촌(中村) → 중말.
·중말, 중촌(中村) : 송한2리 교회가 있는 마을.
·진두득 : 엄승골 옆 둔덕에 있는 마을.
·청룡등(靑龍-) : 웃산 뒤 북쪽 청룡산 밑에 있는 등성이.
·풀뭇골 : 미고개 밑에 있는 마을. 미고개에서 쇠가 났을 때 쇠를 다루려고 이곳에 풀무를 놓았었다고 함.
·하솔안 : 솔안 아래 쪽에 있는 마을.
·회나뭇들¹ : 회나뭇들 옆에 있는 마을
·회나뭇들² : 솔안 앞에 있는 들. 회나무가 많았음.

◎송한리 문화유산

⦁경주이씨묘역(慶州李氏墓域)
  이시진(李時振)의 아내인 파평 윤씨 효열문 입구 들어서면서 우측으로 이경윤의 신도비가 있고, 경주 이씨 묘역은 효열문 앞 100m 전방 산 능선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에는 경주 이씨  6기의 요가 있다. 제일 위로부터 비석 전면에 ‘통정대부행기린도찰방증봉직랑사부사정 경주이공시원지묘(通政大夫行麒麟都祭訪贈奉直郎司副司正 慶州李公始元之墓)’라 새겨진 이시원(李時元)의 묘가 있고, 이시원의 묘에는 문인석, 향로석, 상석, 묘비석, 등을 갖추고 있다.
  그 아래에 비석 전면에 ‘증통정대부승정원좌승지겸 경연참찬관(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氣 經筵參贊言)’ 이라 새진 이발(李渤)의 묘가 있는데, 문인석, 향로석, 상석, 묘비석 등을 갖추고 있다.
  그 아래의 비석에 ‘증자헌대부이조참판겸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도총관(贈資憲大夫吏曹參判兼知義禁府事五衞都摠府都摠管)’이라 새긴 이경윤의 묘가 위치하고 있다.
그 아래에 비석 전면에 ‘증통정대부슨정원좌승지겸 경연참찬관행통훈대부금대산군수(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 經筵參贊官行通訓大夫錦山郡守)’라 새긴 이대수(李大遂)의 묘가 있다. 묘소에는 문인석, 향로석, 상석, 묘비석을 갖추고 있다. 그 아래에 통덕랑 이시진과 효열문의 주인인 파평윤씨의 합장묘가 있다. 모쇼에는 향로석, 상석, 묘비석 등을 갖추고 있다. 제일 아래에 ‘행병절교위부사용(行秉節交慰副司勇)’이라 새긴 이을(李乙)의 묘가 위치하고 있다. 묘소에는 문인석, 향로석, 상석, 묘비석 등을 갖추고 있다.

● 오인용효자비(吳仁庸孝子碑)
  제천 장락역에서 주천쪽으로 국도를 따라 7km 정도를 가면 송학면 송한리 산뒤마을에 이른다. 송한리 입구 덕고개에서 주천방향으로 500m정도 내려가서 우측으로 200m 들어간 지점 마을 안으로 들어가는 길 사이 오른쪽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이 비석이 세워짐으로써 비석거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비석은 112x40x16cm의 크기의 화강암으로 만들었다. 비석 전면 중앙에 ‘효자오인용지비(孝子吳仁傭之碑)’라 새기고 좌우에 ‘人於百行 惟孝爲先 攸盧墓側 泣血三年 誰能與儔 不專者革 謨伐石 銘玆千億’이라고 새겼다. 비석 뒷면에는 ‘○○○○年 十二月 松寒一同 代表 李鍾冕’ 이라고 새기고 있다. 일제 연호인 ‘昭和十 三’ 부분이 훼손되어 있다.

오인용은 1891년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중방리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제천군 송학면 송한2리 중말의 양지 마을 845번지에 이사하여 살았다. 본관은 흥양(興陽)이며 자는 우원(宇元)으로 1951년에 사망하였다. 7세에 부친상을 당하고 편모 하에서 성장하여 학문은 배우지 못하였으나 천성이 선량하고 효성이 지극하여 모친 생전에는 효를 다하였고, 별세하자 3년간 시묘하였다. 1951년 4월 61세로 별세하였다.
  후에 주천으로 가는 새로운 도로가 개통되어 보는 이가 적에 되자 1990년 10월에 사단법인 대한노인회 제원군지회의 송학면분회에서 대한노인회 제원군 지회의 후원과 제원군수의 건립비 지원을 받아 송학면 시곡리 심곡마을 [깊은골] 앞 도로변 동편에 새로운 비석을 세웠다.(시곡리 참조)

● 이경윤신도비(李憬胤神道碑)
  이경윤(1567~1608)의 자는 군소(君紹), 본관은 경주로 익제(益濟) 이제현(李齊賢)의 후손이다. 선조시대의 사람으로 죽은 후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주증되었다. 신도비는 파평 윤씨 효열문 입구에 위치하고 있으며, 묘는 건너편 산 능선에 있고, 비석 전면에 ‘증자헌대부이조판서겸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도총관(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總管)’이라 새겨져 있다.

● 절골사지
  송학면 송환2리 절골 마을에 들어서서 갈열산기도원으로 가는 길의 반대편인 북쪽으로 나 있는 소로길을 따라 올라가면 넓은 경작지가 있는데 이곳이 송한리 절골 사지이다. 이곳은 서에서 동으로 나지막하게 뻗은 능선의 동쪽 사면으로 서쪽으로는 작은 천ㄷ이 흐르고 있으며, 사찰 입구로 생각되는 사지 동쪽 끝자락에는 사찰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여지는 고목이 서 있다. 이 유적은 1999~2000년도 의림지 주변일대 지표조사에서 확인된 것으로 밭에서 조선시대 것으로 보여지는 기와편과 자기편, 옥기편 등이 다량으로 수습되어진다. 수습된 기와의 문양은 무문이거나 청해파문이며, 이와 함꼐 조성 후기의 토기조각이나 백자조각도 분포되어 있다. 한편 이 경작지 주인의 전언에 의하면 10여년 전에는 주초석 및 장대석으로 여겨지는 석재가 많았으나 경작을 위해 뽑아 내어 이동 또는 매립되었다고 한다.

● 파평 윤씨 효열문
  효열문은 제천시 송학면 송한리와 영월군 주천면 경계지점 못미쳐 송한리 마을 안쪽에 자리하고 있다. 이시진은 부모를 극진히 섬겨 효자로서 정려되었고, 그의 처 파평윤씨는 남편을 위한 지극한 내조와 시부모에 대한 극진한 효도로 효열을 겸한 열부로서 정려되니 이 부부는 관연 효열의 거울이 될 만하다 하겠다.
  이시진은 군수를 지낸 이대수의 아들로 제천에서 태어나 김장생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호는 충헌, 본관은 경주로 벼슬은 통덕랑이었는데 효성이 지극하여 12세 때에 부친이 병석에 누우니 연약한 소녀의 몸으로 애써 약을 구하고 지성으로 간호하여 병을 낫게 하였다. 또 모친의 병환 때는 추운 겨울철에 꿀을 구하여 고양하였으나 위독하게 되자 손가락을 끊어 피를 흘려 넣어 소생시키는 등 부모를 하늘과 같이 섬겨 효도를 다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때는 부모님을 모시고 제천시 금성면의 상악산에 피난하였는데 왜적이 쳐들어와 그 부친을 해치려 하니 앞을 가로막고 대신 상해되었다. 이러한 지극한 효성이 조종에 알려져 임금의 특명으로 정려되고 제천시 송학면 송한리에 효자 정려문이 세워졌다.
  이시진의 처 파평윤씨 또한 부사를 지낸 윤면의 딸로 부덕을 갖춘 현모양처의 표본이었다. 임진왜란 때에 친부모, 시부모와 함께 제천시 금성면 상악산으로 피난하였는데 왜적이 쳐들어와 그의 아버지 윤면을 살해하고 시아버지 이대수까지 해치려 하였으며, 그의 남편 이시진은 살해당했다. 윤씨는 쓰러진 남편을 끌어안고 왜적을 크게 꾸짖으며 바위에 머릴를 부딪고 유혈이 낭자하게 쓰러지니 왜적은 놀라 물러가고 가족들은 화를 면하였다고 한다.
  피난길에서 돌아온 윤씨는 남편을 따라 죽고자 7일간 식음을 전폐하니 그 시부모가 여러모로 타일렀으나 듣지 않았다. 시부모는 할 수 없이 같이 죽기로 단식을 하니 윤씨는 시부모를 죽게 할 수 없어 순사하지 못하고 말았다, 윤씨는 그 남편과 아버지의 죽음에 애통함을 억제하며 상례를 다하고 일편단심으로 절조를 지켜 처신 범절이 단정하였다. 뿐만 아니라 시부모를 효도와 지성으로 봉양하고 인덕으로 종족 친척을 대하니 그 감화가 커 고을에서 칭송이 자자 하였다.
  효종 7년(1656) 나이 83세로 세상을 떠나니 현종 6년(1665)에 효열각을 세워 후세에 길이 전하도록 하였다. 그 현판에 <통덕랑 월성 이시진 처 공인 파평윤씨 효열문(通德郞月城李時振 妻恭人坡平尹氏孝烈門)>이라 하였고, 임호 박수검(임호 박수검)이 정려비의 글을 지어 찬양하였다.

◎ 송한리 이야기

● 절골의 유래①
  송학면 송한리에는 절골이라는 마을이 있다. 옛날에 이곳에 절이 있었기 때문에 생겨난 이름이다. 이 절이 폐사된 연유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 몇가지 전한다.
  고려 고종 때 몽고가 우리나라에 대거 유입해 들어와 마침내 조정에서는 강화로 천도할 무렵이었다. 서울에서 난을 피하여 이곳에 내려와 절간에 머물렀던 아름다운 한 부인이 있었다. 부인은 낮이고 부처님 앞에 나가 불공을 드렸다. 절 근처에 살던 덞은 머슴이 아름다운 부인에게  혹하였다. 그래서 날마다 부인이 불공을 드리는 것을 밑에서 보면서 가슴에 끓는 연정을 달래곤 했다.
  어느 달 밝은 밤 부인은 불공을 마치고 휘영청 밝은 달에 이끌려 절 뒤편 산 길을 따라 산책하고 있었다. 연정을 가누지 못하던 머슴은 그날 밤도 멀찍이서 보고 있다가 소요하는 부인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더는 참을 수 없어 부인에게 달려들더니 숲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잠시 후 정신없이 절로 돌아온 부인은 자기가 기거하는 방에 들어가 조용히 자결하고 말았다. 그리고 부인이 기거하여온 방이 있던 자리에서 바위 하나가 솟아 나왔다. 부인의 한이 사무쳐 바위가 생겼다고 사람들은 믿었다. 그리고 그 바위는 부인의 화신이라고 믿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바위를 설통바위라 부르게 됐다.

● 절골의 유래②
  조선조 중기까지만 해도 절골에는 꾀 큰 절이 있었다. 절 이름은 ‘월명사’라 했는데 30여명의 승려들이 불도를 닦고 있었다. 언젠가 이 절에 아름다운 여인이 백일치성을 드리러 왔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공을 드리는 여인은 정혼한 사람이 과거에 장원급제하기를 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젊은 승려 하나가 아리따운 여인의 미모에 마음을 뺏겨 마침내 어느 날 밤 절 뒤편을 산책하는 여인을 범하고 말았다. 여인은 절에 돌아와 법당에서 자결하였다.
  이런 일이 있은 뒤에 절에는 난데없는 빈대가 꾀기 시작했다. 어떻게나 많은 빈대가 나오는지 승려들이 기거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잡아도 빈대는 늘기만 했다. 이렇게 되자 견디기가 어렵게 된 승려들은 하나 둘 절을 떠나게 되었고 상좌승만 남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뇌성병력과 폭우가 쏟아지더니 산사태를 일으켜 절을 몽땅 쓸어버리고 말았다. 사람들은 계율을 어긴 승려 때문에 부처님이 노하여 절을 없애 버렸다고 믿은 것이다.

◎ 황기 특산주 생산공장

농촌마을 종합개발사업의 목적으로 사업비 18억 원을 들여 2009년 신축하였다. 생산실, 숙성시르 발효실, 관리실 등을 갖춘 황기특산주 공장에서는 증류식 소주 3종류가 출시된다. ‘동해’란 상표로 출시되는 증류식 소주는 알코올 도수에 따라 23도는 ‘소주’. 30도는 ‘백주’, 43도는 ‘골드’로 명명됐다. 또 황기가 첨가된 포도주와 복분자주, 한방 막걸리, 쌀 맥주도 시판할 예정이다.
  기존의 술과 다른 점은 제천의 대표적인 특산물인 황기가 첨가되어 있는 기능성 술이다. 황기 술은 술을 마신 다음날 나타나는 불쾌감이나 두통이 덜 한 것이 특징이다. 앞으로는 쌀과 황기를 이용한 맥주를 대중에게 선보일 계획이다. 황기 술은 농민들이 단순히 농산물만 팔아서는 살아남기 어렵다는 자각에서 만들었다. 지역 특산물을 대중화된 상품을 통해 알려 더 많은 소비자를 확보하기 위해서이다. 농민들의 안정적인 판로 개척과 함께 지역 특산물을 알리는 이중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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