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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기행

제천문화원 마을기행 입니다.

제천의 역사와 전통을 알아 볼 수 있는 게시판 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제천의 지명과 행정구역의 변화 지역적 특성과 산물 등을 알려드립니다.

작성일 : 22-07-26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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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양읍] 삼거리[三巨里]
 글쓴이 : 문화원
(조회 : 3,367)  
9. 삼거리[三巨里]

삼거리는 본래 제천군 근좌면 지역이었다. 옛 청풍(淸風), 제천(堤川), 박달재로 가는 세 갈림길이 되므로 ‘세거리’ 또는 ‘삼거리’라고 하였다. 또한 마을에 사거리가 있는 도로가 없고, 모든 도로가 삼거리로 되어 있어서 ‘세거리’라 불렀다고도 한다.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답동리(沓洞里)와 송티리(松티里)를 병합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20년 9월에 봉양면에 편입되었으며, 1980년 제천시 승격에 따라 제원군 봉양면 삼거리가 되었다가 1991년 1월 1일 제천시 봉양면이 되었다. 1995년 1월 1일 시군통합과 동시에 봉양면이 읍으로 승격하며 제천시 봉양읍 삼거리가 되었다.
 삼거리에 200여 가구가 살았을 때는 초등학교가 있었고, 학생이 200여 명이 넘었다고 한다. 초등학교는 20여 년 전에 폐교되었다. 현재는 100여 가구가 살고 있다. 예전에는 먹고 살기 위한 농사를 주로 지었기 때문에 벼, 보리, 콩 농사를 많이 하였다. 1970년대까지는 화전도 많이 하였다. 현재는 벼농사와 고추농사를 주로 한다. 고추경작 면적은 약 88ha로, 두무실, 갈경지, 솔티, 논골에 경작 농가는 70여 호다. 삼거리는 지대가 높아 일교차가 크고 유기질을 많이 사용하여 과피가 두껍고 고춧가루가 많이 나며, 색과 맛이 좋다. 또한 청결양건고추 생산시설을 갖추어 주문생산도 하고 있다. 마을에서 인삼도 재배하기 시작하였으나, 마을 주민들이 직접 재배하는 것은 아니고, 외지 사람들이 땅을 임대하여 짓는다고 한다. 삼거리마을자랑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우리고장 三巨里(삼거리:세거리) 古代(고대) 部族社會(부족사회) 시대부터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三韓(삼한)시대를 거쳐 三國時代(삼국시대)에는 百濟(백제)의 영역에 속했다가, 高句麗(고구려) 영역으로, 다음에는 신라의 영역으로 되었으니 三巨里의 협 부락인 齊飛郞(제비랑)부락은 신라국의 花郞(화랑) “제비랑” 郞徒(랑도)를 이끌고 城門山(성문산)에 토성을 쌓고, 고구려와 대치한 유적이 남아있으며, 이로 인하여 학자이며 地師(지사)인 杜子美(두자미)가 泉南里(천남리)마을에 유배되어 와 있을 때 보은의 뜻으로 명당의 山(산)자리를 잡고 기뻐서 춤을 추었다고 하여 마을 이름이 되었다고 전해오고 있으며, 松峙(송치)마을은 낙낙장송이 울울창창하고 아늑하여 솔티마을이라 하였으며 임진왜란때는 왜군들이 松字를(송자) 두려워하여 침입하지 않았다고 전해오고 있고, 葛耕地(갈경지)마을에는 옛적에 葛氏(갈씨)가 마을을 처음 開拓(개척)하였다고 전하여 오고 畓洞(답동)마을은 비옥한 논밭이 좋고 풍만하여 인심이 순후하고 후덕한 마을이며 本洞(본동)인 세거리 마을로 총 여섯 곳의 자연부락으로 구성된 전형적인 산촌 마을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세거리 마을의 이름은 그네 조선시대에는 三街里(삼가리)마을이라 하여 山水(산수)가 아름답고 人心(인심)이 아름답고 마을의 터전이 좋다하여 三街里(삼가리)라 전해 왔는데, 구한말 행정 구역 개편 때 三巨里(삼거리)란 현재의 地名(지명)으로 바뀌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우리마을 三巨里는 순후한 인심이 충만하고, 義理(의리)를 존중하는 義(의)로운 마을이며, 상부상조의 아름답고 厚德(후덕)한 전통이 이어져 내려오는 고장으로서, 마을의 主山(주산)인 杜隱峯(두은봉)은 太白山(태백산)의 낙맥이 돌아내려 다시 솟아, 三巨里의 아름답고 웅장한 주산으로 온 마을을 감싸 안고 있으며 案山(안산)인 降仙坮(강선대)는 桂香山(계향산)의 주봉으로 수려하고 雄大(웅대)하여 龍馬(용마)가 비상 하는 듯 우리 마을을 포옹하고 있는 山村(산촌)으로서 인심 좋고 살기 좋은 마을이다.
 또한 우리 마을 서낭당(서낭당) 옆에 우람하게 서 있는 느티나무는 樹齡(수령)이 數百年(수백년)된 槐木(괴목)으로서, 보호수로 指定(지정)되어온 마을 住民(주민)들의 보호를 받고 있는 소중하고 자랑스러운 나무로서 우리 마을을 감싸주고 있다.


◎ 삼거리 지명유래

⦁갈경이 → 갈경지.
⦁갈경지[갈경이] : 세거리 동쪽에 있는 마을. 갈이 많았다고 함.
⦁논꼴[답동] : 세거리 서북쪽에 있는 마을. 논이 많았다고 함.
⦁답동(畓洞) → 논꼴.
⦁두모곡(豆毛谷) → 두무실.
⦁두모곡산(豆毛谷山) : 두모곡 위에 있는 산.

두모곡산(豆毛谷山)은 제천시 봉양읍 삼거리 두무실에 있는 산이다. 『신중동국여지승람』에 “두모곡산은 현 50리에 있다. 주유산(舟遊山)과 서로 대하였다.”라고 하였고, 『여지도서』에는 “두모곡산은 현에서 서쪽으로 15리에 있다. 또한 삼조산의 한 줄기이다.” 라고 하였다.

⦁두무곡(豆舞谷) → 두무실.
⦁두무실[두무곡,두목곡] : 갈경지 동북쪽에 있는 마을.
⦁성산(成山) → 성재.
⦁상안 → 제비골.
⦁성재[성산, 제비랑산] : 두무실 북쪽에 있는 산. 높이 502m. 산 위에 제비랑 성터가 있는데 옛날에 제비왕(齊非王)이 성을 쌓고 피란을 하였다고 함.


제비랑산(제비랑산)은 『신중동국여지승람』에 “현 서쪽 15리에 있다.”라고 하였고, 『여지도서』에는 “현에서 서쪽으로 15리에 있으며, 삼조산의 한 줄기이다.”라고 하였다.


⦁세거리 → 삼거리.
⦁솔티[송티] : 솔티 아래에 있는 마을.
⦁솔티[송티] : 세거리 남쪽에서 금성면 사곡리로 가는 고개. 소나무가 많았다고 함.
⦁송티(松侍) → 솔티
⦁송티(松侍) → 솔티
⦁제비골[성안, 제비랑이] : 제비랑이 안쪽에 있는 골짜기.
⦁제비랑(齊非郞) : 제비랑이.
⦁제비랑산 → 성재.
⦁제비랑 성터(齊非郞城-) : 성재에 있는 옛 제비랑 성의 터.
⦁제비랑이(齊非郞-)[제비랑, 제비래이] : 제비골 아래에 있는 마을.
⦁제비랑이(齊非郞-) → 제비골.
⦁제비래이 → 제비랑이.

◎ 삼거리 문화유산

 ⦁제비랑산성(齊非郞山城)
 제비랑산성은 봉양읍 삼거리 두무실 제비랑산 위에 있는 석성터로서 인근에서는 상고시대 제비왕(齊非王)이 성을 쌓고 그 주민과 함께 피난했다고 한다. 현재 성벽의 윤곽이 확실히 남아있지 않으나, 석축이 묻히고 무너진 흔적이 잔존한다. 아직 정확한 학술조사가 실시되지 않아 처음 축조한 시기와 성격을 잘 알 수 없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여지도서』 등의 산천편에서 제비랑산에 대한 설명은 있지만, 산성에 대한 언급은 없다. 『대동지지』와 『증보문헌비고』에는 서쪽 15리에 제비랑산 고성이 있다고 하였다. 19세기 말에는 이미 무너져서 고성으로 취급되었으며, 그 규모와 제원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조선여지승람』 제천군 산천편에서는 산 이름을 성묵산(城墨山)이라 하고 민간에 전설로 내려온 내용으로 “옛 제비왕이 여기에 성을 쌓고 난리를 피하였는데 그 터가 아직 남아있다.”고 하였다. 여기의 제비왕은 중국 제(齊)나라인지 그냥 제비왕 인지 알 수 없다.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는 “근좌면(近左面) 삼거리 제비랑산성···제비랑산고성이라 칭함. 천험을 이용하여 일부 석축의 붕괴된 흔적이라 생각되는 굴러내린 돌이 있음”이라 하였고, 『전국유물목록』에는 이를 그대로 전재하였다. 『문화유적총람』에는 제비랑산에 있는 석성지로 제비랑이 축성했다는 설을 전하고 있다.

⦁두무실 할머니 서낭당
 두무실 할머니 서낭당은 마을 한 복판에 위치해 있다. 할아버지 서낭당과 마찬가지로 당집은 없으며, 아카시아나무가 서낭목이다. 할아버지 서낭당에서의 당고사가 끝난 후에 할머니 서낭당에서 당고사를 지낸다. 제의의 전반적인 절차 및 제물은 할아버지 서낭당에서의 당고사와 동일하다.

⦁두무실 할아버지 서낭당
 두무실 할아버지 서낭당은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 왼편에 위치한다. 당집은 없으며, 느티나무가 서낭목으로 금줄을 둘러놓았다. 상여가 나갈 때도 서낭당 앞을 지날 수 없어 그 아래에 있는 도랑으로 다닌다고 한다. 당고사는 매년 음력 정월 5일에 지낸다. 제관 및 축관은 생기를 봐서 선정하며, 제물로는 돼지머리⦁백설기 한 시루⦁뫼⦁탕⦁대추⦁밤⦁곶감 등을 진설한다. 제의의 진행은 초헌 - 아헌 - 종헌 - 소지 - 음복의 순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축문은 읽지 않는다.

⦁삼거리 보호수
 삼거리 보호수는 제천시 보호수 2호로 느티나무이다. 제천시 봉양읍 삼거리 613번지 개인 사유지에 위치해 있다. 나무의 높이는 15m이며, 둘레는 1.3m이다. 수령은 300년 정도로 추정된다. 북쪽을 막아야 마을이 잘 된다고 하여 관리자의 몇 대조 할아버지가 느티나무 두 그루를 지금의 위치에 심었는데, 그 중 한 그루만 남아 있는 것이다. 현재는 마을의 서낭목 역할을 하고 있다. 삼거리 서낭당은 제천시 보호수로 지정된 느티나무 옆에 위치하고 있다. 20여 년 전에 중수를 하였으며, 기와지붕에 블록으로 벽을 쌓았고, 문은 철로 되어 있다. 서낭당 내부에는 ‘성황지신(城隍之神)’이라고 쓰여진 위패가 있다. 삼거리 서낭당에서의 당고사는 매년 음력 정월 4일에 지낸다. 제관 및 축관, 고양주를 각각 1명씩 선정한다. 제물은 마을 기금으로 장만하며, 제물로는 백설기 한 시루⦁뫼⦁탕⦁포⦁밤⦁대추⦁곶감⦁산적 등을 진설한다. 제의의 진행은 초헌 - 독축 - 아헌 - 종헌 - 소지 - 음복의 순으로 이루어진다.

⦁솔티 서낭당
 솔티 서낭당은 마을로 들어서는 입구 오른편에 위치한다. 솔티로 들어서는 입구에는 길 양옆으로 느티나무 숲이 조성되어 있는데, 서낭숲으로 위했던 것 같다. 솔티 서낭당은 슬레이트 지붕에 시멘트로 벽을 만들었다. 솔티 서낭당에서의 당고사는 매년 음력 정월 5일날 7시에 지낸다. 제물로는 백설기 한 시루⦁탕⦁포⦁대추⦁곶감 등을 진설한다. 제의의 진행은 초헌 - 아헌 - 종헌 - 소지 - 음복의 순으로 이루어지며, 현재 축문은 읽지 않는다.

◎ 삼거리 이야기

⦁두무실의 유래
 봉양읍 삼거리에는 예전에 두무실(杜舞실)이라는 마을이 있다. 연대를 소상히 알 수 없는 그런 옛날에 중국으로부터 두씨(杜氏) 성을 가진 사람이 유배되어 제천에 있는 남천리에 오게 되었다. 여기 살고 있던 이씨(李氏)집에 의탁하여 살게 되었다. 이씨 집안에서는 수만리 머나먼 곳까지 흘러온 두씨를 불쌍히 여겨 극진히 대해 주었다. 두씨도 이씨 일가의 친절이 고마웠다. 무슨 일이건 이씨 집안을 위해 보답해 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두씨는 재물이나 보화를 가진 것이 없으므로 명당 묘자리를 골라 이씨의 후손이 융성하게 해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는 두루 산천(山川)을 찾아보기로 하였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던 두씨는 봉양 삼거리의 두무실에 이르러 참으로 훌륭한 명당을 발견하였다. 고생하고 다니다 명당을 찾아낸 두씨는 기뻐서 둥실둥실 춤을 추며 좋아하였다. 두씨는 이씨에게 명당자리를 알려주었다. 이씨 문중에서는 이곳에 묘를 썼다는 것이다. 두씨가 춤을 추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곳을 ‘두무곡’ 또는 ‘두무실’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곳에 현재 이씨의 묘가 있는데, 그 묘가 뚜시가 잡아 준 자리에 쓴 묘라고 하는 사람도 이고, 혹은 그렇지 않다는 사람도 있으나, 그 자리가 일대에서는 뛰어난 명당자리인 것은 틀림없다는 것이다.

◎ 삼거리 민속놀이 - 풍물

 일제강점기 이전인 1910년대까지 백중날 제천 시내 한복판에서 ‘기줄다리기’가 있었다. 중앙로를 기점으로 동과 서 양편으로 나누어 줄을 당기고, 그 중 제일 힘이 좋은 사람을 대장으로 삼기도 하였다. 삼거리 사람 중에서도 동편 대장을 한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기줄다리기가 있는 날이면, 술과 풍물이 어우러지는 놀이 한마당이 펼쳐졌는데, 이 때 삼거리 풍물도 참여를 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풍물을 거의 놀 수 없었으며, 풍물을 놀 때는 주로 음력 정월과 팔월 달이었다. 음력 정월에는 집집마다 다니면서 걸립을 해가며, 지신밟기를 하였다고 한다. 지신을 밟아주는 대가로 집집마다 쌀과 돈을 내놓기도 하였다. 걷힌 돈을 가지고서는 악기를 새로 사거나, 마을 기금으로 사용하였다.

◎ 삼거리 역사인물

⦁이덕초(1803-1885)
 자는 용겸(用謙), 호는 국포(菊圃), 충민공 이도철의 부친으로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파락호 시절 많은 재정적 후원을 하였으며, 음사로 진잠현감, 금구현감, 보성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가는 곳마다 선정을 베풀어 선정비가 세워졌다. 관직 통정대부 돈령부 도정에 이르렀다. 후손가에는 대원군과 이덕초 사이에 오고 간 서찰이 많이 보관되어 있다.

⦁이도철(李道徹, 1852-1895)
 자는 성관(聖寬), 호는 두남(斗南), 본관은 전주, 제천 천남 출신. 행장에는 1853년생으로 기록되어 있다. 제천향교 교장을 역임하였으며, 1893년 음서로 의금부도사에 임명되었다. 1895년 관직이 참령으로 훈련 3대대 대대장에 이르렀다. 1895년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 의해 화를 당하자 10월 11일 창의하여 복수하고자 하였으나 모의가 사전에 누설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체포되었다.(춘생문의거) 여러 차례 모진 형벌을 가하였으나 끝내 굴하지 않고 11월 15일 교수형을 받고 순국하였다. 1896년 신원되고 정이품 군부협판(軍部協辦)에 중직되었다. 시호는 충민(忠愍). 묘소는 봉양읍 삼거리에 있다. 제천문화원에서는 지난 2006년 제천출신 충민공 이도철 연구의 일환으로 심층적인 연구서인 논문집 『이도철과 춘생문의거』를 발간한 바 있다.

⦁이정희(李廷熙, 1712-1759)
 호는 화숙(和叔), 조선 선조의 9남 경창군(慶昌君)의 5세손으로 천남(즌암)이씨의 입향 시조이다. 한말 춘생문 의거의 주역인 충민공(忠愍公) 이도철(李道徹)의 4대조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으며 삼거리 두무실에 묘가 있다. 이정희 묘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이정희가 제천에서 운명하자 서울의 왕족은 중국의 유명한 지관을 불러 몇 달에 걸쳐 좋은 묘자리를 찾아 다녔다. 지금의 봉양역 장평리에서 현 두무동까지 천하대지가 여기 있는데 여러 날을 고생만 하였구나 하면서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지금의 두무동 큰 산소 자리를 잡았다. 하관을 하는데 지관이 상주에게 후손들이 큰 벼슬을 하게 해주랴? 아니면 큰 부자가 되게 해주랴? 물으니 혼돈된 정치에 휘말리지 않으려 제천까지 낙향한 부친의 유지를 받들어 밥술이나 먹게 해달라고 하였더니, 좌향을 잡고 후대 어느 자손이든 계속 친석은 할 것이라 예언하였다. 정희 묘소 일대를 왕명으로 이씨가(李氏家)의 땅으로 선포, 현 삼거리(三巨里) 두무곡(杜舞谷) 일대를 종중(宗中) 땅으로 소유하였다. 두무는 중국 지관이 성이 두씨이고, 이 지관이 명당 자리라 춤을 추었다 해서 춤출 舞자를 써서 두무곡, 두무실이라 불려지게 되었다 한다.

 봉양읍 구곡리⦁마곡리⦁삼거리 일대에서 전승했던 파대의 발굴은 2005년과 2006년에 이루어졌다. 2005년 제천시노인복지관에서 있었던 노인의 날 ‘노인솜씨자랑’에 구곡리에 거주하는 임대순(남⦁70세)씨가 만든 파대를, 구곡리 노인회장인 이명호(남⦁77세)씨가 출품하였다. 당시 제천시노인복지관을 찾은 김상기(전 세명대학교 관광경영학과 겸임교수)씨가 확인하여 파대가 40여년 만에 발굴되었으며, 이를 토대로 민속놀이로 재현하였다. 파대놀이는 파대를 가지고 새를 쫓는 민속을 놀이로 재현한 것이다.
 2006년에는 제13회 충북민속예술축제에서 참가하기 위해 주로 파대 제작과 파대 소리를 크게 내는 데 주력하였다. 소리를 크게 내게 하기 위해 물과 회칠을 하였으며, 이 과정을 파대놀이 마당에 ‘축이기’와 ‘분칠하기’로 포함시켰다. 실제로 파대 소리를 크게 내게 하기 위해서물을 묻혀서 파대를 쳤었다고 한다. 또한 파대 끝부분, 곧 파대를 칠 대 소리를 내게 하는 부분을 머리카락, 말총, 닥나무 껍질, 삼 껍질, 나일론 끈 등 다양한 재료들을 사용하여 제작해 보내기도 하였다.
 2006년 제13회 충북민속예술축제에 참여한 파대놀이는 입장 → 파대 제작 → 축이기 → 고르기 → 분칠하기 → 파대치기 → 뒷풀이 → 퇴장 순으로 구성하였다. 또한 이를 계기로 제천지역의 축제인 제1회 청풍호반벚꽃축제, 2007 의림지겨울페스티벌 등에서 축제항목으로 재현하였으며, 2007년 9월 11일에는 서울 충정로에 위치한 농업박물관 앞에 조성된 논에서 ‘파대놀이 재현행사’를 열어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도 하였다. 한편, 2007년 제14회 충북민속예술축제에 참가하는 봉양파대놀이 시나리오의 경우, 2006년의 기본 틀을 유지하면서 왜곡된 부분의 삭제와 마을 주민들의 제보를 통해 조사된 내용을 포함시켜 새롭게 재구성 하였다.

◎ 파대(破帶) 유래와 제작

⦁파대 유래
 파대(破帶)는 가을철 논밭의 새를 쫓기 위한 매끼를 뜻하는 용어다. 한자를 그대로 해석하면 ‘풀어 떨어지게 하는 띠’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파대는 짚을 꼬아 만든 줄 끝에 삼이나, 말총, 짐승 가죽 따위를 매어 만드는데, 이것을 둘러서 치면 그 끝이 휘감기게 되어 총소리와 같은 소리가 난다. 파대를 언제부터 만들어 사용하였는가는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없으나, 전국적인 분포를 보이고 있으며, 특히 충청북도를 비롯하여 강원도, 경상북도 등 태백산맥에 근접해 있는 지역에서 많이 보인다.
 제천지역의 경우 ‘파대’라고 불리기보다는 ‘태기’라고 많이 불렀으며, 파대를 치는 행위를 ‘태기치기’나 ‘태기친다’라고 한다. 여기서 ‘태기’는 어떤 일이나 물건을 거칠게 내던지는 행위인 ‘패대기치다’에서 왔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제천시 지역에서 파대는 1940년대에서 1960년대까지 사용하다가 그 이후에는 사용하지 않았다. 봉양읍 구곡리⦁마곡리⦁삼거리 일대에 거주하는 60세 이상 되신 분들만 직접 파대치기를 해 보았거나, 보아서 기억하고 있다.
 봉양읍 구곡리⦁마곡리⦁삼거리 일대는 제천지역의 전형적인 산촌마을로 1970년대까지 화전을 많이 하였다. 특히 화전에 조[서숙]을 많이 심었는데, 가을철이 되면 참새 떼가 많이 날아오고, 산짐승들이 밭으로 내려왔다. 매번 밭으로 가서 직접 새와 산짐승을 쫓기도 하였지만, 일반적으로 화전이 거주하는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매번 가기가 어려웠다. 그럴 때 밭이 보이는 곳에 서서 또는 마당가에 서서 새를 쫓기 위해 파대를 제작하여 사용하였다.

⦁파대 제작
 파대는 주로 가을철, 양력 7월 말에서 8월 말까지 제작하여 사용하였다. 이때가 곡식들이 여물 시기이므로 ‘새’나 ‘산짐승’ 등이 몰려들기 때문이다. 파대는 공동으로 제작해서 사용한 것은 아니었다.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논이나 밭에서 사용한 파대를 개인적으로 제작하였다. 낮에는 농사일이 바쁘기 때문에 파대를 제작하기 어려워, 해가 저문 저녁에 주로 제작하였다. 파대가 자주 끊어지기 때문에, 그 다음날 사용할 파대를 전날 저녁이나 밤에 미리 제작하였다. 파대를 제작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어떻게 만드느냐에 따라 달라지는데, 약 1시간에서 2시간 정도 쇼용된다.
 파대를 제작하는 데 필요한 주재료는 마른 짚, 닥나무 껍데기, 싸리나무 껍데기, 칡 껍데기, 대나무 껍데기, 뱀장어 껍데기, 짐승 가죽, 말총, 머리카락 등이다. 파대는 손으로 잡는 부분이 가장 굵고, 앞으로 나아갈수록 점점 가늘어진다. 손으로 잡는 부분부터 짚과 닥나무 껍데기를 섞어서 만들고, 맨 앞부분 곧 소리를 내는 부분은 삼 껍데기를 주로 이용하였다. 간혹, 싸리나무 껍데기, 칡 껍데기, 뱀장어 껍데기, 대나무 껍데기, 짐승 가죽, 말총, 머리카락 등과 섞어서 제작하기도 하였다. 짚과 닥나무, 삼 껍데기 등만 이용하여 파대를 제작하면, 몇 번 치지 못하고 그냥 끊어지는 단점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현재 제작하는 파대의 경우 나일론 끈을 섞어서 제작한다. 나일론 끈을 섞어서 파대를 칠 경우, 잘 끊어지지 않는다.
 예전에 제작했던 파대와 현재 제작하는 파대의 모양은 크게 다르지가 않다. 파대의 길이는 3m-4.5m 정도이며, 손잡이 있는 부분은 둘레가 10cm-15cm 정도이다. 파대의 규격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고, 파대를 치는 사람의 신체 구조에 맞게 제작하였다. 다만 파대가 무거울수록 힘은 들지만, 소리는 더 크게 난다. 2006년부터 발굴하여 제작하는 파대는 소리를 내는 앞부분이 끊어지면 갈아 끼울 수 있도록, 앞부분에 고리를 만들어 사용한다.

⦁파대치는 방법
 파대는 새나 산짐승 등을 쫓는 데 사용하였다. 새가 조를 심은 밭이나 여문 곡식밭에 몰려들면 밭 가장자리나, 집 마당에 나가 파대를 쳤다. 아침 일찍부터 파대를 쳤다. 옥수수를 심은 밭에 산돼지가 내려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도 마대를 쳤다. 오른손잡이의 경우,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한 바퀴에서 네 바퀴 정도 돌리다가 파대가 탄력을 받았을 경우, 파대가 머리 앞으로 왔을 때 오른쪽 아래로 순간적으로 내려친다. 이 때 너무 아래로 내려치거나, 땅을 쳐서는 소리가 나지 않고, 어깨 선 정도에서 허공을 내려쳐야 소리가 잘 난다. 또한 파대를 짧게 제작하였을 경우에는, 머리 위로 파대를 끌어 올려 위에서 아래로 한 번에 내려치기도 하였다.
 파대치기는 주로 성인들이 많이 하였다.(어느 정도 팔 힘이 있어야 칠 수 있음) 성인들이 사용하는 파대는 15세 이상 되어야 칠 수 있으며, 15세 이하의 어린 아이들은 파대를 작게 제작하여 놀이 삼아 쳤다. 아이들이 성인들의 파대치기를 보고, 작게 만들어서 사용하였다. 아이들 놀이로서의 파대치기에서는 소리를 크게 나느냐, 작게 나느냐를 가지고 겨루기도 하였다. 성인들이 일이 바쁠 때에는 청소년기에 있는 아이들이 파대를 치기도 하였다.

◎ 파대놀이의 특성과 활용

 ⦁세시풍속 관련 성격
 파대놀이는 주로 가을철에 많이 놀았다. 둥글게 원을 그리면서 파대를 치는 자체는 기량도 뽐내고 서로 협력하여 동시에 내는 소리로 흥미로운 것이다. 백중놀이처럼 농사꾼의 흥청거림이 있다. 풍물을 치고 파대를 힘껏 치는 행위가 남성들의 힘을 뿜내는 놀이판의 벌림이 있다. 칠석에는 대전지역 부사칠석놀이처럼 풍장을 치며 풍요를 기원하는 의례형의 놀이가 남아 있다. 파대놀이도 이런 흔적이 보인다. 농사꾼들이 농약에 맞춰 신명나게 파대를 치고 한바탕 잘 놀면 풍년이 든다는 것이다. 잡 것을 물리치고 농신을 위한다는 칠석 세시성이 남아 있다.

⦁농경의례 관련 성격
 파대는 백두대간 산간 화전마을을 중심으로 호환(虎患) 피해를 막기 위해 사용된 도구였다. 점차 김장밭이나 논에서 새를 쫓는 데에도 사용되었다. 사냥 자체가 마을 사람들을 표현한 생령(生靈)을 보존하기 위해 존재하였다. 유희적이면서 군례로 의례화한 측면도 이에 연유한다. 조선시대 답렵(踏獵)과 타위(打圍)등이 그것이다. 파대는 나쁜 것을 쫓을 때 치는 사용되었던 도구였다. 곡식이나 김장 씨앗을 해치는 새나 짐승을 쫓을 때 치는 생업도구였다. 그러다가 농사 풍년 기원의 의례나 놀이에도 사용하게 되었다. 실제로 새를 쫓아내고 소원하는 생업활동이 원할히 이루어지는 자체가 농부들의 희망사항이다. 기세배처럼 협동기원성이 남아 있다.

⦁대동놀이 성격
 봉양읍 구곡리⦁마곡리⦁삼거리 사람들은 파대놀이를 시작하고 나서 최근 멧돼지나 고라니의 농작물 피해가 없어졌다고 한다. 파대는 생업활동의 실용성도 있다. 마을 사람들의 파대치기 자체가 대중놀이면서 협력하여 마을 피해를 줄이는 공동체 행위인 것이다.
 편싸움이나 횃불싸움 등과 같이 구체적으로 겨루기 요소가 강화되어 있지는 않지만, 소리를 잘 내고 동작을 멋지게 내는 편의 이기는 경합성이 내재되어 있다. 빠르게 움직이며 치기, 좌우로 돌며 순간적 치기, 앉았다 일어나며 치기, 짝 맞춰치기 등 다양하게 연행될 수 있다.

⦁파대놀이의 특성과 활용
 파대놀이는 민속놀이 중 농경문화와 관련된 산간내륙의 독특한 새쫓기 관련 민속연희다. 나쁜 것을 물리치는 벽사의 기능이 있다. 강원도 남서부, 충청북도 북부지역, 경상북도 북부지역 등 두루 전승되었던 새쫓는 계열의 놀이다. 2006년 제천시에서 발굴하여 충청북도 민속예술축제에 선보여 마을민속예술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파대놀이는 그 자체가 스포츠이기도 하다. 경합적 요소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놀이꾼들 사이에 누가 소리를 크게 힘차게 내는가, 서로 협력하여 멋진 소리를 만들어 내는 가 퍽 흥미 있는 스포츠 요소다. 체려단련을 도모하고 멧돼지 같은 짐승을 쫓을 수 있으니 공동체 관심 사항이다. 잘 치기 위해 연마와 숙련이 필요하다. 파대를 잘 만드는 기술도 민속예능이다. 줄의 재료를 모으고 질긴 파대를 제작하는 것도 기예가 요구된다.
 파대놀이의 활용가치는 크다, 우선 운동장에서 역동적인 게임경연성을 보여주고 있다. 농악과 어울려 매우 활달한 경기용 스포츠로 키울 수 있다. 파대 자체도 다양하게 개발할 수 있다. 의병놀이, 사냥놀이 등에 총포 대신에 사용할 수 있다. 전통사회 산간지역 화전촌에서 호랑이, 늑대 등 맹수 퇴치 등에 사용했는데 이에 대한 고증이 필요하다.
 파대놀이는 제천지역 전승문화의 또 다른 형태를 보여주는 것이다. 파대놀이를 활용하여 제천의병제 등 지역축제 때 의병놀이와 거리축제를 비로한 축제항목에 활용할 수 있다. 대동놀이에 다양하게 사용할 수 있다. 파대놀이의 소규모 공연용도 더욱 확대할 필요가 있다. 파대 자체의 문화상품화도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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