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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기행

제천문화원 마을기행 입니다.

제천의 역사와 전통을 알아 볼 수 있는 게시판 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제천의 지명과 행정구역의 변화 지역적 특성과 산물 등을 알려드립니다.

작성일 : 22-07-26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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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양읍] 원박리[院朴里]
 글쓴이 : 문화원
(조회 : 3,211)  
12.원박리[院朴里]


 원박리는 본래 제천군 근좌면 지역으로서, 박달현(朴達峴)의 이름을 따서 ‘원박(院朴)’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삼성동(三省洞)을 병합하여 1920년 9월 봉양면에 편입되었다. 1980년 4월 1일 제천시 승격으로 인하여 제원군 봉양면 원박리가 되었다가 1991년 1월 1일 제천시 봉양면이 되었다. 1995년 1월 1일 시군통합과 동시에 봉양면이 읍으로 승격하며 제천시 봉양읍 원박리(院朴里)가 되었다.
 제천시 봉양읍 원박리는 현재 80여 가구가 살고 있는 마을이다. 마을의 주된 성씨는 허씨와 밀양 박씨다. 섶밭 서북쪽 백운면과의 경계에 있는 높은 고개인 박달재(457m)가 유명하다. 박달재는 고려 때인 1217년(고종 4) 7월에 김취려(金就礪) 장군이 거란병을 크게 물리친 곳이며, 그 밑에는 공전사(公田寺)와 원집인 박달원이 있었다. 주로 농사를 짓는데 논농사, 밭농사, 약초 등으로 생계활동을 하고 있다. 특산물로는 오이, 수박, 사과, 고추, 느타리버섯이 있다.

◎ 원박리 지명유래

 · 고암(鼓岩) → 북바우.
 · 고암사(鼓岩寺) : 안골에 있는 절. 고암 밑이 됨.
 · 덕고개1[덕현] : 덕고개 밑에 있는 마을.
 · 덕고개2[덕현] : 승지골에 있는 고개.
 · 덕현(德峴)1 → 덕고개.
 · 덕현(德峴)2 → 덕고개.
 · 박달령(朴達嶺) → 박달재.
 · 박달재[박달령](朴達峴) : 섶밭 백운면과의 경계에 있는 높은 고개. 천등산(天登山) 박달재라고도 하며, 조선시대에는 천등산과 지등산이 연이은 마루라는 뜻에서 이등령으로 불리기도 했다. 해발 453m, 길이 500m. 예로부터 제천에서 서울에 이르는 관행길이 나있었으나, 첩첩산중으로 크고 작은 연봉이 4면을 에워싸고 있어 험준한 계곡을 이룬다. 1217년(고종 4) 7월 거란군이 10만 대군으로 침공해왔을 때 김취려(金就礪) 장군이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전공을 세운 전승지로 유명하다. 또한 인근의 지등산 · 인등산과 함께 천(天) · 지(地) · 인(人)을 모두 갖춘 신령스런 곳으로, 단군이 하늘에 제사 지내던 성소로 알려져 있다. 산에는 잣나무 · 전나무 · 향나무 · 육송 등의 상록수가 울창하며, 밑에는 공전사(公田寺)와 원집 박달원이 있었다.
 · 박달재터널[박달령터널, 박달현터널] : 봉양과 백운을 연결하는 38번 국도상의 박달재터널. 1960m.
 · 박달원터(朴達院-) : 박달재에 있는 터. 조선시대 원집 박달원이 있었음.
 · 박달현(朴達峴) → 박달재.
 · 북바우[고암] : 섶밭 뒤에 있는 바위.
 · 삼성골[삼성동] : 원박 남쪽에 있는 마을. 승지골 밑이 됨.
 · 삼성동(參星洞) → 삼성골.
 · 섶밭[섶밭듸, 신전, 신전도] : 원박 서쪽에 있는 마을. 섶나무가 많았음.
 · 섶밭듸 → 섶밭.
 · 승지골 : 삼성동 너머에 있는 골짜기. 승지가 날 명당이 있다고 함.
 · 신전(薪田) → 섶밭.
 · 신전도(薪田道) → 섶밭.
 · 안골 : 섶밭 안쪽에 있는 골짜기.
 · 원덕골 : 박달원 터 위에 있는 골짜기.
 · 원원박(元院朴) : 원박리의 원 마을.
 · 이용태 · 이용준 형제 추모비.
 · 장구머기1[장구목] : 장구머기 밑에 있는 마을.
 · 장구머기2[장구목] : 섶밭에서 안골로 가는 고개. 지형이 장구처럼 잘록함.
 · 장구목1 → 장구머기.
 · 장구목2 → 장구머기.
 · 큰골 : 박달재 동쪽에 있는 큰 골짜기.

◎ 원박리 문화유산

 · 경모재(敬慕齋)
 고령박씨 재실을 2채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앞에 있는 건물은 단층으로 전면 5칸, 측면 3칸 겹처마의 팔작 기와지붕으로 단장하였으며 현판은 없다. 뒤에 있는 건물에는 들어가는 문에 ‘효화문(孝化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재실로 보이는 목조 2층 건물은 1층 위에 난간을 둘렀고, 전면 5칸, 측면 2칸의 겹치마 팔작 기와지붕으로 푸른색으로 단장하였다. 2층 중앙에 ‘경모재(敬慕齋)’라 쓴 현판이 걸려 있는데 현판 좌측에 갑술(甲戌) 박홍구(朴泓九)라는 글자가 있어 1994년에 건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재실 우측에 있는 ‘망향의 변’이라는 비석에 따르면 재실건축을 주관하였으며 비문과 현판을 쓴 사람은 당시 성균관 부관장 고령박씨 대종회장이던 12세손 박홍구라고 기록되어 있고 1994년에 세웠다. 현재 이 재실을 관리하는 자손은 대전에 살고 있고, 1년에 한번 쯤 명절에 이 경모재에 와서 제사를 드린다고 한다. 경모재비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망향의 변

 이곳은 제천 박달령 하원박리 신전부락!
 시조 박혁거세로부터 29세 신라경명왕제이자 고양대군 휘연성 이지 36세, 중시조 휘한(부창정) 이지 44세, 파지 휘만(수정공 예조판서) 이지 51세, 가헌(막재현 박공수동신좌원) 52세, 휘공 53세 제천파조 휘연익(원종 이등공신 덕천군수) 이지 61세, 나의 선천에 이르기까지 누대 조상의 맥박이 스미고 숨결이 담긴 꿈에도 잊지 못할 영원한 안식처 나의 고향이다.
 을유 8.15 해방은 혈통의 생활근거지로 풍토권을 형성하던 세천지지를 떠나 생업에 따라 혹은 직장에 따라 사방팔력으로 이산거주하게 이르렀다. 또 한 산업사회 발달은 도덕적 부패로 우리 사회를 약화시키고 있으며 우리의 목적과 가치관을 병들게 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 고유의 미풍양속은 차츰 사라져가는 흐름 속에서 우리의 가치관은 물질과 현실만을 추구하는 가치관으로 일대변혁을 겪고 있다. (중략)
 우리의 노력은 변하는 중에서도 불변의 강상회복하고 시간과 더불어 맹목적으로 흘러가는 인류사의 전도를 바로잡고 개인의 행복이 사회적 가치와 일치하는 보다 인간적이고 도덕적인 이상세계를 건설해야 할 것이다. 이에 우리는 도덕적 임무를 수행해야 할 특수한 요청을 받고 있으니 여기에 우리가 분발해야 할 목적과 사명이 있다. 이제 우리는 도덕적 가치를 높이 들고 인류와 동포를 향해 버려진 곳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강력히 호소한다.
 조상의 영혼이 숨 쉬는 이 땅! 원박, 현박 풍요한 자연 속에서 고령인의 혈맥은 뛰었고 영고 성쇠! 이 훌륭한 유산 속에서 우리는 떠나는 농촌에서 돌아오는 농촌을 만들어야 할 시대적 사명과 사회적 소명을 지니고 있다.
 이제 우리는 위대한 조상의 업적과 이념을 우리의 것으로 정리하여 물질문명에 치우침 없이 경로효친정신의 배양과 전통문화진흥으로 과거와 현재 미래에 어울려 사는 빛나는 고향!
 돌아오는 농촌으로 만드는 것이 우리는 기성시대에게 주어진 명예로운 사명이요 변할 수 없는 숙명으로 생각하면서....

1994년 갑술 국추
성균관 부관장 고령박씨 대종회장 62세손 홍구 근립.
가 훈
가전충효 세수돈목
만사종관 애경애족
개성은 강하게 표현은 부드럽게



 · 박달재 서낭당
 서낭당 입구에는 ‘박달도령’과 ‘금봉낭자’라고 쓰여진 장승이 서있으며, 팔작지붕형태로 서낭당 내부에는 ‘박달성황지신’이라고 쓰여진 위패가 모셔져 있다. 서낭당 왼편에는 박달나무가 있으며, 오른편에는 돌탑이 쌓여져 있다. 박달재 서낭당에는 무속인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박달재 서낭당은 금봉이가 박달도령의 장원급제를 위하여 빌던 곳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제천시에서 박달재 명소화 사업의 일환으로 1997년에 서낭당을 짓고 그 혼을 기리고 있다. 원박리 박달재에서의 당고사는 3월 초와 10월에 걸쳐 두 번 지낸다.

 · 박달현 전적지(朴達峴 戰績地)
 박달현 전적지는 봉양읍과 백운면의 경계에 위치한다. 충주와 제천을 잇는 옛길로서 박달현 정상(해발 453m)에는 약 700평 정도의 휴게소가 만들어져 있다. 도로변에는 화강암의 거대한 자연 비석을 세우고 <박달재>라 일면에 새기고 일면에는 <박달재비>라 제(題)하고 고려 김취려(金就礪) 장군의 전공기(戰功記)를 새기고 있다.(1980. 11 세움) 동서로 차령산맥의 줄기에는 박달산을 위시하여 백운산, 구학산 등 수많은 영봉들이 솟아 계곡 분지를 이루어 경승은 장관인데 오직 박달재만이 남으로 통하는 관문으로 교통의 요지가 되고 있다.
 박달재는 역사 어린 전승지로서 고려 고종 3년(1216)에 내침한 거란군은 이듬해 7월 거란의 장수 질명(質明)이 10만 대군으로 박달산을 침공함에 고려의 김취려 장군은 고개위를 먼저 점 령하고, 좌우 양익에 포진하여 적을 협공으로 섬멸하였다. 또한 고종 45년(1258) 몽고군의 침입 때는 충주, 제천, 청풍의 별초군이 박달재에서 복병전으로 적을 격파한 유서 깊은 옛 전적지이다. 박달재 터널이 개통된 이후 차량 소통이 적어진 박달재를 새로운 관광 명소로 만들기 위하여 백운면 쪽에 박달재 관문을 세우고, 잿마루에는 박달재 전설의 주인공인 박달도령과 금봉낭자의 동상을 세웠으며, 아울러 사낭당과 장승 등이 세워져 옛 정취를 보여주고 있다.

◎ 원박리 이야기

⦁박달재의 유래
제천시 봉양읍과 백운면을 갈라놓은 험한 고개가 박달재이다. 조선조 중엽 경상도의 선비 박달(박달)은 과거를 보기 위해 한양으로 가던 도중 백운면 평동리에 이르렀다. 마침 해가 저물어 박달은 어떤 농가에 찾아 들어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그런데 이 집에는 금봉이라는 과년한 딸이 있었다. 사립문을 들어서는 박달과 눈길이 마주쳤다.
 박달은 금봉의 청초하고 아름다운 모습에 넋을 잃을 정도로 놀랐다. 금봉은 금봉대로 선비 박달의 청초함에 마음이 크게 움직였다. 그날 밤 삼경이 지나도록 잠을 이루지 못해 밖에 나가 서성이던 박달이 역시 잠을 못 이뤄 밖에 나온 금봉을 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 선녀와 같았다. 박달은 스스로의 눈을 몇 번이고 의심하였다.
 박달과 금봉은 금세 가까워졌다. 이튿날이면 곧 떠나려던 박달은 더 묵었다. 밤마다 두 사람은 만났다. 그러면서 박달이 과거에 급제한 후 함께 살기를 굳게 약속했다. 그러다 박달은 고갯길을 오르며 한양으로 떠났다. 금봉은 박달의 뒷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싸리문 앞을 떠나지 않았다. 서울에 온 박달은 자나깨나 금봉의 생각으로 다른 일을 할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금봉을 만나고 싶은 시(시)만을 지었다

 난간을 스치는 봄바람은
 이슬을 맺는데
 구름을 보면 고운 옷이 보이고
 꽃을 보면 아름다운 얼굴이 된다.
 만약 천등산 꼭대기서 보지 못하면
 달 밝은 밤 평동으로 만나러 간다.
 
 과장(과장)에 나가서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박달은 낙방을 하고 말았다. 박달은 금봉을 볼 낯이 없어 평동에 가지 않았다. 금봉은 박달을 떠나보내고는 날마다 서낭에서 빌었다. 박달의 장원급제를. 그러나 박달은 돌아오지 않았다. 금봉은 그래도 서낭에게 빌기를 그치지 않았다. 마침내 박달이 떠나간 고갯길을 박달을 부르며 오르내리던 금봉은 상사병으로 한을 품은 채 숨을 거두고 말았다.
 금봉이의 장례를 치르고 난 사흘 후에 낙방거사 박달은 풀이 죽어서 평동에 돌아왔다. 고개 아래에서 금보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박달은 땅을 치며 목 놓아 울었다. 울다 얼핏 고갯길을 쳐다본 박달은 금봉이 고갯마루를 향해 너울너울 춤을 추며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박달은 벌떡 일어나 금봉의 뒤를 쫓아 금봉의 이름을 부르며 뛰었다. 고갯마루에서 겨우 금봉을 잡을 수 있었다. 와락 금봉을 끌어안았으나, 박달은 천 길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이런 일이 있은 후부터 사람들은 박달이 죽은 고개를 ‘박달재’라 부르게 되었다.
 
 김정욱 : 저 경상도 사나이가 과거 보러 가던 길에 박달재 금봉이네 집에서 자게 됐다 그랬어요. 잘 때 서로가 눈이 맞았다고 그랬어. 눈이 맞고, 서로가 눈이 맞아서 서로 인제 달밤에 그런 생각을 해서 잠을 못 이루고 바깥엘 나왔다가. 서로가 금봉이도 역시 마찬가지였고. 고 늠름한 그 기세가 맘에 들어서 바깥에서 눈이 마주치니까 거기서 언약을 했다는 거 아니여. “과거 합격해가지고 돌아와서 결혼하겠다.” 이렇게 약속을 하고 박달재를 떠났는데. 과거 보러 한양엘 올라가서 자꾸 금봉이 생각만 나서 금봉이 노랠 부르다가 낙방을 했다. 내용은 그렇게 됐죠. 낙방을 하고서 면목이 없어서 어- 내리오질 못하고 가지고 온 돈 그거 가지고 쓰다가 나중에 돈이 떨어지니까. “에라, 내리가서 금봉이나 한 번 보고 죽겠노라.”고 그래서 내려와 보니까 죽은지 삼일이 됐다고. 금봉이가. 상사병이 나서 죽었다. 남덜은 다 내려가는데 내리오지 않고 하니까. 그 서낭에다 대고 그렇게 빌었건만 박달이는 안 내려오니까 상사병이 나서 죽었다. 삼일만 일찍 내려왔드라면 이노무 거 금봉이라도 만나볼텐데 삼일 늦게 내리오는 바람에 금봉이를 놓치버린 거거든. 그래서 그 한스러워서 이 박달재 고개를 넘나들면서 금봉이를 불러댔다는거 아녀. 그 불러대는데 아니나 다를까? 어디서 비무, 이렇게. 안개처럼 그 에, 옷을 입고서 금봉이가 눈 앞에 어른거려서 “금봉아, 금봉아” 소리 지르고. 그게 비몽사몽해요 우리는요. 자꾸 염원을 하면요 그게 보여요. 그거 맞아요, 누구든지 기도 열심히 하면 뭔가 보여요 형체가. 그러니까 금봉이를 붙잡을라고 하면 한 발짝 뒤로 가고 못 붙잡고 못 붙잡고. 그래 쫓아가다가 그거 붙잡을라고 쫓아가다가 낭떨어지에 떨어져서 박달이도 죽었다. 아, 내용은 이렇거든.

⦁아들바위의 유래
 원박리는 옛날에 박달원(박달원)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지만, 이곳에 북바위(북바위)가 있고 북바위 옆에 아들바위가 있다.
 옛날 원박에는 양친을 모시고 사는 젊은 내외가 있었다. 농사를 짓고 사는 단란한 집안이었으나 아들 내외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손주를 낳아 대를 잇게 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부모들의 성화가 심했다. 젊은 며느리는 뒷산에 올라 북바위에 치성을 드리기 시작했다. 춘차추동할 것 없이 날마다 바위 앞에 가서 치성을 드렸다. 이렇게 10년 동안 정성을 드렸지만 아이를 갖지는 못했다.
 십 년 되던 어느 날, 며느리는 언제나와 같이 북바위에 치성을 드리고 있는 동안에 신병을 앓고 있던 시어머니가 숨을 거두고 말았다. 삼년 후 시아버지도 세상을 뜨고 말았다. 시부모가 모두 작고한 후에도 며느리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북바위에 치성을 올리러 다녔다.
 어느 해 겨울, 눈이 수북히 쌓이고 바람이 휘몰아치는 날이었다. 며느리는 눈길을 헤치며 북바위에 이르러 눈 속에 꿇어앉아 치성을 드렸다. 추위에 몸이 꽁꽁 얼어붙을 지경이었다. 치성을 끝낸 며느리는 산을 내려오다 그만 눈 속에 넘어지면서 다시는 일어서지 못했다. 집에서 아내가 오기만 기다리던 남편은 아내를 찾으러 나섰다. 눈 속에 파묻혀 죽은 아내를 발견하고는 아내를 가슴에 안은 채 남편마저 눈 속에 쓰러져 숨을 거두고 말았다. 두 내외가 부둥켜 안고 죽은 자리에서는 바위 하나가 솟아났는데, 사람들은 그 바위를 아들을 바라다 죽은 내외의 넋을 달래기 위해 ‘아들바위’라고 부르게 됐다.
 한번은 한 부인이 바위에 돌을 던졌는데, 그 돌은 아래로 떨어지지 않고 바위 위에 올라앉았다. 그 후 아들을 낳았다. 또 한 번은 다른 부인이 이 바위에 돌을 던졌는데 바위에 올아낮지 않고 땅에 굴러 떨어졌다. 그 부인은 딸을 낳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잉태한 여인이 아들인가 딸인가를 머리 알고 싶으면 바위에 와서 돌을 던져 점쳐 보게 된 것이다.

⦁박달재와 김취려 장군
 김취려 장군이 거란족의 침입을 박달재에서 전멸시켰다. 이어서 패잔병들을 쫓아 태백산을 거쳐 강릉, 요동성까지 올라갔었다.

김정욱 : 에, 우리 언양 김가, 언양 김씨하면은, 모든 언양 김씨라는 성씨를 가진 분은 김취려 장군의 후손입니다. 아, 전체가 다. 근데 에-, 김취려 장군은 경순왕으로부터 일곱째 아들에서 간 파입니다. 신라 오십육(56)대 경순왕. 거기서 김취려 장군이 에-, 지금 말하자면 경순왕에서부터 나간 파에서 여덟째 아들이에요. 여덟째 아들. 그러면 여덟째 아들이서 나간 그 파가 김취려 장군 파인데. 우열공이라는 시호를 받은 김취려 장군이거든요, 우열공. 어, 그런데 에- 본래 거란족허고 천백(1100)년도 경에는 강감찬 장군이 일, 이, 삼차를 압록강변에서 막았고. 그 다음에 그 양반이 돌아가신 이후에 천이백십칠(1217)년도 박달재 싸움이 그렇게 컷답니다. 그래서 이 박달재에서 어, 거란족을 전멸시킨 곳이 바로 여기거든요. 그래서 제가 대첩비를 꿈꾼 것이 바로 그거 때민이거든요. 그래서 거란족이 에, 여기 박달재에서 전멸을 당하고 패잔병이 도망가는 걸 쫓아가며까지도 전부 전멸을 시켰거든요. 나중에는 남은 사람들은 저어, 저 태백산 저 뭐야 저어, 어디야 거기가. 강릉으로 해서 산맥을 타고서 요동성까지 들어갔답니다. 그런데 인제 거기를 추격하믄서 잡았는데 나중에는. 그 우에서 거, 몽고족이 내리와 가지고 몽고족하고 합세를 해 가지고 거기 남은 장병까지 다 잡았다고 그래요. 그래서 거란족은 끝내는 전멸하고 말았다는 거예요.

⦁김취려 장군 출생과 갑옷
 김취려 장군의 출생지는 개성이며, 키가 커서 갑옷을 입을 때는 두 사람이 항상 따라다니면서 도와주어야 갑옷을 입을 수 있었다.

김정욱 : 에, 원래가 김취려 장군은 왕족이기 때문에 그래서 출생을 에, 개성해서 했지 않느냐. 먼 전에, 전에는 원래가 언양 김개{김가}가, 언양 김씨가 울산이거든요. 울산 인터체인지에 언양이라는 언양읍이거든요. 그런데 김취려 장군은 왕족이기 때문에 그 때 시대는 개성이 서울이죠? 개성에서 태어났지 않았느냐. 그 부모가 아- 벼슬길에 쭉 내려왔으니까. 그래서 음직이라는 벼슬이 있어요, 음직. 그게 옛날에는 부모가 벼슬길에 있으면 자식에게 주는 그 벼슬이, 그 이름이 음직이랍니다. 여 비문에도 적혀 있어요. 그래서 나라에 벼슬을 하게 된 것은 처음에는 등용을 음지그로 했어요. 그랬는데 그 때 당시는 음직으로 등용을 해고선 나중에는 정식으로 암행어사. 아 뭐야 그, 벼슬길에 인제 과거를 보게 된다누만. 처음엔 음직으로 보면 그래도 그 부모 덕으로 올라온 것 같아 언짢지 않겠어요? 그래 나중에 다시 에- 과거를 본답니다. 그렇게 봐 가지고 승승장구 했죠. 김취려 장군은 키가 아- 백팔십오(185), 백팔십오. 네 자가 넘죠. 수염이 배꼽까지 닿답니다. 그래서 갑옷을 입을 때는 아낙네들이 둘, 여. 저, 신하들이 둘이 붙어서 하나는 수염을 이렇게 잡아 주고 그 허리 각, 각을 내줬답니다. 그래서 그 뒤에는 꼭 두 분씩 그렇게 따라 다녔답니다. 갑옷 정리하는 데도 그러니까 대장군이지.

◎ 원박리 노래 - 울고 넘는 박달재

 <울고 넘는 박달재>는 대한민국 건국 직후인 1948년 박재홍이 부른 대중가요다. 반야월 작사, 김교성 작곡의 곡으로, 발표했을 때부터 인기를 끌며 박재홍은 대스타가 되었고 노래에 담긴 서민적인 정서가 공감을 얻어 이후로도 오랫동안 애창되고 있다. 반야월이 악극단 지방순회 공연 중 충주에서 제천으로 가는 길에 농부 내외인 듯한 남녀의 이별 장면을 목격하고 작사했다는 일화가 있다.
 “천둥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 님아”라는 가사로 시작되며, 비 오는 날 박달재에서 이별한 뒤 홀로 남은 화자가 가슴이 터지도록 울면서 소리치는 내용이다. 한국방송의 성인가요 전문 프로그램인 《가요무대》가 2005년 방송 20돌을 맞아 가장 많이 불려진 노래를 조사해 발표했을 때, 방송 횟수 전체 1위를 차지했다. 제천시 국도변에 박달재 휴게소 입구에는 노래 가사를 적은 박달재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1절 천둥산 박달재를 울고넘는 우리님아
    물항라 저고리가 궂은비에 젖는구려
    왕거미 집을집는 고개마다 굽이마다
    울었소 소리쳤소 이가슴이 터지도록

 2절 부엉이 우는산골 나를두고 가신님아
    돌아올 기약이나 성왕님께 빌고가소
    도토리 묵을짜서 허리춤에 달아주면
    한사코 우는구나 박달재의 금봉이야

◎ 원박리 역사인물

 · 유중교(柳重敎, 1832-1893)
 자는 치정(致政), 호는 성재(省齋), 초명은 맹교(孟敎), 본관은 고흥이다. 조선말기의 학자로 이항로의 문인이며, 이항롱 사후에는 김평묵을 스승으로 했다. 위정척사론을 정통으로 이어받은 학자이며, 장담마을에 자양서사를 세워 유인석과 이소응 등 많은 제자들을 배출했다. 21세 때 화서의 지도로 『송원화동사합편강목(宋元華東史合編綱目)』을 편수했다. 1876년과 1882년에는 선공감역(繕工監役)과 사헌부지평에 각각 제수되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1881년 척사위정의 소론이 일어나자 김평묵과 함께 구법보수(舊法保守)와 척양척왜를 열렬히 주장했으며, 이러한 그의 사상은 제자들에게도 이어져 격렬한 항일 의병운동으로 발전한 계기가 되었다. 1886년 이항로의 심설(心設)에 대해 김평묵과 충돌하면서 화서 문인이 사실상 두 갈래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1889년 춘천에서 제천 장담으로 이주하여 자양서사를 세우자 성재를 따르는 많은 제자들이 장담으로 모여 들었다. 1893년 서거하였으며, 자양영당에 배향되었다. 서거 후 제학(提學)에 추증, 시호는 문간(文簡)이며, 저서로는 『성재집(省齋集)』 등이 있으며, 묘소는 원박리에 있다.

 · 이용준(李容俊, 1907-1946)
 제천 출신으로 이용태의 동생이다. 1927년 신간회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그뒤 중국으로 건너가 정화암(鄭華岩)이 주도하는 남화한인청년연맹에 가입하여 1931년 11월 행동단체인 결사대(흑색공포단)를 편성, 이강훈, 백정기 등과 같이 천진의 일본총영사관 · 일본병영 등에 투탄하고 일본영사관 밀정들을 살해하였다. 1932년 12월 일본총영사관에 투탄하였으나 일부만 파괴하였다. 1935년 정화암과 함께 엄형순, 이규창 등으로 하여금 상해거류민회 부회장인 친일파 이용로를 총살, 처형토록 하였다. 1937년 중경의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하여 중앙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38년 12월 1933년 수립한 일본공사 암살계획 혐의로 북경에서 체포되어 1940년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형을 언도받았다.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 이용태(李容兌, 1890-1966)
 호는 단암(檀菴), 본관은 광주, 제천 출신으로 백운면장으로 근무하다가 독립운동가인 동생 용준(容俊)의 압송을 목격하고 독립운동에 뜻을 두었다. 1939년 4월 만주로 건너가 정치사상단체로서 조국의 독립국가수립을 목적으로 하는 대종교총본사(大倧敎總本司)에 들어가 참교(參敎), 지교(知敎)를 지냈으며, 그 뒤 경의원장(經議院長)으로 활동하였다. 1942년 대종교 간부 일제 검거시에 간부 24명과 함께 잡혀 모란강 고등법원에서 징역 8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45년 광복으로 출감, 귀국하여 대종교사업에 헌신하였다. 1968년 대통령 표창이, 1977년 건국포장이 수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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