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천의 역사와 전통을 알아 볼 수 있는 게시판 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제천의 지명과 행정구역의 변화 지역적 특성과 산물 등을 알려드립니다.
작성일 : 22-07-26 15:28
[백운면] 방학리[放鶴里]
글쓴이 :
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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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리는 구학산 아래에 위치한다. 방아다리가 있었으므로 방아다리, 방학교(放鶴橋), 방하리(方下里)라고 불렀고, 송학면의 방아다리와 구별하여 ‘서면방아다리’라고도 하였다. 본래 제천군 원서면(遠西面) 지역이다.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부수리(夫水里) 와 우음리(羽音里)를 병합하여 방학리라 해서 면에 편입되었다. 1980년 4월 1일 제천시 승격에 따라 제원군 백운면 방학리라 하다가, 1995년 1월 1일 시군 통합에 따라 제천시 백운면 방학리가 되었다. 방학리는 1리와 2리로 나뉘는데, 1리의 마을면적은 420.7ha 이며, 논은 90ha, 밭은 76ha이다. 인구수는 325명, 가구수는 132가구이며, 특산물은 오이, 사과, 벼 등이다. 자연마을로 음실과 큰골 등이 있다. 방학2리의 마을 면적은 1,115.2ha이며, 논은 46ha, 밭은 89.2ha 이다. 인구수는 229명, 가구수는 85가구이다. 특산물은 사과, 쌀 등이다. 특히 농지의 70% 이상이 사과농사에 종사하고 있다. 1995년에 세운 방학1리 마을 자랑비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웅장한 백운산맥의 남쪽기슭에 자리잡은 방학리(放鶴里)는 예로부터 살기좋은 고장으로 이름난 곳이다. 제천제일의 기름진들과 사시사철 맑은 시냇물이 발학동을 적셔주어 늘 풍요로운 농산물을 생산하여 방아다리처럼 넉넉한 인심을 꽃피운 것이 이 마을의 또다른 자랑거리다. 방아다리는 본래 신라 경순왕때(935) 원서면에 속하였다가 고려때는 양광도 충주목에 편입되었고 지금에 와서는 학으로 수놓은 모양처럼 아름답다하여 방학리라 부르게 되었다. 방학리는 5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졌다. 산골짜기에 돌이 많다하여 ‘둘무구렁’ 마을의 맨 위쪽에 있는 ‘옷말’ 마을의 중척에 있는 ‘중퉁말’ 부자와 장수자가 많았다는 부수동 그리고 경순왕의 궁터가 있었다는 ‘궁뜰’ 로 이름마다 역사의 숨결과 친근감이 느껴진다.
마을의 수호신인 수령 500년이 넘은 느티나무는 마을의 온갖 재앙과 잡귀를 막아준다는 전설이 있고 사철 청계옥류가 흐르는 궁뜰 앞 마당바위는 피서객의 명소로 손꼽히는 곳이다. “한때는 그 어떤 도시보다도 평화롭고 윤택했던 방아다리 무심한 세월의 경랑속에서 빛 바란 추억이 되었나!” 이 비로 하여 이곳에 탯줄을 묻은 자들은 애향심과 자긍심을 드높이고 이 곳을 찾는 사람들은 푸르고 깨끗한 이 방아다라 마을을 오래오래 기억해 달라는 뜻에서 이 비를 세웁니다.
1995년 8월 10일 주민일동
◎ 방학리 지명유래
● 개경재(開京榟) : 부수동에 있는 고개, 충주 엄정으로 이어짐.
● 골말: 웃말 북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
● 구렁[돌무구렁] : 방학리에 있는 마을.
● 궁뜰¹[궁평] : 부수동 북쪽에 있는 마을. 옆에 궁뜰이 있음.
● 궁뜰²[궁평, 궁야] : 부수동 북쪽에 있는 들. 서남쪽에 이궁(離宮)인 동경도(東京都)가 있었음.
● 궁야(宮野) → 궁뜰.
● 궁평¹[宮坪] → 궁뜰. 궁평 마을은 『충청북도각군읍지(忠淸北道各郡邑誌)』 제천군읍지(堤川郡邑誌 고적(古跡)에 “신라 경순왕이 고려에 나라를 바치고 제주에 물러나와 거처하였는데, 이곳에 궁을 지어 궁평이라 하였다고 전한다.”라고 기록된 곳이다.
● 궁평²[宮坪] → 궁뜰.
● 대곡(大谷) → 큰골.
● 돌무구렁 → 구렁.
● 동경저 터(東京邸-) : 궁뜰 서남쪽에 있는 동경저의 터, 신라말 경순왕(敬順王)이 고려 왕건(王建)에게 나라를 바치고 명산(名山)을 찾아다니다가 이곳에 이르러 이궁(離宮)을 짓고 머물렀다 함.
● 동부 : 방학리에 있는 마을.
● 동청굴: 부수동 맞은 편에 있는 마을. 말(馬)에게 물을 먹이던 큰 못이 있었다고 함.
● 마당바위 : 방학 궁뜰앞 하천변에 마당처럼 넓고 평평하다 하여 이름 붙여짐.
● 마락골 : 방학리에 있는 마을.
● 매봉재 : 중턱말 앞에 있는 산.
● 맨두재 : 큰 골 동북쪽에 있는 봉양면 옥전리로 가는 고개.
● 문바우¹[문암] : 골말 동북쪽에 잇는 마을. 문바우가 있었음.
● 문바우²[문암] : 문바우에 있던 바위. 길가 양쪽에 문기둥처럼 서 있었음.
● 문암¹[門岩] → 문바우.
● 문암²[門岩] → 문바우.
● 문화생활관 : 방학리 상촌에 위치 1995년에 신축. 건평 40평.
● 방아다리[방학교] → 방다리 서쪽에 있던 다리. 디딜방아의 방아채로 놓았음.
● 방학교(放鶴橋) → 방아다리.
● 방학저수지(放鶴貯水地) : 궁뜰 앞에 있는 저수지.
● 번더움 : 방학리에 있는 저수지.
● 범바우[호암] : 범바웃골에 있는 바위. 옛날에 범이 살았다고 함.
● 벧엘교회 : 방학1리 중촌에 위치하며 1962년 10월 창립.
● 부수동(副壽洞, 夫水洞) : 방아다리 서남쪽에 있는 마을.
● 상촌(上村) → 웃말.
● 손두안 : 방아다리 동북쪽에 있는 마을. 사방에 산이 둘러 있음.
● 양지말 : 궁뜰 북쪽에 있는 마을. 양지 쪽에 있음.
● 여우목고개 : 궁뜰 동편에 위치하며 옛날 여우가 많이 서식하던 고개로 여우목으로 붙여짐.
● 우음곡(羽音谷, 愚音谷) → 움실.
● 움실[우음곡] : 골말 서쪽 골짜기 안에 있는 마을.
● 웃말[상촌] : 방아다리 위쪽에 있는 마을.
● 중턱말 : 웃말과 궁뜰 사이에 있는 마을.
● 큰골[대곡] : 문바우 북쪽 큰 골짜기 안에 있는 마을.
● 큰들 : 방아다리 뒤에 있는 큰 들.
● 호암(虎岩) → 범바우.
● 호암곡(虎岩谷) → 범바우골.
◎ 방학리 문화유산
● 경순왕이궁지(敬順王離宮地)
935년 경순왕이 왕건에게 식읍으로 받은 이곳에 이궁을 지었다고 하는 이궁지[동경저-東京邸]로 전해내려오는 터가 있다. 이궁지는 해발 313m의 산 정상에서 북쪽과 북동쪽으로 뻗어 내려온 가지능선 사이의 하단부에 ㄷ자형으로 경사가 완만한 사면대지를 이루고 있는 곳에 있다. 이 완만한 사면대지는 밭으로 경작되고 있으며, 밭 주위로는 대형의 화강암 석재들이 쌓여져 있고, 밭과 주변에서는 기와와 토기편이 나오고 있다, 한편 이궁지 앞쪽으로는 오래된 은행나무가 있으며, 북서쪽 모퉁이에는 돌로 쌓은 오래된 우물 하나가 있는데, 우물을 만들 때 사용된 석재 중에는 건물의 문에 사용된 석재도 있어 건물에서 나온 석재로 우물을 만든 것을 보인다.
● 골말 서낭당
슬레이트 지붕에 시멘트로 벽이 되어 있으며, 전면은 함석으로 되어 있다. 서낭당 내부에는 제단만 있을 뿐 아무것도 없다. 골말 서낭당에서 모시는 신은 ‘구학산신령’으로 여신이다. 당고사는 매년 음력 10월에 부정하지 않은 날을 받아 지낸다. 제관과 고양주는 생기를 봐서 선출하며, 선출된 제관과 고양주는 금기를 철저히 지켜야 한다. 당고사를 지내는 날에는 맑고 차가운 물로 목욕재계하고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제의에 임한다. 제물로는 돼지머리⦁밤⦁대추⦁곶감⦁술⦁포 등을 진설한다. 예전에는 ‘온돼지’를 썼지만 지금은 경비 마련에 어려움이 있어서 돼지머리만 사다 쓴다. 제의의 진행은 유교식 절차에 따라 초헌 – 독축 – 아헌 – 종헌 – 소지 – 음복의 순으로 진행된다.
● 궁평 보호수
1982년 11월 16일에 제천시 보호수 제22호로 지정되었다. 수종은 느티나무이며, 수령은 350여 년 되었다. 나무의 높이는 14m이고, 둘레는2.4m이다.
● 부수동 보호수
제천시 보호수 제72호로 2003년 4월에 지정되었다. 수령은 약 500년 정도 되었다. 나무의 높이는 9m이고, 둘레는 6.3m이다. 부수동 은행나무가 있는 곳은 신라 경순왕 이궁지였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 부수동 장기판(將棋板)
부수동 장기판은 은행나무와 마찬가지로 경순왕과 관련된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은행나무에서 30m 떨어진 개울 옆 바위 위에 새겨져 있다.
⦁큰골 서낭당
슬레이트 지붕에 벽은 나무판자로 되어 있다. 그 옆에는 서낭목으로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서낭동 안에는 한지로 만든 신체(神體)를 모셔 놓았다. 제의는 매년 음력 정월 초에 날을 받아서 지낸다. 제를 지내기위해서 생기를 봐 제관과 고양주를 뽑는다, 선출된 제관과 고양주는 금기를 철저히 지켜야 한다. 제물로는 백설기 한 시루⦁감주⦁포⦁대추⦁곶감 등을 진설한다. 제의의 진행은 초헌 – 독축 – 아헌 – 종헌 – 소지 – 음복의 순으로 이루어진다.
◎ 방학리 이야기
⦁용소의 유래
큰골 용소(龍沼)는 예전에 이무기가 용으로 변하여 승천했다고 해서 용소라라고 한다. 용소 위에는 두 개의 웅덩이가 더 있고, 웅덩이와 웅덩이 사이에 작은 폭포가 흐르고 있다. 용소는 가뭄이 들었을 때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다. 개를 잡아 그 주위에 피를 뿌려서 기우제를 지냈었다고 한다.
⦁경순왕 이궁지(敬順王 離宮址)
신라 천년 사직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은 56대의 왕위에 오른지 9년 만에 신라 국운의 쇠퇴와 더불어 당시 고려 왕건이 신흥 세력으로서 건국을 하자, 종내 사직을 부지하지 못할 것을 깨닫고 왕건에게 사직을 무혈양위(無血讓位)하고 스스로 신례(臣禮 )를 취하였다. 이에 왕건은 그를 정승의 예로서 대우하고 신라의 구령(舊領 : 옛 영토)을 그의 식읍(食邑)으로 주고 왕건의 장녀 낙랑공주를 취처케 하였다. 당시 태자(金鎰 : 김일)의 복구 운동이 실패로 돌아가고, 태자는 천추망국의 통한을 한 몸에 지니고 천년 종묘사직과 만백성에게 속죄하여 마의를 두르고 개골산으로 들어간 뒤 종적이 묘현하였다. 그 후 경순왕은 이곳 부수동(富壽洞)에 동경저리궁(東京邸離宮)을 짓고 머물렀다고 한다. 우거진 풀숲에 있는 옛 궁궐터를 바라보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천년 신라사직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왕당과 궁뜰의 유래
왕당은 왕이 지나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고, 궁뜰은 경순왕이 머물렀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다.
전종남 : 왕당이라는 것은 그거 아주 몰러. 옛날 오래 전엔 뭐, 뭐 왕이 뭐, 뭐 거주했, 지나갔다고서는 그래는데 그거는 뭐 별루 유래가 없어.
조사자 : 어 왕이 지나 갔단 자세히 들은 거는?
전종남 : 그, 어 자세히 들은 거는 없고. 글쎄, 뭐 그거는 유랜데 뭐, 뭔 저건지 그거는 뭐 유래는 없어.
조사자 : 왕당이 한자가 어떻게 되는지?
전종남 : 왕당이 임금 왕자 무리 당자 그렇게 그 썼는데. 완전히 왕당이라는 저 주소지고 어디고 글자 그대로 따라서는 이름나게 뚜렷하게 왕당이라는 쓴 글자가 없어.
조사자 : 옛날에 경순왕이 지나가길 원했다고?
전종남 : 경순왕은 지나간 건 저 방학일(1)구로 지나갔는데 글쎄. 그 때 뭐 어떻게 저거 됐는지도 몰라도. 방학리에 저 큰 골이라는 데루 다가서는. 저 큰 골이 아니고 탐 저기 그 뭐야 메물골이라는 데루 지나갔는데.
조사자 : 예, 방학리.
전종남 : 어, 방학리 어, 메물골. 그 궁뜰이라는 데가 그 저기 뭐야, 그 저기 그 방학리 본동이 그 궁뜰인데. 어, 경순왕이 거기 지나갈 적에 거 궁중들이 인제 거기서 머물렀구. 그 쪽에 가 가지고서는 인제 거 했다 그래는데. 거기 아마 정이 있었던 모양이에요. 옛날에 경순왕 지나갈 직에
조사자 : 궁뜰에요?
전종남 : 어, 궁뜰에 거 물렀다 그것뿐이 없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