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천의 역사와 전통을 알아 볼 수 있는 게시판 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제천의 지명과 행정구역의 변화 지역적 특성과 산물 등을 알려드립니다.
작성일 : 22-07-26 15:37
[송학면] 도화리[桃花里]
글쓴이 :
문화원
(조회 : 3,063)
도화리는 용두산 밑에 정남향으로 터전을 잡은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본래 제천군 북면 지역으로서, 복숭아꽃이 많이 피므로 ‘도화동(桃花洞)’이라 하였다. 지금도 마을 앞을 지나는 길가에 가로수로 복숭아나무를 심어 놓았다.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지곡리(芝谷里), 동막리(東幕里)와 신담리(新潭里)의 일부지역을 병합하여 ‘도화리’라 해서 송학면에 편입되었다. 1980년 4월 1일 제천시 승격으로 인하여 제원군 송학면 도화리가 되었다가, 1955년 1월 1일 시군통합으로 제천시 송학면 도화리가 되었다.
도화리는 제천 시내에서 약 10분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송학면사무소를 기준으로 했을 때 의림지 방향으로 가는 길가에 자리 잡고 있다. 도화리 전체 면적은 약 702.6ha이며, 아랫반(5반)과 윗반(6반)으로 이루어져 있다. 도화리에는 현재 142가구, 397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주로 농사를 짓는데, 논이 58.9ha, 밭이 81.9ha를 차지하고 있어 밭농사 위주의 지역임을 보여준다. 이는 용두산 줄기가 마을을 감싸고 있기 때문인데, 화전(火田)을 경작했던 흔적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 특산물은 고추, 느타리버섯, 딸기, 토마토, 황기 등이다.
지금으로부터 500년 전 쯤에 밀양 박씨 가문의 박윤장(밀양박씨 32대)이 영월에서 도화리에 처음으로 들어오게 되어 이 마을의 가장 주된 가문이 되었다.
현재 마을에 살고 있는 밀양 박씨의 가구 수는 약 7가구이고 과거에 많이 거주할 때는 37가구 정도 살았다고 한다.
◎ 도화리 지명유래
● 가래실 : 도화동의 서북쪽 마을.
● 광암(廣巖)¹ : 광암이 있는 마을.
● 광암(廣巖)² : 도화동 서쪽에 있는 넓은 바위. 근방에 너럭바위가 많고, 앞내에 물고기가 많으므로 천렵 터로 유명하였다고 함.
● 동막(東幕)[북동막] : 광암 서북쪽에 있는 마을. 금성면 동막리와 구별하여 북쪽이 되므로 북동막 이라고도 함. 동쪽이 막히어 동막이라고 함.
● 벌말, 안말 : 도화동의 중심 마을.
● 북동막(北東幕) → 동막.
● 신담(新潭) : 동막 서쪽에 있는 마을. 못이 있었음. 옛날부터 잡목 잡초가 무성한 곳이었는데 현재는 큰 윗못이 생기어 영구불변하는 신담이 되었음.
● 신광사(神光寺) : 도화동에 있는 절.
● 아래쇳골, 윗쇠골 : 현재 개나리공원묘지가 있는 곳(사람이 죽어서 쇠한 뼈 즉 낙골)
● 안말 : 한산 이씨가 1904년(甲辰年) 경에 터를 잡고 살았다.
● 용담사(龍潭寺) : 태고종단의 사찰로, 경내에는 현대식의 대웅전과 요사채가 있는 단촐한 규모이다. 대웅전은 전면 4칸, 측면 2칸의 건물이며 내부에는 석가모니를 주존으로 하고,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양협시로 하는 삼존불을 봉안하고 있다. 사찰의 역사를 전해주는 유물이나 유구는 없으며 수습되는 기와들은 무문기와편들로 사찰의 역사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 중들 : 가래실 위 들.
● 지곡(芝谷) → 지실.
● 지실[지곡] : 화동 동북쪽에 있는 마을.
● 직치(禝峙) : 즉치, 피재골, 옛날 난리에 은거하다가 피난민들이 상황에 따라 오미리로 가고 명암으로 갔다고 함. 피재골을 넘어가면 이제 살았구나 하고 노래를 불렀다하여 ‘황가댁’ 이라 칭하기도 한다.
◎ 도화리 문화유산
● 광암 백자요지
가마터 주변은 물론 그 윗부분인 경작지에서도 다량의 도편들이 수습되어져 상당히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가마의 상단은 경작활동으로 인해 파괴가 되었지만 그 아랫부분, 가마의 상단부분은 보존되어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따라서 가마는 완만한 기루기를 가진 능선을 따라 적어도 2기 이상의 가마가 운영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도화리 광암 백자터에서 수습된 유물의 종류는 여러 기종의 백자편, 가마벽편, 도지미 등이다. 백자의 기종은 대접, 발, 접시, 잔 등 일상생활 기명이다.
대접과 발은 내저곡면형과 내저원각형이 있으며, 구연부와 측면이 남아 있는 발의 형태는 외반 구연에 측면이 직립하였다. 굽의 외형은 직립형이고 굽 안쪽은 중심에 볼록한 돌기가 있고 곡면형을 띤 오목굽형이다. 전체적으로 구연부와 동체의 기벽이 얇은데 반해, 저부와 굽은 기벽이 두꺼워 투박하다. 태토는 비교적 정선되었으며, 기면전체에 유약을 시유하였다. 광택이 강하고, 유색은 회백색이 주류를 이룬다. 접지면에 적갈색 점통를 묻힌 다음 접지면과 내저면에 규석질의 굵은 모래를 받쳐 포개어 번조하였다. 도지미는 납작한 원반형으로 바닥면이 비스듬히 경사진 형태이다.
● 광암 보호수
제천시 보호수 24호로 1983년 11월 16일에 지정되었다. 수종ㄹㅇ른 느티나무이며, 수령은 약 250년 정도 되었다. 나무의 높이는 16m이며, 둘레는 1,3m이다.
● 괌암 지석묘
덮개들은 평면 타원형이며, 480x250x80cm의 크기이고 암질은 화강암이다. 덮개돌의 긴 길이방향은 동-서 방향으로 마을 앞으로 흐르고 있는 작은 개울의 방향과 같다. 덮개돌의 가장자리에는 많은 손질자국이 관찰되며, 윗면에는 지름 3~8cm, 깊이 1~3cm의 굼이 8개가 있다. 지석묘의 형식은 남한강유역에서 가장 많이 분포하고 있는 개석식 지석묘로 여겨진다.
● 굼바위
화강암 바위 윗면에 굼을 새긴 2기의 굼바위가 자리하고 있다. 1호는 현재 위로 돌이 쌓여져 있어 정확한 크기는 알 수 없으나, 윗면에 25개가 넘는 굼이 있으며, 그 크기는 지름 7~10cm, 깊이 4~7cm로 다양하다. 모두 갈아 만든 굼이다. 2호는 머리를 내밀고 있는 거북같이 넓적한 바위 밑으로 사각기둥형태의 바위가 남서쪽(S-45˚-W)을 향해 나와 있다, 굼은 열 개가 새겨져 있는데, 맨 앞의 것이 지름 15cm, 깊이 12cm로 가장 크며, 나머지는 지름 8~12cm, 깊이 8~1cm로 다양하다. 금성면 사곡리의 굼바위와 비교되는 자료이다.
● 박효자문(朴孝子門)
도화리 동막에 있는 효자 정문이다. 조선 인조(仁祖) 때 박전(朴廛)이 아버지 병환에 백방으로 약을 썼으나 낫지 않으므ㄹ,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어 드렸다. 하누는 때 아닌 배를 먹고 싶어 하므로 배를 찾아 헤매다가, 앞 내에 이르니 갑자기 큰 비가 내려 냇물에 작은 나무궤가 떠내려왔다. 건져 열어보니 배가 가득히 들어 있어 아버지께 드려 효혐을 보았다. 이는 하늘에서 보낸 효자라 하여 나라에서 정문을 내리고 표창하였다고 한다. 현재 박전효자문은 자손들에 의해 보존하고 있으며, 지금으로부터 약 25년 전 쯤에 나무로 세워두었던 기둥을 시멘트로 바꾸는 보수작업을 행하었다.(이야기 참조)
● 도화동 서낭당
기와지붕에 시멘트호 벽을 만들었다. 서낭목은 소나무다. 서낭당 내부에는 ‘성황지신위(城隍之神位)’라고 쓰여진 위패가 있다. 도화동 서낭당에서의 당고사는 매년 음력 정초에 지내며, 제물로는 백설기 한 시루산적⦁포⦁밤⦁대추⦁곶감 등을 진설한다. 제의의 진행은 유교적 절차에 따라 초헌 – 독축 – 아헌 – 종헌 – 소지 – 음복의 순으로 이루어진다.(마을신앙 참조)
● 동막 보호수
2003년 4월에 제천시 보호수 제78호로 지정된 느티나무다. 수령은 약 500년 정도 되었으며, 나무의 높이는 13m이고, 둘레느 6.9cm이다.
● 이공기부조묘
송학면 도화리에이공기의 부조묘가 세워져있다. 부조묘느 불천위(不遷位)제사의 대상이 되는 신주를 모시는 사당이다. 예부터 종갓집에서는 제사를 지낼 때 위로 4대에 해당하는 선조들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게 되어 있었다. 문제는 제사를 모시던 자가 죽은 경우인데, 죽은 후 그 후손은 뒤를 이어 제사를 모실 때 죽은 이를 포함하여 선조 3대를 모시게 된다. 이때 기존에 모시던 가장 위의 선대의 제사는 지내지 않게 되고, 이 경우 그 선조의 신위를 사당에서 꺼내 땅에 묻는 것이 예의이다.
그러나 특별한 경우 왕의 허락 아래 신위와 제사를 모시게 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것을 ‘부조묘’라 한다. 주로 나라에 큰 공훈이 있는 사람이나, 위험에 빠진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이 이 경우에 속한다. 왕들은 나라에 큰 공훈을 세운 인물이라 여겨지면 신위를 옮기지 않도록 허락하였다. 이공기는 4대 봉사가 끝난 후에도 신주를 땅에 묻지 않으며 계속적으로 후손들에게 기제사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부조묘 바로 앞에 후손이 살고 있고, 이곳에는 당시에 공이 있는 신하에게 공신을 내리는 옥촉과 증직을 하사하는 교지를 보관하고 있었다. 현재는 의병전시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 이공기 호성공신교서 및 초상
한계군 이공기 호성공신교서 및 초상이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04호로 지정되어있다. 교서는 이공기가 임진왜란 중인 선조 25년에 선조를 호위한 공로로 선조 37년 10월에 애린 공신교서이다. 공적 사례, 공신에 대한 포상과 특전, 공신의 명단, 사실증명 등을 차례로 적고 있다. 공신명단에는 1등 공신에 이항복 등 2명, 2등 공신에 선조의 넷째 아들인 신성군 등 31명, 3등 공신에 이공기, 허준 등 86명이 적혀있다. 비단에 두꺼운 선지를 포개 붙여 만든 두루마리 형태로 앞부분은 화재로 일부 소실되었다. 초상은 공신포상 규정에 따라 제작된 것으로 오삽모에 단령을 입고 의자에 앉아 있는 전신좌상이다. 전체적인 형식이나 표현기법에 있어서 17세기 전반 공신상의 전형적인 특색을 지니고 있다. 교서와 초상은 조선 중기의 초상화 제작 양식 및 한방사, 인지왜란사 관련 인물의 기록 자료로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도화리 이야기
● 효자 박전
박전은 선조 32년 도화리에서 태어나 학문에 힘쓰고 덕을 닦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또한 효성이 지극하여 과거에도 나아가지 않고, 어버이 섬기기만을 하였다. 그러던 어느 해 부친이 병환으로 눕게 되었는데, 온갖 약을 썼으나 효험이 없이 위독하게 되었다. 박전은 부친이 병을 낫게 해달라고 하늘에 빌고, 자기의 손가락을 잘라 흐르는 피를 부친의 입에 넣어 들였다. 부친의 병은 나았으나 입맛이 떨어져 먹지를 못하여 걱정하고 있는 차에 부친이 배를 먹고 싶다 하였다.
박전은 배를 구하러 나섰으나 그 때가 음력 6월이라 배가 있을 리가 없었다. 가깝고 멀고를 떠나서 배를 구하러 다녔으나 결국은 얻질 못하고 어느 커다란 냇가에 앉아 불효막심함을 탄식하고 있었다. 그 때,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져 냇물이 순식간에 불어 물길이 시나와졌다. 놀란 바거전은 내를 건너려고 이리저리 물길이 느린 곳을 찾아 왔다 갔다 하는 데 작은 궤 하나가 떠내려오더니 박전 앞에서 멈추는 것이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박전은 그 궤를 들어 올려 뚜껑을 열러보니 궤 안에 배가 가득 들어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배를 부친에게 가져다 드려 입맛을 돋우어 주었다. 하늘이 박전의 효성에 감동하여 배를 내렸다고 사람들은 믿었다. 그리고 내에서 배를 얻은 곳이 봉양읍 구학리라고 한다,
◎도화리 마을신앙 – 서낭제
● 제당(祭堂)의 명칭과 형태
도화동(桃花洞)에는 마을 제당 한 개와 산신(山神)으로 여기는 신목[老松]이 한 그루 있다. 두 개가 모구 아랫반(5반)에서 윗반(6반)으로 올라가는 길가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를 ‘서낭당’ 또는 ‘서낭당(成隍堂)’ 이라 부르며, 신목을 부르는 특별한 명칭은 없다. 서낭당의 외부 형태는 시멘트로 된 벽에 기와를 얹었으며. 문은 함석으로 만들었다. 내부에는 제물을 진설할 수 있는 제단이 있고, 중앙에 신위(神位)가 모셔져 있다. 신위는 45cm 정도 높이의 나무 판자에 ‘成隍之神位’라는 글씨를 붓으로 쓴 형태다. 천정에 합판을 붙여 놓았으며, 바닥에도 나무판을 깔아 놓았다.
원래의 서낭당은 나무판자로 얽은 벽에 기와를 얹은 건물이었다. 그러나 1950년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불에 타 없어졌고, 원래의 자리에 다시 지었다. 이후 1970년대(새마을운동을 할 당시)에 정부 시책에 힘을 얻은 기독교 신자들이 미신 타파라는 명분으로 몇 차례 훼손하기도 했다. 이후 1988년도에 서낭당을 보수해서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 제관(祭官) 선정
도화동 서낭제를 지내기 위해서 제관, 축관, 도가집, 소지담당(2명)을 선정한다. 현재 제관과 도가집은 마을 토지를 도지(賭地) 받아 경작하는 주민이 전담한다. 예전에는 주민들 중 생기복덕(生氣福德)이 맞고, 부정하지 않은 사람을 선정하여 지냈으나 10여 년 전부터 지금처럼 해 온다. 2005년 서낭제는 이규택(남⦁68세) 씨가 맡아 지냈는데, 금년이 여섯 해 쨰다. 이외에 축관은 생기복덕이 맞는 사람 중에서 선정하거나 도화동 대동계장이 맡아서 한다. 그리고 소지 올리는 사람 두 명도 생기복덕을 맞춰서 선정한다. 이들의 선정은 서낭제를 지내기 3일 전에 한다.
서낭제 참석자로 선정이 되면 3일 동안 근신하고, 부정을 타지 않도록 금기를 지켜야 한다. 반드시 지켜야 할 금기가 몇 가지 있다. 우선 상가(喪家)에는 절대로 가지 않는다. 심지어 집안사람이 상을 당하더라도 문상(問喪)을 가지 않는다. 또 길가에 죽어있는 짐승을 보지 말아야 한다. 이를 위해 집 밖으로 멀리 나가지 않는다. 부부 간에 관계를 금해야 하며, 비린 음식과 개고기를 먹어서도 안 된다. 이 외에 다른 금기사항은 없다. 도가집에는 대문 위에 금줄을 치고, 바닥에는 황토를 세 무더기씩 놓는다. 금줄을 치고, 황토를 뿌리는 것은 신성한 지역임을 알려 주민들이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 제비(祭費)와 제물(祭物)
서낭제를 한 번 지내는데 드는 경비는 약 10만 원 가량이며, 마을 고동기금으로 충당한다. 공동기금은 마을 소유의 논을 주민에게 도지로 주었다가 추수철이 되면 쌀 한 가마를 도조(賭租)로 받아서 사용한다. 논은 현재 마을 회관 우측에 있으며, 면적은 500평 정도다. 이규택 씨가 도지를 받아서 여섯 해 째 농사를 짓고 있다. 농사가 잘 되어 풍작이 들면 벼 다섯 가마 정도를 수확하고, 그렇지 않으면 세 가마 정도를 수확한다. 서낭님이 돌봐주시는 땅이므로 농사가 잘되는 편이라고 한다.
도화동에서 서낭제를 지낼 때 사용하는 제물은 간소한 편이다. 제물은 제주(祭酒)와 밤, 대추, 곶감, 사과, 배, 말린 통북어, 북어포, 소고기 수육, 백설기 한 시루, 어탕(魚湯) 한 그릇을 사용한다. 돼지 머리를 쓰지 않는 대신 소고기를 한 근 올린다. 백설기는 지금도 3되 3홉의 쌀을 사용해서 찌고 있으며, 떡이 잘 쪄지면 그해 운수가 좋고, 그렇지 않으면 나쁜 일이 생긴다고 여긴다. 어탕은 명태와 두부, 다시마를 넣어서 만든다.
제물은 미리 장만해 놓지 않고 서낭제 당일 아침 일찍 제천시내 장에 나가서 사온다. 이때 다른 사람들보다 일찍 집을 나서는데, 제물로 쓸 음식에 다른 사람들의 손때가 묻기 전에 구매(購買)하기 위함이다. 서낭제를 성심껏 지내고자 하는 주민들의 정성을 엿볼 수 있다.
● 제수(祭需) 준비
도화동 서낭제를 지내기 위해 준비하는 제수는 제물과 축문(祝文), 의관(衣冠) 외에 특별한 것이 없다. 추굼ㄴ은 서낭제를 지내는 당일 아침에 제관이 쓴다. 제의 참석자들이 입을 옷은 검은색 두루마기 네 벌이 마련되어 있으며, 머리에 관(冠)을 쓰지 는 않는다. 제관을 비롯한 나머지 참석자들이 모여 복장을 갖추고 나면 서낭당으로 가서 준비를 한다.
● 제의절차
도화동 서낭제는 저녁 9시가 되면 시작한다. 산신제를 지내면서 서낭제가 시작된다. 산신당은 따로 없으며, 서낭당 뒤편에 있는 오래된 소나무 앞이 제단이다. 산신제는 제관 혼자서 지내며, 우선 소나무 앞에 나무로 만든 신위를 꽂는다. 신위는 높ㅇ디 50cm, 지름 10cm 정도 되는 소나무의 윗부분을 깍아서 ‘토지지신(土地之神)’이라고 쓴 것이다. 이어 제물을 진설하는데, 북어포와 제주 한 잔만 사용한다. 산신제를 지낼 준비가 되면 제관은 제주를 한 잔 부은 다음 절을 두 번 한다. 제관이 산신제를 지내는 동안 나머지 참석자들은 서낭당에서 제물을 진설한다. 제물의 진설은 아래의 그림과 같이 한다.
제물을 진설하는 방식은 다른 지역과 크게 다르지 않은 편이다. 곧 제일 앞줄에 과일을 진설하고, 다음 줄에 육(肉)고기와 제주, 어탕을 진설한다. 여기서 흥미를 끄는 부분이 세 번째 줄에 있는 백설기 시루다. 백설기가 담겨 있는 시루의 주앙에 정화수가 든 주발을 올려놓는다. 이것은 서낭신이 백설기를 잡숫다가 목에 걸렸을 때 드실 물이라고 한다. 주발의 왼쪽에는 젓가락 한 쌍을 놓으며, 주발의 위쪽에는 통북어를 한 마리 놓는다. 통북어는 머리가 동쪽을 향하고 있다.
제관의 산신제를 마치고, 서낭당에서 제물 진설이 끝나면 서낭제를 지내게 된다. 제일 먼저 하는 의식은 축관의 ‘부정풀이’다. 부정풀이는 모두 두 번 하는데, 커다란 그릇과 정화수 그리고 숯을 사용한다. 첫 번째는 ‘흐린부정풀이’로 정화수가 담긴 그릇 속에 작은 숯을 몇 개 넣고 신위 앞으로 간다. 그런 다음 그릇을 좌우로 흔들며 흐린부정풀이를 하는데, 특별히 정해진 형식이나 내용은 없다.
흐린부정풀이가 끝나면 그릇을 서낭당 밖으로 가지고 나와 정화수와 숯을 멀리 버린다. 이어서 두 번째 부정풀이를 하는데, 이때는 정화수만 사용한다. 흐린부정풀이를 하면서 숱을 사용해 안 좋은 기운을 정화시켰지만, 혹시 남아 있을지 모르는 부정을 정화수를 사용해서 다시 한 번 씻어 내고자 함이다. 이를 ‘맑은부정풀이’ 라고 한다. 맑은 부정풀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부정풀이가 모두 끝나면 제관이 잔을 올리고 향을 사르며 강신(降神)을 한다. 이어 두 번 절을 한다. 제관이 절을 하고 나면 축관이 서낭신에게 고축(告祝)을 한다. 고축이란 축문(祝文)을 읽는 것으로서 축관이 고축을 하는 동안 모든 참석자는 엎드려서 경건한 마음으로 듣는다. 축관이 고축을 끝내면 제관은 퇴주를 하고, 모든 참석자들이 절을 두 번 한다. 고축이 끝나면 제관과 축관을 중심으로 소지(燒砥)를 태운다. 제관과 축관은 소지를 태우며 축원(祝願)을 하고, 나머지 두 사람은 소지를 말아 주면서 마을에 거주하는 주민의 이름을 호명해 준다. 다른데서 이사 온 사람과 손님의 소지도 올려 준다.
소지는 위에서부터 불을 붙여 불길이 점점 아래로 내려올 때 위로 솟구쳐 날려 보낸다. 불길이 손바닥 근처에 이르러도 많이 뜨겁지 않다고 한다. 손바닥에 조금 불기운이 느껴질 때 위로 날려 보낸다. 모든 소지가 다 잘 올라가기를 바라지만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을 때도 있다. 곧 소지에는 서낭신의 영험이 반영되어 있으며, 소지가 잘 타는가 안 타는가의 여부를 가지고 한 해 동안의 길흉을 점치는 것이다. 도화동 서낭제에서 올리는 소지의 종류는 크게 세 가지다. 먼저 도화동을 구성하는 40여 가구의 개인 소지를 올려주고, 이어 도화동 전체의 대동소지를 올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을에 있는 가축의 소지(우마 소지)를 올린다. 개인소지는 소지를 올리는 대상의 사정에 맞게 올리는 데 주로 풍년을 기원하거나 가족이 건강하게 해 달라는 것과 농사일이 잘되기를 기원하는 내용이다. 우마소지는 마을에서 사육하는 소와 염소 등의 가축이 질병에 걸리지 않고, 잘 자라서 새끼를 많이 낳게 해 달라는 내용이다.
제관과 축관이 소지를 모두 올린 후 다음 절차는 축관이 축문을 태우며 축원을 하는 것이다. 이때는 도화동 자체와 마을주민, 가축에 대한 모든 기원이 포함된다. 다시 말해서 축문에 써 있는 내용을 간략하게 풀어가면서 축원을 하는 것이다. 축관의 축원이 끝나면 제의 참석자 모두 절을 두 번 한 다음 축관이 퇴주를 하고 뒤로 물러난다. 이어서 제관이 제주를 한 잔 올리고 서낭제의 마무리라고 할 수 있는 축원을 한다.
축원을 마친 제관이 두 번 절하고 물러서면 서낭제는 끝이 난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하는 일이 남아 있는데, 이는 서낭제와 별개의 절차다. 이를 ‘잡신밥[雜神밥] 드리기’라고 하며, 제관이 진행한다. 잡신밥은 말 그대로 서낭신을 따라 왔던 잡신을 대접하기 위한 제물이다. 서낭제를 지내며 썼던 제물을 조금씩 덜어 사용한다. 백설기 세 덩어리, 소고기 세 첨, 밤 한 개, 대추 한 개, 곶감 한 개, 사과와 배를 칼로 조금씩 베어 한지(韓紙)로 싼다. 잡신밥은 신목으로 여기는 소나무의 좌측에 가져다 놓는다. 특별히 제주를 따르거나 절을 하지는 않는다.
잡신밥 드리기가 끝나면 백설기시루 위에 놀려 놓았던 정화수를 제의 참석자들이 한 모금씩 나누어 먹는다. 이 물을 마시면 재수가 좋고 복을 많이 받는다고 한다. 특히 무서움을 많이 타는 사람이 마시면 두려움이 없어진다고 믿는다. 서낭제 참석자들의 음복이 모두 끝나면 나머지 마을 주민들도 남은 제물을 가지고 음복을 한다. 진설했던 제물이 넉넉하지 않지만 조금씩 나누어서 마을 주민 모두가 먹는다. 서낭신이 드시고 남은 음식이므로 먹으면 복을 받는다는 믿음이 있다.
● 축문(祝文)
도화동에는 오래 전부터 전해오는 『축문집(祝文集)』 이 있다. 현재 이규택씨가 보관하고 있으며, 붓으로 쓴 필사본이다. 이 책에는 상례(喪禮)에서 사용하는 축문을 비롯항 서낭제 때 사용하는 축문까지 모두 기록되어 있다. 언제부터 전해오는 책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익택씨가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았다고 한다. 도화동에는 축문이 필요할 때 이 책을 보고 쓴다. 다음은 2005년 도화동 서낭제의 축문을 옮겨 적은 것이다.
● 영험담
도화동에서는 신목, 서낭당, 신선제, 서낭제와 관련하여 전하는 영험담이 없다. 서낭당을 훼손한 사람이 동티가 났다는 사례도 없고, 특별히 효혐을 봤다는 사례도 없다. 이와 관련하여 마을주민들은 한국 전쟁이 일어났을 때만 서낭제를 지내지 못하고, 이후로는 계속 맥을 이어왔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특히 서낭제를 못 지내게 하던 시절(1970년대)에도 도화동에서는 서낭제를 꼭 지냈다는 자부심이 있다.
● 동제의 운영과 결산
도화동에서 서낭제를 한 번 지내는데 드는 비용은 약 10만원이다. 그리고 이 비용은 마을 논에서 나오는 도조(賭租)로 충당한다. 서낭제를 지내고 나서 경비 지출에 대한 결산은 곧바로 하지 않는다. 그리고 서낭계에서 결산을 하지 않고, 마을 대동계를 할 때 함께 결산한다. 대동계는 음력 10월 25일로 정해져있다. 이때 앞으로 지낼 서낭제(음력 11월3일) 경비와 앞서 지낸 서낭제(음력 1월 14일)의 경비를 함께 결산한다. 다만 서낭제를 지낸 이튿날 주민들이 모두 마을회관에 모여 잔치를 한다. 말하자면 서낭제 뒤풀이인 셈이다. 이때는 돼지를 한 마리 사서 잡아가지고 삶아 먹는다. 떡은 직접 만들지 않고 방앗간에 주문을 해서 사용하는데, 2005년에는 호박 시루떡과 도토리시루떡을 장만했다. 그리고 국은 동태와 두부를 넣고 끓였다.
● 동제의 특징
도화동 서낭제는 제천지역 동제의 고형(古型)을 간직하고 있으며, 수목신앙(樹木信仰)도 아울러 보여주고 있다. 도화동(桃花洞)에는 마을 제당(祭堂) 한 개와 산신(山神)으로 여기는 신목이[老松]이 한 그루 있다. 마을 제당은 ‘서낭당’이라 부르며, 시멘트로 된 벽에 기와를 얹었다. 내부에는 제물을 진설하는 제단이 있고, 중앙에 신위가 모셔져 있다. 신목은 서낭당 옆에 서있는 오래된 소나무다. 도화동에서는 서낭제를 봄(음력 1월 14일)과 가을(음력 11월 3일)에 두 번 지낸다.
서낭제를 지내기 위해 제관, 축관, 도가집, 소지담당(2명)을 선정한다. 서낭제를 지내기 위해 준비하는 제수는 제물과 축문(祝文), 의관(衣冠)이다. 서낭제에서 제일 먼저 하는 의식은 축관의 ‘부정풀이’로 모두 두 번 한다. 부정풀이가 모두 끝나면 제관이 잔을 올리고 향을 사르며 강신(降神)을 하여 서낭제를 지낸다. 그리고 ‘잡신밥[雜神飯]드리기’라고 하여, 잡신을 대접 하는 제의가 수반된다. 서낭제를 지낸 이튿날 주민들이 모두 마을회관에 모여 잔치를 한다. 말하자면 서낭제 뒤풀이인 셈이다. 마을회관에 주민들이 모이면 장만한 음식을 나눠 먹다가 윷놀이를 한다.
◎도화리 역사인물
● 박전(朴瀍)
본관은 밀양이며, 자는 정숙(靜淑)이다.
⦁이공기(李公沂)
본관은 한산(韓山)으로 목은 이색의 6세손이며, 문열공 이계전의 현손이다. 선조 때의 내의(內醫)오서 특히 침구(針灸)에 능하여 임금을 비롯하여 대관(大官)의 치료에 공이 많았다. 1586년(선조19) 왕비의 인후증(咽喉症)을 치료한 공으로 내의로서 동반(東班)의 직을 제수 받았고, 이듬해 허준(許浚)과 함께 임금의 병을 치료한 공으로 상을 받았다. 임진왜란 당시인 1593년(선조26)에는침술에 능했기 때문에 원병으로 온 명나라 부상병의 치료를 담당하였으며, 1595년에는 호군(護軍)으로서 동궁(東宮)을 배종(陪從)한 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1604(선조37) 임진왜란 때 의주 파천 싱데 임금을 호송한 공으로 호성공신(扈聖功臣) 3등에 책록되고 한계군(韓溪君 )에 봉해졌다. 후에 한성판윤(漢城判尹)에 증직되었고, 1644년에는 아들인 한풍군(韓豊君) 이영남(李永男)의 품계에 따라 판돈령부사겸오이도총부도총관에 추증되었다.
조선시대 과거 합격자들을 기록한 『사마방목』 에는 그의 친⦁외가에 대한 내용이 전혀 존재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취재’(取才)에 의해 어의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어의로서의 이공기 활동을 대략 3시기로 구분되고 있다. 첫째 선조의 이명증(耳鳴症) 치료, 둘 때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사 치료, 셋째 임진왜란 피난길의 선조 호종 등으로 나뉜다.
상이 별전(別殿)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왕세자가 입시하고. ⦁⦁⦁ 허준 ⦁ 이공기 등이 입시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왼쪽 귀가 심하게 울리고 들리지도 않으므로, 침을 맞지 않으면 낫지 않을 듯하여 이렇게 하는 것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전에 머리가 아프지 않은 날이 없었는데, 지난 가을에 침을 맞은 뒤부터 아픈 증세는 덜한 듯하나 귀울림은 여전하다” 하고, “왼쪽 무릎도 시고 아파서 잘 걷지 못하므로 침을 맞아 맥을 트려고 한다” 하였다.
허준 ⦁ 이공기와 침의 5명이 입시하였다. 응남(도제조 김응남 지칭)이 아뢰기를, “신들이 여러 의관과 밖에서 상의한 바에 의하면, 요사이 날씨가 더워지고 있어서 침을 맞기에 온당치 못하다고 하여 아랫사람들의 의견이 모두 놓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의 생각은 기어코 맞고 싶다.” 하였다.
- 『선조실록』
인용문에는 허준과 함께 이공기의 이름이 빠짐없이 등장하고 있다. 왜군이 북상하자 선조는 비가 질척이는 칠흑같은 밤에 한양 도성을 버리고 북으로의 피난길에 올랐다. 이때 이공기도 호종했다. 호종은 임금을 호위하며 따르는 것을 일컫는다. 그는 그 공으로 ‘호성공심’ 3등에 올랐고 적지 않은 부도 얻게 된다.
(이공기 등을) 3등에 책훈하고, 모습을 그려 후세에 전하며, 품계와 관작을 한 자급 초천한다. ⦁⦁⦁ 이에 반당 4인, 노비 7구, 구사 2명, 전지 60결, 은자 5냥, 내구마 1필을 하사한다.
- 『선조실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