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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문화원 마을기행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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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제천의 지명과 행정구역의 변화 지역적 특성과 산물 등을 알려드립니다.

작성일 : 16-07-12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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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면] 승병들이 피난했던 마을 - 송계 3리(松界三里)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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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면 송계리는 월악산자락에 자리하고 있으며 행정구역상으로 4개리로 분할되어 있다. 충주댐 수몰로 인해서 황강리에 위치하고 있던 면사무소를 이곳 송계리로 이전하게 되었다. 송계리의 생활권은 행정상 제천시에 위치하고 있지만 실제 제천시와의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에 대부분 마을생활권은 충주에 속해있다.

송계 3리는 송계 2리와 마주하고 있는 마을이다. 현재 이 곳의 가구수는 53가구이지만 빈집을 제외하면 43가구이며, 총 3개반으로 형성되어 있다. 
 
1반이 벌평이며, 2·3반이 구여곡이다. 구여곡에서도 양지말이 2반, 음지말이 3반이다.(현재 거주하고 있는 가구수는 1반 15가구, 2반 15가구, 3반 13가구가 거주한다).
송계리는 한 마을이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처음으로 분할되었다. 또 다시 8·15광복이후에 2개리로 개편되었다. 그 후 1970년대 후반에 3개리로 되었다가 충주댐 수몰에 따른 행정구역 개편으로 총 4개리로 나누어지게 되어 현재에 이른다. 8·15광복 직후에 마을은 약 300호가 넘었으며, 한국전쟁전에 빨치산들의 출몰로 가절(가사리)과 창말에 있었던 집들이 소개령으로 모두 소실되었다.

월악산 산세가 험하여 예전부터 이 곳은 전쟁을 피할 수 있는 피난처로 외지사람들이 찾아들어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한다. 마을민의 제보에 의하면 임진왜란 당시에 5개성씨가 먼저 송계리(1-4리 전체)곳곳에 피난을 와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 마을을 개촌한 5성씨는 구·여·피· 전·성씨이다. 이들이 어디서 피난을 왔는지는 알 수 없다. 먼저 피씨는 '안의'라는 곳에 피난처를 삼았으며, 성씨는 '가절'이라 부르기도 하고 '가사리'라고도 부르는 곳에, 그리고 전씨는 '창말' 이라 부르는 곳에 피난처를 삼았다고 한다. 본 조사지 송계 3리에는 구씨와 여씨가 피난처로 삼았다고 한다. 송계 3리는 2개의 자연 마을로 형성되어있다. 구·여씨가 터를 처음 잡았다 하여 산과 접하고 있는 구여곡(구려골, 구레골)이 있으며, 구여곡아래로 벌평(벌뜰)이 있다. 이렇게 구여곡과 벌평으로 나뉘어져 있다. 벌평은 구여곡에서 거주했던 사람들이 임진왜란이 끝나고 나서 차츰차츰 산 아래로 내려와서 형성된 마을이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촌락 형성시기를 약400년 전쯤으로 소급할 수 있겠다. 1998년 현재 마을에는 석씨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 벌평에 거주하고 있는 석근태(65세)씨의 이야기에 따르면 11대조 할아버지께서 이곳에서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이것으로 보아 현재 거주성씨로 마을의 연대를 추적해보아도 약300년 이상이 된다.

송계리 전체를 '동창'(東倉)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 이유는 조선시대 송계리에 남한강 수로를 따라 한양(서울)으로 올라가는 곡물을 저장했던 창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송계로부터 약 14㎞정도 떨어진 곳에 서창(西倉)이 있었으며, 청풍면 북진리에 북창(北倉)이 있었다. 현재 창고는 남아 있지 않으며, 남한강변에 있었던 서창(한수면 서창리)과 북창(청풍면 북진리)은 충주댐 건설로 수몰된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 동창의 주된 목적은 군수품을 보관하는 창고였으며, 서창과 북창은 세금으로 걷어진 쌀을 보관하던 곳이다. 그래서 주위 마을에서도 연세가 많은 노인들은 송계리라고 부르기 보다 '동창'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한다. 동창을 12동창이라고도 불렀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마을이 크게 12마을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람들이 많이 살았던 곳으로는 몽청·안의·새터말·삼신당·가절·소따배기·창말·비집골(벼집골)·주막거리·재등지·벌뜰·구여곡,·사장리·골미·토현(흙벼루)이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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