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천의 역사와 전통을 알아 볼 수 있는 게시판 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제천의 지명과 행정구역의 변화 지역적 특성과 산물 등을 알려드립니다.
작성일 : 22-07-26 14:36
[봉양읍] 공전리(公田里)
글쓴이 :
문화원
(조회 : 2,943)
1. 공전리(公田里)
공전리는 봉양읍에 위치한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마을 앞으로 청풍호와 연결되는 남한강 상류가 흐르고, 뒤로는 박달재를 포함한 천등산이 있다. 본래 제천군 근좌면(近左面) 지역으로서, 국유의 놑밥이 있었으므로 ‘공전(公田)’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소시랑리(小侍郞里)와 장담리(長潭里)를 병합하여 공전리라 해서 1920년 봉양면에 편입되었다. 1980년 제천시 승격으로 인하여 제원군 봉양면 공전리가 되었다가, 1991년 1월 1일 제천시 봉양면이 되었다. 1995년 1월 1일 시군통합으로 봉양면이 읍으로 승격하면서 제천시 봉양읍 공전리가 되었다.
◎ 공전리 지명유래
⦁고서방소 : 장담 밑에 있는 소.
⦁공전리 동굴 : 공전리 동굴 입구는 퇴적이 많이 이루어져 정확한 규모를 파악하기 어렵다. 현재 동굴 1호는 너비 240cm, 높이 80cm이며, 동굴 2호는 너비 430cm, 높이 69cm이다. 입구는 남서쪽으로 향하여 있다. 동굴 앞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남서쪽으로는 주포천이 흐르고 있어 선사시대 사람들이 생활하였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공전역(公田驛) : 공전 북쪽에 있는 충북선의 기차역이다. 1959년 개통에 따라 세워졌다.
⦁구런뜰 : 만금잇들 앞 구렁에 있는 들.
⦁그란장터 : 공전리에 있는 장터. 고려 고종(高宗) 6년(1219) 때 고려에 침입하였다가 사로잡힌 몽고의 포로병들이 와서 살았다고 함.
⦁만금잇들 : 뱀고개 너머에 있는 들. 땅이 좋아서 농사가 잘 되므로 만금(萬金)의 가치가 있다 함.
⦁미륵당(彌勒堂) : 미륵당에는 미륵불이 아니라 문인석 2기가 있다. 왼쪽에 있는 것을 ‘할아버지 미륵’으로, 오른쪽에 있는 것을 ‘할머니 미륵’으로 부른다. 현재 천막으로 둘러 임시 보존하고 있다. 또한 그 옆에는 부처를 모셔 놓았다.
⦁뱀고개 : 원공전에서 공전역으로 가는 꾸불꾸불한 고개.
⦁사대동(寺垈洞) → 절텃골.
⦁소시랑리(小侍郞里) → 소시랑이.
⦁소시랑이[소시랑리] : 공전 서북쪽에 있는 마을. 시랑(侍郞) 벼슬을 한 소씨가 살았다고 함.
⦁식개[식포] : 장담 서쪽에 있는 마을, 임진왜란 때 군인들이 앞 냇물 가에서 식사를 하였다고 함.
⦁식포(食浦) → 식개.
⦁오얏골 : 원공전 서쪽에 있는 골짜기.
⦁우아정터(雨我亭-) : 원공전에 있는 우아정 터. 1878년 이석조(李錫兆)가 건립하여 ‘우아공전 수급아사(雨我公田 遂及我私)’라는 옛 글귀를 따서 ‘우아정’이라고 함.
⦁원공전(元公田) : 공전리의 원 이름.
⦁자당산(紫堂山) → 잔달미.
⦁잔달미[자당산] : 장담 앞에 있는 산.
⦁장담1(長潭) : 공전 남쪽에 있는 마을. 의암(의암) 유인석(유인석)이 갑오경장 이후 친일내각에 반대하여 의병장으로서 이곳에 의병 총본부를 두고, 제천, 충주 곳곳에서 항일 투쟁을 하였음.
⦁장담2(長潭) : 공전 동남쪽에 있는 긴 못.
⦁장자두기 : 식개 서쪽에 있는 골짜기. 백운면 애련리 장자더기 위가 됨.
⦁장판각(藏板閣) : 자양영당 내에 있으며, 화동강목 판목과 화서아언 판목을 보관하고 있음.
⦁재궁골 : 원공전의 동쪽에 있는 골짜기. 재궁이 있었음.
⦁절텃골[사대동] : 소시랑이 북쪽에 있는 마을. 서쪽에 공전사터가 있음.
⦁한티 : 백운면 애련리로 가는 고개 ‘한티’
◎ 공전리 문화유산
⦁자양영당(紫陽影堂)
1976년 12월 21일 충청북도기념물 제37호로 지정되었다. 1906년(고종43)에 세워 주자(朱子)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성재(省齋) 유중교(柳重敎), 의암(毅庵) 유인석(柳麟錫), 습재(習齋) 이직신(李直愼)의 영정을 모시고 춘추로 제향을 올리고 있다. 원래 이곳은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 유중교가 1889년(고종 26)에 세운 창주정사(창주정사)가 있던 자리다. 유중교의 본관은 고흥(高興), 자는 치정(致政), 호는 성재(省齋)이다. 5세 때 이항로의 문하에 들어가 경서에 몰두하였으며, 다시 김평묵(金平黙)에게 사사(師事)하였다. 1876년(고종 13) 선공감역(繕工監役)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1889년 춘천에서 제천시 봉양면 공전리로 이사하여, 후에 자양서사(紫陽書社)라고 이름을 고친 이곳에서 후학양성에 전념하였다.
이 자양서사는 1895년(고종 32), 의병장 유인석이 팔도의 유림들을 모아 창의(창의)의 비밀회의를 하던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건물의 구조는 목조와즙(木造瓦葺)으로, 전면 3칸, 측면 2칸의 툇마루가 있는 팔작(八作)집이다. 건물에는 자양영당(紫陽影堂), 자양서사(紫陽書社), 박약재(博約齋), 극복재(克服齋), 주일당(主一堂) 등의 현판이 있고, 의병 차의 100주년을 맞이한 1995년 이후부터 의병의 성지로 성역화 사업이 추진되면서 주변 정화사업이 완료되었다,
⦁화동강목판본(華東綱目板本)
1976년 12월 21일 충북유형문화재 제37호로 지정되었다. 자양영당 안에 소장되어 있는 판목으로 조선 후기 성리학자인 중암(重庵) 김평묵과 성재(省齋) 유증교가 광무 10년(1906)에 중국 송⦁원대의 사적(史籍)과 고려의 사적을 합하여 기록한 것이다. 삼강오륜(三綱五倫)에 대한 예의와 풍습을 백성들에게 계몽하기 위하여 편찬한 책의 판목이다. 이 판목의 크기는 가로 33cm, 세로 21cm, 두께 1.33cm이며, 판광(板匡)은 가로 30cm, 세로 19cm이고, 사주 단선 유계(四周, 單線, 有界)로서 반엽(半葉) 10행(行: 줄), 매행 19자가 각판되어 있다.
모두 3,300매 이었던 것이 현재 1,578매만 남아 있다.
이항로와 김평묵⦁유증교는 조선 말기의 저명한 성리학자로 외세 간섭기에 위정척사운동을 활발히 전개한 사람들이다. 이항로는 순조 때 과거에 급제하고, 고종 재위 시 장원서(掌苑署) 별제(別提), 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를 거쳐 공조참판의 벼슬을 하였다. 김평묵과 유중교는 조정에서 불러도 나가지 않고 은거하여 척양(斥洋)⦁척왜(斥倭)를 주창하며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화서아언판목(화서아언판목)
화서 이항로의 언설을 모은 것이다. 판심제는 아언이며, 판각은 양각이다. 범례(凡例), 목록(目錄), 사장(事裝), 본문(本文)의 순으로 되어 있다. 김평묵과 유중교 등이 스승인 이항로의 글 가운데 대례나 도와 관련된 견해와 여러 제자들이 정리한 어록 등을 모아 1876년 초고를 완성하였다. 그 후 교정을 거쳐 1874년 정본을 만든 다음, 같은 해 겨울 문인 충장공(忠莊公) 양헌수(梁憲洙)의 주도로 서울에서 판각에 들어가 1876년 봄 간행하였다. 현재 그 판목은 133매를 보관하고 있다.
⦁숭의사(崇義祀)
자양영당 성역화 사업의 일환으로 건립되었으며, 의암 유인석 선생을 비로한 제천의병의신위가 모셔져 있다. 제천의병제 고유제를 매년 가을 거행하고 있으며, 숭의사 현판은 제천 출신 노촌 이구영(老村 李九榮) 선생의 글씨다.
⦁제천의병기념탑
2001년 11월 19일 자양영당 성역화 사업의 일환으로 건립되었으며, 디자인과 설계, 그리고 조각은 제철출신인 상명대학교 김종호 교수가 하였다.
⦁제천의병전시관
제천의병이 창의한 지 100주년이 되는 1995년, 의병정신을 계승하고 국난극복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제천시에서는 자양영당 성역화 사업을 시행키로 하여 5,600평의 부지 위에 1996년부터 2001년까지 6년에 걸쳐 영당보수, 의병사당인 숭의사 신축, 의병전시관 및 기념탑 건립 등 순사업비 53억원, 연계도로망 구축 32억 원 등 총 85억 원을 투입, 창의 106주년 제천의병제 기간 중인 2001년 10월 12일 개관하였다. 현재 전시관에는 의병 후손들로부터 기증받은 3,00여 점의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제천의병전시관 내부에는 제천의병사연표과 개관, 구국을 위한 모임, 제천의병의 출범과 활약, 남산전투디오라마, 위정척사사상과 제천의병, 제천의병의 활약도, 제천의병의 시련, 제천의병의 서행과 새로운 모습, 폐허가 된 제천, 구국을 위한 의병전쟁, 제천의병과 운동, 의병에서 독립군으로 등이 전시되고 있다.
제천창의의병 기념탑
제천의병 창의지 자양영당에 건립한 제천의병기념탑은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여 구국의 일념으로 목숨을 바친 제천의병의 숭고한 의병정신을 기리고 오늘날의 시민정신으로 승화시켜 정신교육의 도장으로 삼고자 건리하였다.
기념탑은 제천의병이 한말 의병항쟁의 상징적 존재임을 뜻한다. 전체 구조는 주탑과 주변구조물 그리고 3개의 인물조각으로 구성하였다. 중앙의 주탑은 의병이념을 상징하고 좌우에는 그 당시의 민중운동을 생생하게 묘사한 조각으로 의병정신과 의병항쟁을 표현하였다. 주탑 주변의 5개의 석조물은 청풍명월 제천의 산과 계곡, 분지 등의 험준한 지형을 나타내어 의병 활동의 역경과 감격적인 장면을 암시적으로 표현하였다. 곧게 솟은 주탑의 수직 상승감은 진취적인 의를 위한 의병의 항거정신을 뜻하고, 윗부분의 깨어진 흔적은 인간의 내면에 숨겨진 불굴의 저항정신과 자유를 표상하였으며, 아랫부분의 부조는 8도 의병과 제천의병의 활동모습을 서사적으로 표현하여 항일투쟁의 기본정신을 나타내었다. 탑 우측의 2인 조각상은 의병의 주체인 유생과 농민을 형상화하여 민족의식과 투쟁의욕을 나타내는 의병정신을 상징한다. 좌측의 3인상은 당시 굴욕하지 않는 의병항쟁의 실제상황을 생생하게 형상화하여 역사성을 일깨우게 하였다.
⦁솟대
공전리 솟대는 동서로 200m 간격으로 2대가 서 있다. 2개 모두 돌무더기를 쌓아 두었는데, 특히 서쪽의 것에는 시멘트로 제단을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양쪽 모두 신주를 매달아 놓고 있다. 솟대 위에는 흔히 새(오리) 모양을 만들어 다는 것이 일반적이나, 여기는 약식화 하여 ‘ㄱ’잔 모양의 나무를 다듬어 2개씩 달아 놓았다.
⦁공전사지(公田寺址)
공전사(公田寺)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박달산(朴達山)에 있다.”라고 하였으며, 『제천현지』에는 “박달산에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공전사지로 추정되는 지역은 현재 개간되어 경작지로 사용되고 있거나 민가가 들어서고, 뒤편으로는 수풀이 우거진 산비탈이어서 정확한 사역을 파악할 수 없다. 조선시대 것으로 보이는 소량의 기와편이 수습되었다. 마을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예전에는 경작지에서 건물 부재로 보이는 석제와 기와편, 자기편들이 산재되어 있었으며, 오래전부터 ‘절터’라고 구전되어 왔다고 한다. 한편 절터 골 마을의 서쪽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약 400m 가다보면 속칭 ‘미륵당(彌勒堂)’이라고 불리는 곳에 이르는데, 이 곳에 문인석 2기가 있다. 이 문인석은 현재 마을사람들에 의해 ‘미륵불(彌勒佛)’로 추앙되어 모셔지고 있다.
⦁공전리 보호수
제천시 보호수 3호로 1983년 11월 16일에 지정한 느티나무다. 수령은 약 250년 정도 되었고, 나무의 높이는 16m이고, 둘레는 1.3m이다. 현재 마을의 쉼터로 조성되어 있으며, 그 옆에는 연자방아가 세워져 있다. 공전리에는 보호수로 지정된 느티나무 외에도 수령이 300여 년 가까이 된 소나무가 두 그루 있다.
⦁공전역(公田驛)
충북선에 속한 기차역으로 삼탄역과 봉양역 사이에 있다. 1959년 1월 1일 보통역으로 영업을 시작하였다. 2008년까지 무궁화호가 운행하였으며, 여객, 승차권발매 등의 업무를 담당하였다. 그러다 2008년 1월 1일 여객의 감소로 정차열차가 왕복 3회에서 1회로 축소하였고, 2008년 6월 1일 역무원이 철수하였으며, 2008년 12월 1일 여객 취급을 중지하였다.
◎ 공전리 이야기
⦁공전사(公田寺)의 유래 ①
봉양읍 공전리에는 공전사가 있었으나, 지금은 삼층석탑과 미륵불만 남아있고 암자 하나가 옛날 사찰의 명맥을 이어주고 있다. 이곳을 ‘공전사’ 또는 ‘절터골’이라고 부른다. 옛날 공전사가 성하였을 무렵에는 인근에서 많은 신도들이 불공을 드리러 찾아왔다. 그런데 불공을 드리는 신도가 양반이면 대웅전 천정에서 명주실에 쌀이 매달려 내려오고, 상민이면 조카 명주실에 매달려 내려왔다고 한다. 이 소문을 들은 상민 한 사람이 정말로 그러한가를 시험해 보고 싶었다. 하루는 양반차림으로 가장한 다음 대웅전에 들어가 불공을 드렸더니 명주실에 매달려 내려오는 것이 쌀이 아니라 조였다. 놀라기도 하였으나 화가 치밀어 오른 상민은 명주실을 끊어버리고 밖으로 뛰쳐나와 절을 마구 부수어 버렸다.
이런 행패가 있은 다음 스님들은 절을 다른 산으로 옮겨가려 하였으나, 노한 부처님이 바닥에 딱 들어붙게 해 옮겨지지 않아 결국은 옮겨가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 후부터 신도들이 찾는 수효가 줄더니 마침내 폐사되고 말았다고 한다.
⦁공전사(公田寺)의 유래 ②
옛날에 공전사에는 도승(道僧)이 살고 있었다. 이곳은 첩첩산중으로 인가도 별로 없는 곳이었다. 절을 찾아오는 사람들 중에는 부처님께 예불(禮佛)을 하러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고, 절에 와서 하는 일 없이 무위도식(無爲徒食)하는 사람이 있어서 늘 골치를 앓았다. 도승이 하루는 오는 사람들을 선악(善惡)으로 구분하는 법을 생각하였다. 그렇다고 오는 사람을 무조건 돌아가라고 할 수도 없고 하여 궁리를 하다가 부처님의 신통력을 차용하여 절에 오는 사람 중 착한 사람이 오면 하늘에서 쌀가루를 내려오게 하고, 좋지 못한 사람이 오면 좁쌀이나 피쌀 등 잡곡이 든 자루를 내려오게 하였다. 이후부터 이 곡식자루가 기준이 되어 선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판별하여 구분하게 되니 편리하게 되었다.
이러한 소문이 절에서 보고 들은 승려들 입을 통해서 널리 퍼졌다. 이와 같이 선악이 분명하니 악한 자는 발을 붙일 수가 없었다. 간혹 악한 자가 오면 잡곡자루가 알려주니 스님은 곧 알게 되어 그에 대한 방안을 만들게 되고, 사고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어 스님들은 도승을 생불(生佛)로 받들고 지냈다. 도승 외에 다른 스님들은 쌀 걱정도 없고 신통한 생불 스님이 계시니 공전사에 오면 돌아가지를 않았다. 일 아니하고 놀고도 쌀은 자루에서 매일 충당해 주니 걱정이 없었다. 사세(寺勢)는 날로 번성하고 스님은 그 수가 늘어났다.
하루는 도승이 생각하였다. 처음 산골에 오는 사람의 선악을 구별하는 방법으로 사용한 쌀과 잡곡자루가 놀고먹는 자루로 변질하였으니 이러한 것은 바로잡아야 하겠다고 생각하였다. 도승은 승녀들을 모아 놓고 “공전사에 와서 수도(修道)들은 아니하고 허송세월만 보내니 지금 곧 자기의 갈 길을 정하고 다들 떠나시오”라고 말을 하였다. 물론 도술을 부리지 않으니 절에 먹을 것이 없었다. 승려들은 배가 고프니 삼삼오오 짝을 지어 다른 곳으로 떠나갔다. 이후부터는 승려가 아니라 일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도승의 신통력을 멀리서 듣고 사람들이 찾아왔다. 그래서 다시 도술로 쌀자루를 가져오게 했다.
그러던 중 제천현감이 이 소문을 듣고 공진사를 찾았다. 현감 속셈은 속세를 현혹하는 괴승(怪僧)으로 보고 이를 문책할 생각이었다. 물론 도승이니까 이런 일은 모를 리 없었다. 현감을 후하게 대접하고 소문은 어디까지나 소문이라고 말하여 돌려보냈다. 공전사에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오니 사세는 넉넉하여졌다. 제천현감이 재물 생각이 나서 공전사를 잘 보호하는 척하고 스님이 바치는 뇌물을 슬그머니 받았다. 이것에 재미 붙인 원님과 아전들의 발길이 잦아졌다. 도승이 다시 생각하였다. “쌀자루 때문에 이 꼴이 되니 아니 되겠다.”라고 혼잣말을 하고사 실 한 가닥을 공중으로 던져서 부처님 옆에 동여매고 당초대로 선악만 알아보게 하였다 선하고 절에 유익한 사람이 올 때면 쌀알이 이 실을 타고 두세 알씩 내려오게 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오면 좁쌀이나 피쌀 두세 알이 실을 타고 내려오게 도술을 부렸다. 절 안에 있는 스님들에게는 ‘일일불작(一日不作)이면 일일불식(一日不食)’이라는 말을 가르치고 강조하니 놀고 먹는 사람이 없어졌다.
쌀자루 소문은 사실로 바뀌었다. 모두 일하고 먹는 사람들로 만들었다. 이것에 불만을 품은 사람은 제천현감과 아전들이었다. 뇌물을 공전사로부터 바라고 있는데 전혀 가지고 오지 않는다고 제천현감이 생각하였다. “공전사 도승은 도술을 많이 부려 쌀자루를 백 개, 천 개 내려오게 하면 저도 잘 먹고 나도 잘 살터인데, 고얀 놈의 중이로다. 내가 가서 이놈을 잡아오리라.”하고 직접 공전사로 달려갔다. 절에 가서 보니 도승은 입적(入寂)한 지 수일이 지났다. 법당에 들어서니 실에서 피쌀 세 알이 똑똑 떨어졌다. “내가 이곳 원으로 생사지권(生死之權)을 가지고 있는 것을 모르느냐! 이놈의 시룰이 다 무엇이냐 고을의 원도 모르는 것이!”라고 하면서 그 실을 잡아채니 실이 끊어졌다. 그 후부터는 선아을 식별하는 실마저 없어졌다고 한다.
⦁미륵당(彌勒堂)의 유래
미륵당은 미륵불이 아니라 문인석 2개다. 왼쪽에 있는 것을 ‘할아버지 미륵’으로 오른쪽에 있는 것을 ‘할머니 미륵’으로 부른다. 현재 천막으로 둘러 임시보존하고 있다. 또한 그 옆에는 부처를 모셔 놓았다. 예전에 어느 한 장수가 두 개의 미륵을 들고 가다가 칡넝쿨에 걸려 넘어져 “에라 이건 니 자리다!”하면서 넘어진 곳에 세워 놓았다고 한다. 또한 백운에 사는 사람이 미륵당에 빌어서 아들을 낳았다는 이야기도 전하고 있다. 마을에서 공동으로 제사를 지내지는 않지만, 4월 초파일에 각처에서 사람들이 모여 제사를 지낸다. 현재는 일부 마을 사람들과 무속인들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
⦁그란장의 유래
고려 고종 3년에 거란군이 박달재 부근으로 침공해 왔다. 김취려(金就礪) 장군은 험준한 박달재의 지리를 잘 이용하여 크게 승리하였다. 깊은 골짜기는 거란군의 시체로 가득 찼으며, 피는 계곡물을 물들였다. 살아남은 거란군은 북쪽으로 도망을 쳤는데, 미처 도망가지 못한 거란군은 포로가 되었다. 포로가 된 거란군은 밭을 일구고, 논을 만들어 곡식을 거두었다. 그리고 그곳에 정착하여 살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곳을 거란사람이 살던 곳이라고 해서 ‘그린장’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공전리 마을신앙 - 공전1리 서낭제
공전리의 서낭제는 ‘진대’라고 불리는 솟대를 향해 지내는데, 당집은 별도로 존재하지 않지만, 이 마을 진대문화는 600여년이나 되었다고 전해질만큼 오랜 세월 동안 잘 유지되고 있다. 제천시에서도 현재 단 두 곳에만 남아있는 공진리의 솟대는 기존의 오리형태라기보다는 기억자 모양으로 학을 단순화한 모습이 특징이다. 큰서낭과 작은서낭 두 개의 진대는 길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며 위치하고 있다. 마을에 재앙이나 화가 없기를 기원하는 공전리의 진대는 지금까지 자연신앙을 잘 간직하고 있다.
⦁제당의 명칭과 형태
공전1리에서는 두 마리의 나무새를 깎아 올린 솟대 앞에서 마을제사를 지낸다. 이 마을에서 솟대 위에 있는 새를 구체적으로 인식하고 있지는 않지만, ‘학’이라 여기며, 솟대를 ‘진대’라고도 부른다. 진대가 처음 세워진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마을에 전해지기로는 세워진 지 600년 정도 되었다고 한다. 진대 이외에 별도의 서낭당은 없으며, 마을에서는 진대를 ‘서낭’이라고도 부른다.
진대는 두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동서로 200m 간격으로 서 있고, 2개 다 돌무더기를 쌓아 두었는데, 특히 서쪽의 것에는 시멘트로 제단을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양쪽 모두 신주를 매달아 놓고 있다. 솟대 위에는 흔히 새 모양을 만들어 올리는 것이 일반적이나, 이 마을에서는 약식화하여 ‘ㄱ’자 모양의 나무를 다듬어 2개씩 올려놓았다. 마을사람들은 바깥쪽에 위치한 진대를 ‘큰서낭’, 마을 안쪽에 위치한 진대를 ‘작은서낭’이라고 한다. 두 진대는 서로 마주보며 위치하고 있는데, 큰서낭은 아주 오래전부터 같은 자리에 위치해 있었고, 작은서낭은 본래 현 위치에서 100m정도 안쪽에 있었다. 그런데 경지 정리 하느라 위치를 옮기게 되었다. 진대를 이전할 당시 “경지정리를 하게 돼서 불가피하게 옮겨야 되니까 놀라지 마십시오.”라는 의미에서 축문을 따로 지어서 제사를 지내고 난 뒤 이전하였다.
조사자 : 진대는 계속 저 자리에 있었던 거예요
최민영 : 어- 그거는 저기 저 큰 서낭님은 하이튼 저기는 옮긴 유래가 없구, 여기(작은서낭)은 경지정리 하느라구 옮겼어요.
조사자 : 그러면 원래 어디에 있었습니까?
최민영 : 여 작은 서낭님은 지금 현 위치에서 한 어 백메다 백오십메다 들어와서 있었어요. 고기서 똑바로 안으로 들어와서. 저 지금 저 논바닥에 들깻집 저 이렇게 수북수북 쌓인데 이 뒤루... 거기 있었지
조사자 : 저걸 옮길 때 따로 또 제사를 지냈나요?
최민영 : 어우 따로 따루 했지 저기 놀래시지 말구 이렇게 경지정리를 하게 돼서 불가피하게 옮겨야 되니까 놀라지 마시라구 고축을 따로 지가지구서 그래 옮겼지.
진대는 망가질 경우에 교체하는데 지금 세워져 있는 진대가 4년 전에 만든 것이다. 현재 새 한 마리가 떨어져 있는 상태여서 나머지 한쪽마저 떨어지게 되면 교체할 예정이라고 한다. 솟대를 바꿀 때는 제사를 지내는 초엿샛날 낮에 만들어서 세운다. 미리 좋은 나무를 봐두었다가 ‘육송’만 이용해서 만드는데, 따로 제작하는 사람은 없고 마을 주민 여러 명이 다 같이 협력해서 만든다.
조사자 : 진대가 썩게 되면 바꾸셔야 되지 않습니까?
최민영 : 바꾸지. 아이 저저 대 하나마저 부러지면 바꿔야지.(웃음)
조사자 : 바꾸실 때는 어떻게 바꾸세요?
최민영 : 그 때는 인제 그 초엿새날 낮에……. 밤에 제사를 지냈으니까 낮에 그걸 전부다 해다가 세워요.
조사자 : 낮에 나무는 어디 가서 해다 세웁니까?
최민영 : 그 뭐 소나무 육송이지. 딴 나무는 안 썼어요. 뭐 어디 좀 좋은 거 봐 논 사람이 어디 줌 좋은 거 있다 하믄 거 가서 베 오지.
조사자 : 그것만 따로 만드시는 분이 계세요?
최민영 : 아이 그냥 여럿이 보구서 그냥 뚝따거리 맨들지. 같이 다같이 협력해서 …….
진대에 제사를 지내는 것을 ‘서낭제’라고 한다. 예전에는 정초에 날을 잡고, 생기복덕을 봐서 제관과 축관, 공양주를 선정하여 지냈다. 그러나 30여 년 전부터는 제사를 지내는 날을 매년 정월 초엿샛날 저녁으로 정해 놓고 지낸다.
⦁제관(제관) 선정
예전에는 서낭제 때 제관 1명과 공양주를 맡은 사람 1명이 함께 가서 지냈는데, 지금은 젊은 사람들이 함께 협조를 한다. 이 때 협조를 하는 사람의 경우 부정이 없는 사람으로 선별한다. 제관은 정초에 날을 받아 제사를 지냈던 30년 전에는 반에 상관없이 그 해에 맞는 사람을 선정해서 지냈는데, 지금은 반별로 돌아가면서 하기 때문에 해당 반에서 선정한다. 이 때 부정이 없는 사람으로 선정한다. 제사음식을 준비하는 집을 ‘공양주’라고 하는데 공양주도 함께 선정한다. 제관은 마을 사람들을 대표해 서낭신께 제를 올려야 하므로 제관으로 산출되면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며 금기를 지킨다.
⦁제비(祭費)와 제물(祭物)
서낭제를 지내는 데 드는 비용은 마을의 대동계에서 충당한다. 예전에는 서낭제를 위한 별도의 계가 따로 운영되었으나, 30년 전부터는 마을의 전체 기금과 합해서 사용하고 있다. 보통 순수 서낭제를 위한 제사 비용은 한 번에 10여만 원 정도 드는데, 제사 후 마을 주민들이 모여 음식을 먹기 때문에 총 45만 원 정도 소요된다. 제물은 공양주 집에서 준비를 한다. 직접 시내에 나가 깨끗한 것으로 장을 봐서 정성스레 장만한다. 제물로는 백설기와 삶은 돼지머리, 세 가지 나물(고사리, 무, 도라지)을 물 없이 준비하고, 밤과 대추, 배, 약주를 쓴다. 약주는 집에서 담그지 않고 사다가 쓴다.
⦁제수(祭需) 준비
서낭제 날짜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보통 제사 3일 전 이른 아침 공양주집에 금줄을 만들어 치고, 외부인의 출입을 금하기 위해 집 주변에 황토를 뿌린다. 예전에는 진대 주변에도 금줄을 쳤다. 진대 주변에 나무가 있는 큰서낭에만 나무와 나무사이에 금줄을 쳤으나, 현재는 진대 주변에 금줄을 묶을 만한 곳이 마땅하지가 않아 금줄을 두르지 않는다. 제관을 담당하는 사람의 경우 특별한 복식 없이 자기 옷을 깨끗하게 빨아 입고, 정성을 들였다. 그러나 7⦁8년 전 제복을 따로 장만하여 제관, 공양주, 축관은 제복을 입고 서낭제를 지낸다. 온마을 사람들의 정성을 모아 지내기 때문에 초상집에 다녀 온 사람이나 기타 부정한 일을 한 사람들은 스스로 제사에 참여하지 않는다.
⦁제의절차
서낭제는 매년 정월 초엿샛날 저녁에 지내는데, 당집은 따로 없으며 진대 앞에 상을 차려 놓고 제사를 지낸다. 예전에는 제사 지낼 때 제관이 단잔을 올렸으나, 공양주를 맡은 사람도 음식만 장만하고 절도 한번 안하는 것이 서운하다고 하여 20여 년 전부터는 술을 석 잔을 올린다. 단잔을 올렸을 때는 한 잔 올리고 그대로 축을 읽은 후 절을 했는데, 현재는 제관이 잔을 올리고, 향을 피운 후 이어 절을 두 번 한다. 제관이 절을 k고 나서 다시 잔을 올리고 고축(告祝)을 하고, 고축이 끝내면 제관은 퇴주를 하고, 모든 참석자들이 절을 두 번 한다.
그리고 소지를 올리는데, 먼저 서낭님 소지를 석 장 올리고, 그 다음 대동소지를 올린다. 대동소지를 올리고 나서는 제사에 참석한 사람들이 마을 이장에서부터 제사를 주관한 제관과 공양주를 맡은 사람, 축관 이렇게 소지를 올린다. 그 다음 집집마다 세대주 한 명씩 소지를 올려준다. 우마육축(牛馬六畜)이 잘 되라고 고축을 하지만, 우마소지는 별도로 올리지는 않는다. 진대에는 실과 북어를 놓고 절을 하고 난 뒤 북어 몸은 사람이 먹고, 북어 머리와 떡, 밤, 대추를 문종이와 실로 진대에 감아둔다. 서낭제를 마치면 다음날 마을회관에 사람들이 모여 제를 지낸 음식과 따로 준비한 음식을 함께 나눠 먹는다.
⦁축문(祝文)
서낭제 축문은 예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형식을 그대로 사용한다. 보통 제관이 독축을 담당한다.
⦁영험담
진대와 관련한 영험담은 없지만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예전에는 진대에 매달아 놓은 실타래 속에 들어 있는 떡과 밤을 꺼내먹기도 했는데 이때는 반드시 “먹겠습니다.”하고 절을 한 다음 먹으면 아무 탈이 없느데, 그냥 훔쳐 먹으면 벌을 받았다고 한다.
◎ 공전리 역사인물
⦁박여성(朴汝成, 1860-1908)
1907년 평양진위대가 해산당한 후 청풍으로 내려와 조동교, 황대성, 방필성 등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고 의병장으로 추대대어 활동하였다. 1907년 8월 15일 휘하 의병을 지휘하여 일군과 약 4시간 동안 치열한 격전을 벌인 끝에 승리하엿고 또 야간 포위공격을 가하여 이들을 끝내 충주로 퇴각시켰다. 1908년 10월 13일 충주 달천에서 일군과 교전 중 전사 순국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이배인(李培仁, 1873-1945)
자는 학연(學淵), 호는 술헌(述軒), 본관은 전주, 습재 이소응의 아들이며, 1895년 제천의병과 1907년 이강년 의병부대에 참여했다. 1915년 의암 유인석 선생의 장례을 집례(集禮)하였고, 1926년 성재집의 재간행을 주관하였다. 문집으로는 『술헌유고(述軒遺稿)』가 있으며, 부친인 이소응의 묘 곁에 안장되었다.
⦁이소응(李昭應, 1853-1930)
호는 습재(習齋), 후에 의신(宜愼) 또는 직신(直愼)으로 개명하였다. 본관은 전주로 왕실의 후손으로 유학이 깊고 고매하여 추앙을 받았다. 1895년 춘천에서 기의하여 그 해 12월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관찰사 조인승을 처단하였다. 서울로 진격하여 가평 벌업산에서 관군과 싸워 실패하고 제천 유인석 의병진으로 들어갔다. 충주⦁제천 싸움에서 협력하여 공이 컸고 군무강령을 저술하였으며, 의병 해체 후에는 유인석과 서행하여 연백에서 정세를 살피다가 귀환하여 배양산중에 은거하였다. 유인석의 요청으로 만주를 건너가 향약을 시행하고 1907년 이강년이 다시 창의하자 그 아들 배인을 보내 종군 시켰다. 귀국하여 1909년 제원군 청풍면 장선리에 이사하여 살았는데 청풍의 왜군병참에 피검되기도 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고, 자양영당에는 그의 영정이 봉안되었다. 묘소에는 높이 126cm⦁가로 43cm⦁17cm 크기의 묘비석이 있고, 망주석⦁상석⦁향로석이 놓여있다. 문집으로는 『습재집』이 있다.
◎ 공전초등학교와 꽃피는 학교
공전초등학교는 1949년 10월 01일 봉양초등학교 부설 공전초등학교로 개교하여, 44회에 걸쳐 졸업생 1,973명을 배출하였다. 그러나 농촌 인구 감소로 인해 1999년 9월 1일 폐교되었다. 현재는 그 자리에 대안학교인 꽃피는학교가 위치해 있다. 2006년 2월 중등교육과정으로 개교하였으며, 현재 55명의 학생과 13명의 교사가 근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