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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기행

제천문화원 마을기행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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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2-07-26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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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양읍] 구곡리(九曲里)
 글쓴이 : 문화원
(조회 : 2,906)  
2. 구곡리(九曲里)

구곡리는 본래 제천군 근좌면 지역이었다. 마을이 구불구불한 골짜기로 형성 되어 있어서 ‘굴골’ 또는 ‘굴곡(屈曲)’, 변하여 ‘구곡(九曲)’이 되었다고 한다. 구곡리는 ‘상굴곡(上屈曲)’과 ‘하굴곡(下屈曲)’의 두 마을로 나뉘었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굴탄리(屈坦里)를 병합하여 구곡리(九曲里)라 해서 1920년 9월 봉양면에 편입되었다. 1980년 4월 1일 제천시 승격에 따라 제원군 봉양면 구곡리가 되었다가, 1991년 1월 1일 제천시 봉양면이 되었다.
1995년 1월 1일 시군통합과 동시에 봉양면이 읍으로 승격하며 제천시 봉양읍 구곡리가 되었다. 마을 동쪽에는 옥녀봉이 있고, 남쪽에는 국사봉, 서쪽에는 대덕산, 북쪽에는 천등산 등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전형적인 산촌마을이다. 구곡리의 주요 특산물은 고추, 호박, 오이, 담배 등이다.
 구곡1리에 속해 있는 자연마을은 굴골, 요골, 하굴곡 등이며, 구곡2리에는 상굴곡, 구곡3리에는 굴탄 등이 속해 있다. 구곡1리의 경우 8.15광복을 전후하여 100여 가구 정도가 살았으나, 현재는 40여 가구 정도 살고 있다. 구곡1리에서는 보리, 벼, 밀 등이 주생산물이었으며, 광복 후에는 담배, 현재는 고추를 많이 한다. 구곡리는 농토가 적어서 1970년대 이전에는 화전(火田)을 많이 하였다. 구곡2리의 상굴곡 일대는 거의 대부분이 화전이었다고 한다. 화전에는 조를 많이 심었다.
 구곡1리에는 대동계가 구성되어 있다. 화전이 성행할 때는 매년 12월에 ‘계갈이’를 하여 화전민들로부터 ‘화속’을 받기도 하였다. 화속은 화전에 대한 대가로, 마을 자체적으로 걷어서 마을기금으로 사용하였다. 화속의 많고 적음은 마을의 어른들이 결정하였다. 그 해 농사지은 수확을 보고 결정하는데, 잘 된 해는 많이 걷고, 수확이 적은 해에는 조금 걷었다. 대동계에서는 관혼상제(冠婚喪祭)에 사용하는 물품도 관리하였다. 예전에는 요골과 굴골이 함께 참여하였으나, 지금은 각각 ‘소동계’를 나누어 두었으며, 두 마을이 함께 하는 대동계를 따로 구분해 놓았다. 마을 대동계와 관련된 문서들, 곧 대동계에서 빌려주고 돌려받았던 물품들과 화전민들에게 받았던 화속을 기록해 놓은 문서를 동계장이 보관하고 있었는데, 현재는 소실되었다.
 구곡1리 마을에서의 큰 행사는 ‘섶다리’를 놓는 것이었다. 추석이 다가오면 마을공동으로 현재 ‘구곡대교’가 있는 자리에 섶다리를 놓았다. 장마 때 떠내려간 다리를 추석 전에 보수해야 겨울철에 건너다니기가 수월했기 때문이다. 섶다리는 나무를 베어서 세우고 그 위에 섶을 깔고, 흙을 덮어서 만들었다. 섶다리는 구곡1리 마을에서 반을 놓고, 강 건너편에 있는 연박마을에서 반을 놓았다. 또 다른 마을의 행사로는 ‘동제(洞祭)’와 ‘호무씻이[호미씻이]’가 있었다. 호미씻이는 음력으로 칠월칠석이나 따로 날을 받아서 하였다. 호미씻이가 있는 날이면, 마을 주민들이 조금씩 성의 있게 음식을 해가지고 와서 잔치를 벌였다.
 구곡3리는 자연마을명이 ‘굴탄’이다. 굴탄이라는 지명은 마을 앞을 흐르는 강이 굴로 들어갔다가, 굴로 나오는 형상을 하고 있어서 ‘굴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구곡3리 마을 뒤편에 물레방아가 있었다고 해서‘물레방아골’이나 ‘물방골’이라는 불리는 곳에는 ‘龍巖’이라고 쓴 바위가 있다. 예전에 그곳에서 기우제를 지냈었다. 구곡3리와 강을 경계로 해서 있는 마을이 공전리다. 공전리에는 역사(역사)가 위치해 있으며, 자연마을명은 ‘식개’라고 한다. 식개에는 나루터가 있었는데, 충주 목계나루를 통해서 소금배들이 올라왔다고 한다.
 1960년대 초반까지 구곡3리에는 80가구 이상이 살았다. 현재 구곡3리의 가구 수는 46가구인데, 실제 농사를 짓는 가구 수는 38가구 정도다. 1960년대에 비해 반 이상이 줄었다. 마을주변이 온통 화전이었으며, 화전에는 조, 옥수수를 많이 심었다. 구곡3리의 주생산물은 벼, 보리, 콩, 밀 등이었으며, 해방 이후에는 담배를 주로 재배하였다. 현재도 일부 마을 사람들이 담배농사를 하기도 한다. 특히 구곡3리의 고추는 밤낮의 기온차가 커 품질이 좋으나, 물량이 많지가 않다고 한다. 고추를 재배한지는 30여 년 되었다.
 구곡3리에서는 예전에 장을 보러 갈 때 봉양으로 나갔다. 충북선이 개통되기 이전에는 걸어서 다녔고, 충북선이 개통된 이후에는 기차를 타고 다녔다. 마을의 큰 행사 중 한 가지가 ‘섶다리’를 놓는 것이었다. 음력 칠월칠석과 추석 사이에 섶다리를 놓았는데, 구곡3리 마을에서 반을 놓고, 건너 마을인 공전에서 나머지 반을 놓았다. 칠석날 전에는 하천 물의 양이 많지 않아, 그냥 건너 다녔다. 나룻배들은 식포에 소금을 일부 내려놓고, 축포까지 배를 끌고 올라갔다. 예전 굴탄에서는 뗏목을 이용해 강을 내려가기도 하였는데, 1950년대 자동차가 나오면서부터 뗏목을 이용하지 않게 되었다.

◎ 구곡리 지명유래

⦁구곡본동(九曲本洞) : 구곡1리를 말함. 구곡2리인 상구곡과 구곡3리인 굴탄리를 합하여 구곡리라 하는데, 구곡1리 주민들은 구곡1리라는 표현대신 구곡본동이라는 말로 중심임을 강조함.
⦁굴골표지석 : 구곡리 입구에 자연석으로 세워진 마을 표지석.
⦁굴단리 : 굴탄리.
⦁굴탄리[굴단리](屈坦里) : 구곡 서쪽 후미에 있는 마을.
⦁귀암(龜岩) : 거북바위, 요골 마을 한 가운데 논에 있음.
⦁민비재 : 민비재는 구곡본동에서 공전리로 넘어 가는 고개를 말함.
⦁상구곡(上九曲) : 상굴골.
⦁상굴골[上九曲] : 굴골의 위쪽에 있는 마을. 국사봉(國師夆) 바로 아래 마을.
⦁성덕원 : 하구곡, 요골에 있는 절.
⦁염창교회 : 구곡리에 있는 교회
⦁요곡(要曲, 龍曲) → 욧골.
⦁욧골[요곡] : 하굴골 북쪽에 있는 마을. 예부터 좋은 논이 많으므로 주민들이 넉넉하게 삶.
⦁용암(龍岩)폭포 : 제천시 봉양읍 구곡리 굴탄마을. 굴탄마을 서낭당으로 가는 길목 좌측에    위치하고 있으며, 폭포 좌측면에는 ‘용암(龍巖)’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예전에 물레방아 
 가 있었던 곳이다. 가물었을 때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는데, 꽹멕이(꽹과리)를 두들겨 용을 위협하는 방식으로 지냈다고 한다.
⦁자주봉 : 구곡리 아래 쪽에 뾰족하게 솟은 봉우리.
⦁잿말 : 민비재의 끝을 말하며, 국사봉이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남향임.
⦁전나무 : 구곡리 잿말 뒷동산에 있는 큰 전나무로 예전 치통(齒痛)이 있을 때 민간에서는 이 전나무의 진을 아픈 부위에 대고 통증을 가라앉히기도 하였다고 한다.
⦁장선고개(長善-) : 상굴골 남쪽에서 청풍면(淸風面) 장선리로 가는 고개.
⦁지신골 : 구곡마을 남쪽, 국사봉 북쪽에 있는 저수지로 여러 차례에 걸쳐 홍수로 둑이 무너진 것을 마을 사람들이 다시 수축하였다.
⦁참나무재 : 구곡리에서 요곡으로 가는 고갯길에 참나무가 예전 많아서 붙여진 이름.
⦁천매봉[천마봉] : 구곡리에서 상구곡으로 가는 중간에 있는 산봉우리.
⦁피앵묘 : 북한 지역에서 부사를 지내고 이후 구곡리에 은거하던 사람의 첩이었는데 부사가 다른 지역으로 떠나가도 계속 혼자 구곡에 살다 죽었다. 평양 출신이었는데 사람들은 출신지역을 따 피앵(평양)이라고 불렀다. 묘소가 잿말 뒷동산에 있다.
⦁하구곡(下九曲) → 하굴골.
⦁하굴골(下九曲)[하구곡] : 굴골의 아래쪽에 있는 마을.
⦁합천내 : 상구곡과 마곡리, 그리고 지신골에서 내려 오는 물이 만나는 지점.

◎ 구곡리 문화유산

⦁구곡각자(九曲刻字)
 구곡각자는 구곡리에 살던 소소(笑笑) 양진환(梁震煥, 1874-1937)이 직접 글을 쓰고 새겼다고 한다. 양진환은 문경 주흘산 중에 살았는데 세상이 혼탁하자 더 깊은 심산유곡을 찾아 구곡까지 오게 되었다. 1908년(무신년) 이사를 와서 보니 마을 지명이 ‘굴골’이라 굴골은 굽히는 것 같은 굴종, 굴복의 의미와 비슷해서 주자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차용하여 선돌에 ‘구곡(九曲)’ 이라고 각자를 해놓았다고 후손들이 전한다.

⦁구고건돌[立石]
 제천에서 충주방향으로 38번 국도를 따라가다 봉양을 지나면 왼쪽으로 구곡⦁마곡리로 들어가는 포장도로가 나온다. 길을 따라 7km정도 들어가면 구곡리 마을에 이른다. 구고선돌은 구곡에서 공전으로 넘어가는 ‘민비재’ 길가에 위치 하고 있다. 선돌은 위면이 평편하게 손질된 여성입석으로, 크기는 220x130x30cm이다. 구멍은 모두 13개가 분포하는데, 크기는 대략 4~6cm이며 5cm 내외의 구멍이 대부분이다. 모두 간 형태의 구멍으로 보이며, 주로 오른쪽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입석의 동쪽면에는 ‘양창석(梁昌錫)’, 서쪽면에는 ‘구곡(九曲)’이 음각되어 있다. 암질은 거정화강암이다.

⦁굴골 서낭당
굴골 서낭당은 슬레이트 지붕에 벽은 나무판자로 되어 있으며, 당집 내부에는 신체(신체)로 가로 20cm, 세로 50cm 정도의 돌을 모셔 놓았다. 그리고 그 밑에는 강돌을 모아 제단을 만들어 놓았다. 주위에는 서낭목으로 느티나무 5그루 정도 있으며, 논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 주민들은 서낭이라 불며, 제의의 명칭은 ‘당고사’이다. 1970년대 새마을 운동 때부터 지내지 않다가 몇 년 전 마을 주민 중 한 사람이 수리를 하고 모셨다. 굴골에는 두 곳에 서낭당이 있었다. 현재 남아 있는 것 외에도 섬재에도 있었다고 한다. 당고사는 매년 정초에 날을 잡아 지냈으며, 돼지머리⦁백설기 한 시루⦁포⦁밤⦁대추⦁곶감 등을 제물로 사용하였다. 제의의 진행은 초헌 - 독축 - 아헌 - 종헌 - 소지- 음복 순으로 이루어졌다.

⦁굴탄 서낭당
 굴탄 서낭당 내부에는 ‘대덕산신지위(대덕산신지위)’라고 쓰여진 비석이 있다. 굴탄 서낭당에서의 대고사는 정초에 날을 받아서 지낸다. 날이 잡히면, 제관 및 축관을 선정하고, 서낭당에 금줄을 쳐 금기를 철저하게 지킨다. 또한 예전에는 축관과 제관은 매일 찬물에 목욕을 하였으며, 마을 주민들은 빨래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대고사를 지내는 날 서낭당 앞에 흐르는 계곡물을 상탕⦁중탕⦁하탕으로 나누어 청소를 한다. 상탕물은 미를 지을 때 사용하며, 중탕물에는 제관 및 축관들이 얼굴을 씻고, 하탕물에는 발을 씻는다. 제물로는 돼지머리⦁백설기 한 시루⦁뫼⦁탕⦁밤⦁대추⦁곶감⦁포 등을 진설한다. 특히 뫼를 지을 때는 솥두껑을 열어보지 않고 감으로 짓는다고 한다. 제의의 진행은 초헌 - 독축 - 아헌 - 종헌 - 소지 - 음복 순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날이 밝으면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남은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

⦁느티나무
1948년 정부수립을 기념하여 이 마을에 살던 벽탄(碧灘) 양창  (梁昌錫, 1929-1993)선생이 심었으며, 여름이면 잎이 무성하여 사람들이 그늘에 앉아 담소를 나누는 등 정자목으로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이다.

⦁상구곡 할아버지 서낭당
상구곡 할아버지 서낭당은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 왼편에 있다. 할아버지 서낭당은 기와지붕에 벽은 나무판자로 되어 있으며, 서낭당 내부에는 ‘성황신위(城隍神位)’라고 쓰여진 높이가 50cm, 세로 20cm 정도 되는 비석을 모셔 놓았다. 할아버지 서낭당에서의 당고사는 매년 정초에 날을 잡아 지내는데, 보통 2일이나 3일 정도에 지낸다. 구곡2리 1반과 2반 주민들이 지낸다. 생기를 봐서 제관 1명을 선출하며, 제관으로 뽑히면 금기를 철저하게 지킨다. 제물로는 돼지머리⦁백설기 한 시루⦁밤⦁대추⦁곶감⦁포 등을 쓴다. 또한 할아버지 서낭에는 술을 올린다. 제의의 진행은 초헌 - 독축 - 아헌 - 종헌 - 소지 - 음복 순으로 이루어진다.

⦁상구곡 할머니 서낭당
상구곡 할머니 서낭당은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 오른편에 위치하고 있다. 서낭목으로 느티나무 3그루가 있으며, 슬레이트 지붕에 벽은 나무판자로 되어있다. 서낭당 내부에는 ‘성황신위(城隍神位)’라고 쓰여진 위패가 있고, 그 앞에는 가로 30cm, 세로 20cm 정도 되는 돌을 모셔놓고 있는데 한지로 덮어 놓았다. 할머니 서낭당에서의 당고사는 할아버지 서낭에서의 당고사와 제일⦁제물⦁제의 진행이 동일하다. 다만 제주(祭酒)로 할아버지 서낭당에서는 술을 올리지만 할머니 서낭당에서는 식혜를 올린다.

⦁연자방아
봉양읍 구곡1리 마을회관 입구에 있으며 위는 세워 놓았으며 아래는 받침으로 사용하고 있다. 크기는 직경 115cm, 높이 40cm의 크기다.

◎ 구곡리 이야기

⦁민비재의 유래
민비재는 구곡본동에서 공전리로 넘어 가는 고개를 말한다. 마을에서는 명성황후 민비가 임오군란 당시 이 고개를 넘어 갔다고 해서 유래가 되었다고 전한다. 명성황후는 장호원에서 충주 노은면으로 피신하였기에 이는 사실과 다르다. 또한 1970년 한글학회에서 발간한 『한국지명총람』 에는 ‘밋밋재’라고 하는데, 이 또한 사시롸 많이 다름을 알 수 있다. 마을 주민들도 인정하다시피 이 고개는 결코 밋밋한 고개가 아니다. 예전 공전역에서 기차를 타고 제천 장에 갈면 이 고개는 구곡리와 마곡리 사람들이 힘겹게 넘던 고갯길이었다.
 민비재 명칭에 얽힌 또 다른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구곡본동에 살던 황새가 장담 마을 앞 개울에 가서 물고기를 잡아먹고, 다시 구곡리로 넘어왔다는데서 유래하여 황새 민(민)자에 날 비(飛) 자를 써서 민비재라 하였다는 설이다.
 다른 하나는 백운면 도곡리에 있는 민기(閔機, 1568~1641)의 묘소와 관련 있는데, 민기의 증손녀인 조선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민비)가 넘은 고개라는 데서 유래가 되었다는 것이다. 인현왕후(1667-1701)의 친고모가 금성면 월림 정양(鄭瀁, 1600-1668)의 아들이며, 우암 송시열의 제자인 정보연(鄭普衍, 1637-1660)과 혼인하였다. 그러나 정보연이 아들 한 명을 두고 24세에 요절하자 월림에서 혼자 살았다. 인현왕후가 숙종의 계비로 간택되자, 백운면 도곡리의 증조부 묘소를 참배하고, 홀로된 월림 친고모를 만나기 위해 백운에서 월림까지 최단거리인 민비재를 넘어 구곡⦁마곡을 거쳐 금성 월림에 갔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후 인형왕후 민비(閔妃)를 따서 민비재라 칭하게 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백운면 도곡리에 있는 민기의 신도비의 정보연이 나오며, 인현왕후의 친고모가 월림 정씨네로 시집을 왔다고 영일정씨 족보에서도 확인된다.

⦁용암(龍岩)폭포의 유래
굴탄마을 서낭당으로 가는 길목 좌측에 위치하고 있으며, 폭포 좌측면에는 ‘용암(龍岩)’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예전에 물레방아가 있었던 곳이다. 예전에 어느 선비가 와서 폭포 옆에 있는 소나무 아래 쉬면서 “야 그 바우 참 좋다”라고 하며 “저것을 무엇이라 그러면 좋겠니?”라고 손자에게 물었다. 그랬더니 그 손자가 ‘용바우 용바우“하니까 그 할아버지가 석수(石手)에게 부탁하여 ’龍岩‘이라고 새겨놓았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예전에 가물었을 때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는데, 꽹멕이(꽹과리)를 두들겨 용을 위협하는 방식으로 지냈다고 한다.

◎ 구곡리의 민속놀이 - 풍물

일제강점기에는 풍물이 중단되었으며, 해방 이후에 와서 다시 악기를 구입하여 풍물을 놀았다. 구곡1리에서는 ‘유재성’이라는 상쇠가 유명했었다고 한다. 정월대보름, 호미씻이 등에 풍물을 놀았으며, 특히 음력 정월대보름에는 집집마다 다니면서 지신밟기를 하였다. 구곡1리에서는 예전에 ‘유도회’가 있었다. 유도회에서 농기를 앞세워 집집마다 다니면서 풍물을 쳐주고, 쌀이나 돈을 받아 마을 기금을 조성하였다. 제 일차 기금으로 마을 노인회를 조직하였다. 구곡 풍물은 1980년대에 오면서 자취를 감추었는데, 추석이나 마을 행사 때는 그냥 풍물만 치고, 마을의 기금을 걷을 때는 농기를 앞세워 걸립을 다녔다.

◎ 구곡리 역사인물

⦁서상렬(徐相烈, 1854-1896)
본관은 달성, 자는 경은(敬殷), 호는 경암(敬庵)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지냈다. 외국인 묄렌도르프를 조정에서 기용하자 이를 개탄하고 향리에 돌아가 한말 거유 유중교(柳重敎)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고종 32년(1895)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제천에서 의병장 이춘영(李春永)의 휘하에 들어가 선봉장이 되어 단양, 상주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이듬해 예천에서 회맹소를 조직하고 대장이 되어 유인석 부대가 서진할 때 선봉으로 낭천(浪天-강원 화천)에서 싸우다가 1896년 6월 12일 전사하였다. 1963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단장이 수여되었다. 묘는 상구곡 안 마을에 국사봉으로 오르는 등산로를 따라 300m정도 오르면 왼쪽으로 작은 골짜기가 있고, 골짜기 오른쪽 길을 따라 흐르는 능선 길을 따라서 15분 정도 오르는 곳에 묘소가 위치하고 있다. 묘소는 작은 봉분에 ‘순국서열 서상열지묘(殉國先烈 徐相烈之募)’라고 새긴 작은 비석 하나만 세워져 있을 뿐이다.

⦁이종국(李鐘國)
자는 응천(應天), 호는 석포(石浦), 본관은 경주. 덕산면 성암리에서 출생했다. 박세화의 문인으로 을미의병 때 의진이 충주성을 장악하였을 때 운량관(運糧官)이 되어 식량 조달과 운반 보급의 책임을 맡았고, 얼마 후 이강년이 청풍 탄지동 전투에서 장기렴의 관군에게 패하고 성암리로 피해 왔을 때, 이들을 숨겨 주었다. 또한 인근에 흩어져 있던 잔류 의병 15명을 모아 주었는데 운강이 대미산에서 부대를 수습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강년은 그의 집에서 보름 이상이나 머물면서 의진을 재건하였다. 이후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봉양 구곡리(요골)에 은거하였다. 항일운동으로 잡혀 간 이들의 가족을 돌보아주는데 앞장섰기 때문에, 일제로부터 탄압을 받았는데 만년에는 서당을 통해 후학을 기르는데 전념하였다. 묘소는 제천 봉양 구곡리에 있었는데 2007년 대전국립묘지로 이묘하였다. 정부는 1993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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