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천의 역사와 전통을 알아 볼 수 있는 게시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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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7-12 13:14
[청풍면] 물맛 좋은 약수터마을 - 양평리(陽坪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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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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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풍에서 남서쪽으로 강변을 따라 이어진 654번 지방국도를 타고 20여분을 달리면 양평리에 도착하게 된다. 청풍의 영산(靈山)인 비봉산(飛鳳山, 531m)이 마을을 포근히 감싸면서 긴 산줄기는 마을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다. 수몰 전 150여 가구에 이르는 양평은 청풍 일대에서 가장 큰 마을로 자리잡고 있었다. 양평리는 청풍군 근서면(近西面)에 속했던 지역으로 양지들 옆에 위치하였으므로 양지편, 양평말 또는 양평리(陽坪里)라 하여 제천군 비봉면에 편입되었다가 1918 년 청풍면에 편입되었다.
마을은 크게 양평과 후평으로 나눌 수 있다. 양평은 양지편·음지편·호장골·사려울·안말로 구성되고, 후평은 노가리·웃마(윗마을)·아랫마(아랫마을)로 총11개 반으로 구성되었다. 당시 마을인구는 792명으로 인근지역에서 가장 큰 대촌(大村)이었다. 마을의 경지면적은 60만평에 이르는데, 논이 20여만평, 밭이 40여만평으로 벼농사와 고추, 담배, 보리, 밀 등 잡곡류 재배가 주종을 이루었다. 특히 땅콩재배는 수확량이 3,000가마에 이르러 충북 제일의 땅콩 재배지로 유명하였고, 강변으로는 수박과 참외농사가 호황을 누렸다. 마을은 고려시대에 처음으로 피(皮)씨가 개촌하였으며 이후, 평산 신씨(申氏)와 진주 유씨(柳氏)가 마을에 터를 닦았는데, 수몰 전 마을에는 양 성씨(申氏·柳氏)가 150여호 중 130가구를 차지할 만큼 대성(大姓)을 이루었다. 진주 류씨 가문에서는 효자문이 마을에 세워져있던 것을 수몰 이후 금성면으로 옮겼다. 마을에 처음으로 설립된 공공기관은 1942년 4년제 양평간이학교(私立)였고, 이후 양평초등학교가 되었다. 1971년에는 50평에 이르는 마을창고가 세워졌고, 1972년 30평 되는 마을회관이 건립되었다. 남한강변에 인접했던 마을은 자연재해로 많은 피해를 입으면서 마을터를 옮겼다. 1972년 전국적으로 막대한 손실과 인명을 앗아간 대홍수는 결국 마을터를 옮기는 결정적 계기를 제공하게 된다. 당시 홍수로 인해 마을 전체가 물 속에 침수되었고, 많은 농경지가 유실되어 30m 정도 위쪽으로 산자락을 깎고 새롭게 마을을 조성했다. 그 후 1984년 충주댐 담수로 인해 현재의 마을을 조성하고 산지를 농토로 개간해서 새로운 삶의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현재 양평리는 1984년 충주댐 수몰로 계산리(鷄山里)를 통합하였다. 계산리는 계장(鷄場)골·제장골·계산동으로 불렸는데, 이는 비봉산과 주루봉의 형세가 풍수지리적으로 닭의 형국을 닮았다고 한 데서 유래된 마을지명이다. 충주댐 수몰로 1998년 현재 17가구(농가 15가구, 비농가 2가구) 41명(남자 20, 여자 21)만이 마을에 거주하고, 나머지는 충주, 대구, 서울로 마을을 등지고 이주하였다. 현재 마을입구에는 (株)꼬리아트(한국예술도자기공장)와 양평리 농기계 창고가 위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