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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기행

제천문화원 마을기행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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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제천의 지명과 행정구역의 변화 지역적 특성과 산물 등을 알려드립니다.

작성일 : 16-07-11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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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면] 국사봉의 큰 뜻 담은 마을 - 활산리(活山里)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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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산리는 금성면의 서쪽 하단에 위치한 마을로 사곡리, 월굴리와 인접한 마을이다. 안살미, 자재기, 안간이, 중앙골, 지소거리 5개의 자연마을으로 나뉘어져 있다. 마을로 들어가는 고개인 뫼산고개에는 사람무덤 정도 높이의 돌무더기가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 고개를 넘을 때마다 그곳에 돌을 던져 쌓았다고 한다.
활산리는 원래 '거산리'라고도 불렀다. 거산리의 지명이 활산리로 바뀐 이유를 마을의 촌로들은 거자가 '去'자이기 때문에 마을이 불길해 진다고 해서 살릴 '活'자를 써서 활산리(活山里)로 바꾸게 되었다고 전한다.

마을사람들은 활산리에 처음으로 입향한 시조는 조선 세조 때 단종의 신하였던 유안예라 한다. 유안예는 단종이 영월로 귀향오게 되자 활산리의 살미에 '능골'이라(당시의 안살미) 불리는 곳에 들어와 은행나무를 심고 살았다. 이 분은 매월 초하루와 보름만 되면 나라를 위해 '국궁사배'를 올렸다고 한다. 그 분이 보고 절한 쪽으로 한 봉우리가 있었는데 그 이름이 후에 국사봉(國師峰)으로 불리게 되었다. 국사봉(國師峰)은 나라를 위하는 봉우리라고도 한다. 국사봉은 안간이 마을과 접해 있다. 국사봉 옆에는 오봉산이 자리하는데, 그 중 국사봉이 으뜸이 되는 산이라고 한다. 오봉산에는 오봉장수가 날 명당 터가 있다고 전한다.

활산마을에서는 1960년대까지 50리 길을 걸어서 제천장을 보러 다녔다. 마을에서 제천으로 나가는 길은 월림의 한티재를 넘는 길이었다. 청풍장은 20리 길이었는데 청풍쪽으로 가는 안살미 사람들은 땅고개를 지나서 월굴을 거쳐가기도 했다. 당시 청풍을 가기 위해서는 배를 이용했다. 활산리 사람들 중에서 절에 가는 사람들은 단양의 구인사와 성내의 무암사를 주로 간다.
마을에는 일본 사람들이 혈을 끊었다는 단혈전설(斷穴傳說)이 전해온다. 자재기의 자재봉과 국사봉 꼭대기에 네모난 바위가 바로 혈을 끊은 자리라 한다. 활산리는 안살미(2가구)와 바깥마을(6가구), 그리고 활산리의 이장이 살고 있는 생긴양지(4가구)로 구분된다. 행정구역상으로는 4개 반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생긴양지로 나뉘어진 살미는 1반, 중앙골은 2반, 자재기는 3반(9가구), 안간이(10가구)와 지소골은 4반으로 구성되며 각 반에는 반장이 있다. 1997년 현재 활산의 총 가구수는 53가구이다.
문화유씨, 강릉유씨, 박씨들이 대성(大姓)을 이루고, 그 중에서도 강릉유씨들이 많이 거주한다. 안살미에서는 양잠이 성행하였다. 양잠은 4월에 집중되는데, 뽕나무를 1년정도 키워서 제천장에서 수급했다. 담배 밭 주위에는 누에가 안 된다며 담배를 재배하기 시작한 뒤부터 누에를 치지 않게 되었다. 담배를 심을 때와 거둘 때는 품앗이를 한다. 현재 안살미의 주요작물은 담배와 오이이다. 오이는 4년째 재배하고 있고, 금성면 오이작목반에 속해 있다. 오이를 재배하는 가구는 활산리 전체가 19가구이다. 오이는 담배농사를 끝낸 다음 다시 밭을 갈아서 파종한다.
소는 전통적인 방법으로 한 두마리를 계속 키우고 있었다. 경운기가 농가에 보급되기 이전까지(1980년초)는 주로 나무쟁기를 이용해서 밭갈이와 밭골 만들기를 했었다. 10여년 전 소값 파동이 있은 후부터 싼 소값에 한 두마리씩 사두었던 것이 본격적으로 축산을 하게된 계기가 되었다. 현재 활산리마을에서는 총 200여마리의 소를 키우는데 한 가구 평균 20두를 키우고 있는 셈이다. 지금 안간이와 자재기에는 송이를 채취하는 사람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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