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천의 역사와 전통을 알아 볼 수 있는 게시판 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제천의 지명과 행정구역의 변화 지역적 특성과 산물 등을 알려드립니다.
작성일 : 16-07-12 13:11
[청풍면] 소금배가 정박했던 나루터 - 북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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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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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시를 벗어나면 남한강변을 따라 길게 도로가 이어지고, 길을 따라 계속 달리면 청풍, 수산을 거쳐 인근지역인 단양(丹陽)과 충주(忠州)로 연결된다. 청풍에 이르기 전, 다리 건너로 청풍문화재단지를 앞에 두고 산 중턱에 위치한 마을에 닿게 된다. 북진(北津)은 충북선 개통 이전 남한강을 중심으로 하는 수운교역에서 중심지적 역할을 담당하였던 마을이다. 마을 앞으로 흐르는 강을 건너면 바로 청풍의 읍내장과 연결되었고, 안암장과 성내장과 곧장 연결되는 길목으로 주막거리가 유명하였다.
또한 서해에서 생산되는 해산물들과 소금이 여기에 와서 각종 잡곡과 교환되던 물물교환의 장소가 되기도 했으며, 중부 이남 및 충청도와 강원도 일부지역의 조세를 보관하던 사창(司倉)이 있던 마을로도 잘 알려져 있다.
북진은 한강 각지에서 올라온 소금배와 해산물을 싣고 강을 따라 오르고 있는 배들이 정박하는 장소로, 또는 단양, 영춘, 영월 등지로 내륙 깊숙이 들어가는 소금배의 임시 정박지로 기능하던 나루였다. 소금배와 수운을 통한 교역이 활성화되던 17세기 후반 이후 넘쳐나는 물량과 새롭게 유입되는 인구증가로 마을은 총 호수가 3백 여호에 이르게 되었다. 정기적인 소금배들의 운항이 있었지만 노을이 짙게 깔리는 밤이면 각지에서 올라온 배들이 북진 나루에 뱃머리를 댄다. 선술집을 찾아 뱃사공들은 구수한 노래와 함께 주모가 따라주는 술로 목을 축인다. 여기저기서 노랫가락이 흘러나오면 주모의 웃음소리가 나루를 떠나갈 듯 했다. 남한강의 중·상류지역이 수운을 통해 활성화되면서 청풍지역의 교역중심지는 바로 이곳이었다. 남한강 주변에 활성화되었던 갯벌시장이 정기시장화 되면서 북진은 가까이에 사창(北倉)을 두고, 소금과 각종 어물들을 이 지역의 특산품인 참깨, 콩, 고추, 담배 등과 물물교환 하던 중심지였다. 그러나 1946년 소금배의 완전 중단 이후 남한강을 따라 형성되었던 교역로는 내륙중심지로 새롭게 번성하는 제천으로 그 자리를 내어주고 역사의 뒤안길로 잊혀지게 되었다.
1984년 충주댐 수몰이전까지 마을에는 총 65가구가 살았다. '북진'(北津)이라는 마을명칭은 남한강을 중심으로 청풍면 쪽에서 보았을 때 마을이 북쪽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남한강의 북쪽에 나루가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지어졌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제원군 금성면 북진리(堤原郡 錦城面 北津里)로 지칭되었다. 1980년 현재 마을은 1반인 창말이 22가구, 2반인 음달말이 19가구, 3반인 북진이 15가구, 4반인 쪽두리 개울이 13가구로 총 69가구로 구성되었다. 마을의 인구는 여자가 1백 70명 남자가 1백 68명으로 총 인구는 3백 38명이며 경지면적은 논이 10.8ha, 밭이 33.9ha로 밭이 논보다 3배나 더 많았다. 당시 북진에서 짓는 벼농사의 생산량은 자급자족의 양으로는 불충분한 양이어서 고추 등 특용작물을 재배하여 쌀을 사먹는 실정이었으며 관광객이나 마을 주민들을 대상으로 점포를 운영하거나 남한강에서 고기를 잡아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마을은 예로부터 나룻터로 유명한 마을로 한강 각지에서 올라온 소금배 등이 북진 나루를 경유하거나 정박했으며, 19300년대 남한강 수운이 활성화되던 당시에는 소금배와 각종 선박들 1백여 척이 정박했다고 전한다. 이 때만 해도 마을에 주막과 여각 등이 즐비했으며 마을의 총호수가 3백여 호에 이르러 인근 마을 중 가장 큰 마을이었다. 당시 마을은 금성면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청풍과 가장 가까이에 접하고 있는 장소였다. 청풍에서 강만 건너면 바로 북진이기 때문에, 인근지역에서 학교와 시장을 보러갈 때는 반드시 마을을 지나쳐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