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천의 역사와 전통을 알아 볼 수 있는 게시판 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제천의 지명과 행정구역의 변화 지역적 특성과 산물 등을 알려드립니다.
작성일 : 16-07-12 13:15
[청풍면] 정실령 고개 넘어 마을 - 연론리(連論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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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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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론리는 청풍에서 수산방면 597번 지방도를 따라 3km를 지나서 남서쪽으로 1km지점에 위치한 마을이다. 마을은 청풍면의 남쪽에 위치하여 있으며 30m 아래에 남한강 수몰선이 닿아있다. 수몰이전 마을은 제비골, 무대이, 마실, 상길리, 영개, 안말, 큰길가, 갱그터, 호무실로 이루어졌다. 300여년 전 마을에 처음으로 입향한 시조는 인동 장씨와 강릉 유씨였다. 무대이는 2반으로 물곁(도랑)에 살고 있다하여 무대이라고 한다.
큰길가는 원님이 넘어가는 큰길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큰길가는 청풍원님이 충주목(忠州牧)으로 넘어가는 길목으로 연론을 거쳐 정실령고개를 넘으면 서창에서 한수면(한강), 신당(신매)을 지나서 수안보 삼거리를 통하여 오른쪽으로 가면 충주에 도착하고, 왼쪽으로 가면 단양으로 통한다.
정실령재는 정신없이 올라가야 하는 가파른 고개라는 데서 연유한 지명이다. 이 고개는 산적들이 많이 나타나서 고개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인명과 재산을 앗아가는 경우가 많았고, 더군다나 행정력이 쉽게 미치지 못한 지역이라 근세까지 산적들에 의한 피해가 많은 지역이었다. 큰길가의 맞은 편에는 절터골이 있다. 지금도 절터골에서는 예전의 기와장이 많이 발굴되어 이곳에 절터가 있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갱그터는 정실령재를 넘어가기 위해서 잠시 쉬어 가는 곳이라 하여 갱그터라 부른다. 마을의 상길리에 있는 등재를 기준으로 1반에서 3반까지를 하나로 묶고 4반에서 8반까지를 하나로 묶을 수 있다. 전통적인 마을에서 마을사회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 주는 것이 바로 공동체 신앙이다. 이는 마을민들의 결속력을 높일 뿐만 아니라 한 마을의 공간적 구분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요소로 작용한다. 1반에서 3반이 당을 중심으로 하는 단일한 신앙공동체를 형성하고, 4반에서 8반이 단일한 신앙공동체를 형성하고 제를 수행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무대이에는 넓은 들이 있는데, 이 들을 '무대이들'이라고 한다. 무대이들에는 넓은 들을 중심으로 조그마한 산이 있고, 그 옆으로 소나무가 길게 이어져 있다. 4반인 안말에는 잘개미골이라 불리는 넓은 들이 있다. 마을의 경지면적 중에서 논보다 밭이 상대적으로 많다. 이 지역의 주작물은 무엇보다도 담배재배라 할 수 있으며, 마을에서 가장 많이 생산하는 담배는 영월엽으로 전매청에서 전량 수곡한다. 연론마을의 담배수확에 관한 말로, "연론리 담배수확이 좋을 때는 일주일간 팔아야 한다", "마을에서 담배농사가 절단나면 영월담배가 절단난다" 이 전한다.
수몰이전 마을의 총 가구수는 134가구였으나 수몰 직후(84년 10월 1일)에는 35가구로 100여 가구가 인근마을과 타향으로 이주하였다. 마을의 인구는 지속적인 감소추세를 보이고 있어 1998년 현재 마을에는 21가구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충주댐 수몰은 정확하게 84년 10월 1일에 시작되어 10일 완전히 수몰되었다. 제보자에 의하면 이때 가을비가 많이 와서 지금의 충주호를 가득 채웠다고 한다. 예전마을의 대부분이 수몰되어 새로운 이주촌은 갱그터로 자리를 옮겼다. 갱그터에 새롭게 조성된 마을은 새마을, 갱그터 그리고 호무실로 이루어졌다. 새마을에 6가구, 갱그터에 10가구, 호무실에는 5가구가 각각 거주하고 있다. 용곡리는 연론리와 인접한 마을로 수몰민의 애환을 같이 겪으며 이웃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용곡과 연론은 마을주민의 유대관계가 밀접해져 점차 융화되어 가고 있다. 시내버스가 연론리까지만 들어온다는 사실을 알고 연론리 사람들과 용곡리 사람들은 버스 운전기사에게 많은 성의를 보이고 행사 음식을 기사에게 제공하면서 호의를 얻었다. 이 결과 시내버스는 연론까지만 운행하다가 결국 용곡리까지 운행을 연장하게 되었다.
설날에는 두 마을이 모여 윷놀이를 같이 하며 세시풍속을 즐긴다. 두 마을은 윷놀이를 하여 이긴 사람에게 상품을 수여한다. 윷놀이 상품구입은 각 집마다 만원씩을 갹출해서 마련한다. 또한 두 마을은 곳집을 공동으로 사용하고 있다. 원래는 각각의 곳집을 마을별로 소유하고 있었으나 곳집과 상여의 관리비용이 많아져 효율적인 관리를 위해 공동으로 곳집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상여계가 마을별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두 마을을 한 지연공동체로 단정하기는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