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문화사료관 마을기행

   

마을기행

제천문화원 마을기행 입니다.

제천의 역사와 전통을 알아 볼 수 있는 게시판 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제천의 지명과 행정구역의 변화 지역적 특성과 산물 등을 알려드립니다.

작성일 : 16-07-12 13:29
목록
[수산면] 수산면의 본 마을 - 내 동(內洞)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4,043)  

2bac591a_.jpg

 

 

수산면 내동(內里)은 수산면소재지가 있는 수산리에서 남쪽 1km 지점에 위치한다. 면사무소 앞에 있는 길을 따라 5분도 넘지 않게 남쪽으로 가면 이곳 내동에 도착할 수 있고, 충주로 가는 길목에서도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 마을을 가리키는 표석(表石)이 있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수산면의 남쪽에 자리한 내동은 청풍군 원남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수산리의 안쪽이 되어 안마을, 안골, 내리·내곡(內里, 內谷) 등으로 불린다.
 

원래 내동(內洞)은 수산면 소재지가 있었던 곳이고, 일제 식민지와 6·25사변을 거치면서 활발해진 광산활동으로 인해 이곳에 사람들이 모여들어 내동에서 점점 마을이 커져 현재 수산리까지 확대되었다. 수산면에 있던 중석광산, 수리광산, 동척광산에서 채취된 중석은 강성과 내열성이 좋아 무기 재료로 많이 사용하였다. 따라서 일제 식민지 시대와 6·25사변 당시 무기에 사용되는 광석을 채취하기 위해 광산업이 활발했던 곳이다. 광산이 있었기 때문에 다른 면보다 전기도 일찍 보급되었으며 현재 수산리의 파출소 뒤에 섰던 수산장도 마을이 점점 커지면서 생긴 것이다. 이런 상황을 잘 알려주듯 내동에는 '수산에는 개도 10원을 물고 다닌다'라는 말이 있다.

일제 식민지 당시 쌀 한 말이 1원 40전이었고 광산 노동자의 임금이 광석 한 근당 5원 있었으니 10원은 상당한 가치의 돈이다. 그런 돈을 개가 입에 물고 다녔을 만큼 풍요로웠다고 하니, 광산이 활발했을 당시 내동의 경제가 얼마나 활발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내동은 하나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었고, 72년 현재 마을은 총 62호 300여명이 넘게 거주하고 있었으나, 1998년 현재 마을은 총 65호 181명이 거주한다. 수산면에 따르면 마을은 인근 농촌과는 달리 인구와 가구수가 증가한 것으로 나타나는데, 마을의 총 가구수 65호 중에 실제로 거주하지 않는 가구가 상당수 있으며 마을의 인구수 역시 주민등본만 기재돼 있고 다른 곳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이 많다. 실제 가구수는 40∼50호, 120여명이 살고 있다.

해방 무렵 주요 경작물은 보리·콩·조 등이었고, 벼농사는 200마지기 (3,000여평)를 경작했다. 1998년 현재 고추를 주업으로 하여 재배면적은 3,000평을 웃돌고 있으며, 황기와 작약 등의 약초도 경작하고 있지만 재배면적은 그리 넓지 않다.
조사자가 마을을 살피면서 인상적인 것은 내동의 곳곳에 있는 지명유래이다. 이곳 내리에는 옥터골, 골터, 향교터, 숯재등, 아랫숯재등 이라 부르는 곳이 있다.
옥터골은 감옥(獄)이 있었던 자리라고 붙여졌으며, 숯재등과 아랫숯재등이는 숯을 굽던 가마가 있던 곳이라 붙여진 지명이다. 또 수산리와 내동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작은골은 수산리에서는 안골이라고 부르고, 내동에서는 황가골이라 부르는데 이와 같은 사실들로 미루어 보아 예전에는 이곳에 아주 큰 마을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지금도 마을 곳곳에서 땅을 파보면 오래된 기와 편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이전글  다음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