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천의 역사와 전통을 알아 볼 수 있는 게시판 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제천의 지명과 행정구역의 변화 지역적 특성과 산물 등을 알려드립니다.
작성일 : 16-07-11 14:50
[금성면] 개암나무 밭에 터 잡은 사람들 - 포전리(浦前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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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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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시에서 597번 국도를 따라 달리면 양화리를 지나, 금성면에 이른다. 금성면에서 남동쪽을 향해 계속 달리면 제천 터널을 지나 단양(丹陽)땅에 이르게 된다. 단양군 적성면(赤城面)에서 제천쪽을 향해서면 멀리 마당재산(해발 661.2)을 뒤로로 한 포전(浦前)마을이 눈에 들어온다. 포전리는 왼쪽에는 마당재산, 오른쪽으로는 작성산(해발 770.9)을 끼고 있으며, 갯골을 통해서는 제천으로, 절매 고개를 넘어 단양으로 갈 수 있다.
그러나 현재는 이러한 길을 사용하지 않고 있으며 마을까지 들어오는 버스를 타고 중전리 입구까지 이어지는 넓은 도로로 갈 수 있다.
1973년에 마을 공통사업으로 건설된 마을 입구의 포전교를 지나면 포전들이 넓게 펼쳐져 있으며, 그 사이로 포장도로가 마을까지 이어져 있다. 포장도로 옆으로는 도랑이 흘러 길옆으로 자리한 농토에 관개수로를 통해 농업용수를 공급한다. 외부에서 마을 입구로 들어서면 제일먼저 600년 수령의 느티나무와 마주하게 된다. 이 느티나무 옆에는 샘이 있고 그 옆에는 마을구판장이 있다. 구판장 뒤에는 간단한 체육 시설을 갖춘 공원이 있어 마을 사람들이 휴식공간에 들어서면 아늑함과 함께 도란거리는 말소리가 들리는 듯한 기분에 젖게 된다. 멀리서 빛나는 푸른 잎들과 전설이 묻어날 것 같은 느티나무 바람사이로 어느덧 600년을 거슬러 옛 마을 앞에 선다. 동쪽으로는 작성산 위에 우뚝 솟은 까치산성이 보이는 듯 하고 산성에 올라 관망했을 제천과 단양을 지나 수많은 사연을 담고 푸르기만한 충주호에서 눈이 멈춘다. 시선을 마을로 옮기면 이사무소(理事務所)와 정미소를 중심으로 뒷골(後谷), 백석동(白石洞, 갯골), 큰말(大理)의 3개의 자연마을에 20대째가 되는 단양 장씨와 그 외 정씨와 전씨 등 47가구에 215명의 사람들이 옹기종기 살고 있다.
포전리는 본래 청풍군 북면에 속했던 지역이다. 개암나무 밭이 많았다고 해서 개앗, 개밭 또는 포전(浦田)이라 했고, 이것이 변해서 '개앞'이라 했는데, 1914년에 행정구역 개편이 있자 포전 뒤의 마을인 후곡(뒷골, 後谷)과, 큰말 동쪽 개울가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는 조를 1년에 100석씩 수확했다는 백석동(白石洞)이 병합되어 제천군 금수면(錦繡面)에 포전리로 편입되었다가 3년 뒤인 1917년에 금성면에 편입되었다. 현재 포저리는 1개 마을에 3개 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작성산의 능선과 골짜기로 큰 전등이, 작은 전등이, 뒷골·제앙골이 마을 오른쪽으로, 그리고 왼쪽으로는 마당재산의 높은 줄기가 있어서인지 포전은 논농사보다는 밭농사가 월등히 많다. 실제 경지 면적을 보면 논이 11.8ha, 밭이 51ha으로 밭의 경지면적이 넓고 고추며 깨, 콩, 특히 오이가 주 소득원이 된다.
포전리의 중심인 큰말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면, 말안장 모양을 한 안장바위, 수리가 앉아 놀았다는 수리바위와 행상(상여)의 모양을 닮았다는 행상바위가 한 눈에 들어올 것 같다. 뒷골을 지나 동쪽 절매고개(절맷재)를 넘으면 당장에라도 단양 땅에 가 닿을 듯하고 지금은 상수도원이 되어 폐쇄된 마을 뒷산 약수터에는 피부병을 고치러 가는 사람들이 보일 듯하다. 포전리에는 특별히 마을 사람들이 함께 하는 조직을 새마을 부녀회 외에는 찾을 수 없다. 단지 마을에 상(喪)이 나면 마을 사람 모두가 상여계의 일원이 되어 마을의 공동관리 하에 있는 상여를 메게 된다. 이 때 마을에 연고가 없는 사람이 마을의 상여나 그릇을 이용하면 그 대가로 60만원에서 100만원을 기부 받아 마을의 공동 기금으로 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