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천의 역사와 전통을 알아 볼 수 있는 게시판 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제천의 지명과 행정구역의 변화 지역적 특성과 산물 등을 알려드립니다.
작성일 : 16-07-11 14:53
[청풍면] 향교의 위엄을 자랑하던 마을 - 교리(校里)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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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뒤로는 금수산 줄기가 길게 드리워져 있고, 마을 앞으로는 남한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금수산 줄기의 중턱에 자리한 교리는 현 위치에서 약 200m 아래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84년 충주댐의 완공으로 현재 위치로 이주하였다. 옛 마을은 탑골, 골말, 부호 등을 불리었으며 50여가구가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다가 수몰이 되면서 타지로 이주해가고, 현재 교리는 17가구가 정착해서 생활하고 있다. 마을을 보다 효과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수몰 이전과 수몰 이후로 나누어서 살펴보도록 하자.
살아있는 공동체 - 수몰이전의 마을사회 교리는 석회암 지대여서 대추나무가 자라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어 단 한 그루도 실패하지 않았다고 한다. 마을 뒤편으로는 금수산(錦繡山)의 험준한 산세가 이어져 있고 마을 앞으로는 남한강의 긴 물줄기가 마을을 휘어 감고 있다. 마을 주변으로 논과 밭이 펼쳐져 있지만 경지면적이 협소하다. 논과 밭에 바위가 많아 농사짓기도 여간 불편하지 않다. 토질에 자갈과 모래가 바위와 곁들여 많으나 토지는 비교적 비옥한 편에 속해 고추나 대추 등 환금작물 재배가 잘 되는 곳이다. 1983년 현재 밭이 40정보, 논이 4.5정보이니 논농사는 거의 기대하기 어렵다고 할 수 있다. 일제시대 때만 해도 제삿날이나 쌀밥을 구경하였다고 했을 만큼 벼농사가 취약한 마을이다. 고추밭 면적이 전체 농경지 면적의 80%가 된다는 것을 보아도 고추농사에 얼마나 정성을 쏟고 있는가 알 수 있을 것이다. 교리는 소가 많은 마을로 유명하다. 수몰되기 이전 남한강변에 무한히 널려있는 초지(草地)를 이용하여 소를 길렀다. 대추나무, 감나무, 살구나무, 복숭아나무 등 자생한 과수들이 집 주위를 둘러친다. 금수산의 송이버섯도 빼놓을 수 없는 명산물이다. 다른 지역에서 생산한 것과 달리 향기가 그윽하다는 것. 가을에 비가 충분히 내리면 송이가 풍년이 들어 호당 30만원(1983년 현재) 수익은 문제가 없다.
교리에 자리잡고 있는 청풍향교는 공자(孔子)신위를 비롯하여 오성신위(五聖神位)의 34位의 위패가 봉안돼 있는 충북에서 손꼽히는 향교이다. 다른 향교에 비해 산간벽지에 위치해 재정이 부족하고 관리에 어려움이 있으나, 제천시 남부 5개 면(금성, 청풍, 수산, 덕산, 한수면) 유생들이 찬조금을 내어 매년 제사를 올리고 있다. 지난 세대에서는 청풍을 중심으로 하는 지방의 사설교육기관으로 겨울동안 젊은 유생들을 모아 교육하였다. 마을이 개촌되기 이전에는 주변에 절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지금도 마을근처에는 오래된 기와장이 많으며 훼손된 탑들이 보인다. 조선조 중엽을 지나면서 인근에 산재하던 사찰들이 폐지되고 빈터에 화전민들이 모여들어 땅을 일구어 생계를 유지했다. 지금으로부터 250여년 전에 금성면의 월림 정씨(鄭氏)가 이곳으로 이주하였다. 그는 다래나무숲을 쳐내고 밭을 일구어 콩을 재배했다. 월림 정씨가는 가세(家勢)를 확장하여 근처 성내리, 월굴리, 도화리 등에 많은 땅을 사서 큰 부자가 되었다. 현재 입향시조의 묘소는 한벽루를 마주보고 있으며 타고 다니던 말도 묘 옆에 안장해 말 무덤이 있다고 전해진다. 1983년 현재 교리에는 연일 정씨가 7가구로 대성(大姓)을 이루고 경주 최씨, 안동 권씨, 광주 노씨, 전주 이씨 등의 각성이 이루고 있다. 교리의 마을유래는 물태리에 있던 향교가 이곳에 이전해오면서 붙여졌으며 해방전까지는 금성면에 속해 있다가 행정구역 변경으로 청풍면 교리가 되었다. 북진과 인접해 있으면서도 북진리에 비해 교통이 불편한 점이 큰 단점이었다. 마을의 가장 큰 자랑은 천연수이다. 금수산 절벽에서 흘러나온 물은 철분이 많이 함유되어 위장에 좋아 장수하는 자가 많다는 것이다. 청풍 읍내가 강 건너로 길게 자리하고 있었고, 마을 나루터에는 차배와 인수선으로 청풍을 오갔다. 마을에서 향교는 마을이 훤히 내다뵈는 마을 중턱에 자리하고 있었고, 마을민은 향교의 상징적인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마을 입구에는 300년 이상 된 느티나무가 있었고, 이 곳에서 정월 초순경에 택일하여 마을제(서낭제)를 올렸다. 섣달 그믐 경에 마을에서 비교적 학문이 깊은 김삼봉씨가 택일하여 덕망있는 제관 1명과 축관 1명을 정하여 제사를 준비하였다. 제관은 육식을 금하고 매일 찬물에 목욕재계하며 제사날을 기다린다. 제의 참여자는 동수(洞樹) 근처에다 금줄을 치고 제일 일주일 전부터 금기에 들어간다. 마을제를 수행하는 당집은 없었으며, 동제를 올리고 난 다음날 마을민이 모여 대동회를 개최하고 음복을 하였다. 교리에는 수몰되기 이전까지 마을 동제(洞祭)를 매년 정월 초순에 올려왔다. 소금배가 해방전후시기 까지 옛 한벽루에 정박하였고, 이 배를 통해서 각종 어물과 수산물들이 유통되었다. 소금배를 통해서 유입되는 각종 수산물은 이 곳의 중간상인들을 통해서 청풍장(읍내장, 안암장)으로 유입되고, 현지의 각종 농산물과 직교역 되었다. 이 곳에서는 주로 잡곡류와 쌀로 현물거래가 이루어져 왔으며, 소금배는 한달에 1∼2회 정도 정박하였다. 소금배가 정박하는 날은 동네 아이들의 유일한 구경거리였고, 강 건너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기 위해 모여들었다. 청풍 근교에 안암장과 청풍장(읍내장)이 있었고, 그 규모가 컸기 때문에 이곳의 마을민들은 대부분 이 장터를 이용하여 다양한 거래를 해왔다. 황석, 한수, 수산, 원주 등지에서 소를 몰고 와 거래했기 때문에 이 곳에서 우시장(牛市場)이 활발했고, 마을민의 생업수단이 농업이었기 때문에 우시장은 큰 단위의 현금거래가 이루어지는 장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