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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기행

제천문화원 마을기행 입니다.

제천의 역사와 전통을 알아 볼 수 있는 게시판 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제천의 지명과 행정구역의 변화 지역적 특성과 산물 등을 알려드립니다.

작성일 : 22-07-26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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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학면] 시곡리[柴谷里]
 글쓴이 : 문화원
(조회 : 3,349)  
시곡리는 송학산과 무등산이 이 둘러 있는 전형적인 농촌이다. 송학산은 예전에 ‘대덕산’이라 불리던 곳으로, 산에 소나무가 많고 학이 소나무에 둥지를 틀었다 하여 ‘송학산’이라 하였다고 한다. 시곡리는 본래 제천군 북면 지역으로서, 나무가 많으므로 ‘시곡(祡谷)’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금곡리(金谷里)와 칠종리(漆宗里)를 병합하여 ‘시곡리’라 해서 송학면에 편입되었다. 현재 송합면 소재지이다. 1980년 4월 1일 제천시 승격에 따라 제원군 송학면 시곡리가 되었다가, 1995년 1월 1일 시군통합으로 제천시 송학면 시곡리가 되었다.
  자연마을에는 원마루, 정암, 새말 등이 있다. 송학면 시곡리는 담골을 기준으로 해 입석리와 시곡리로 구분된다. 또 시곡리는 다시 안에서 4개리로 나뉜다. 송학면사무소가 위치한 곳은 시곡2리이고, 오인용효자비와 우기정창의기념비 유적이 위치해 있는 곳은 하천부지로 시곡4리이다. 마을의 맞은편에는 ‘화미산’이라는 산이 있는데, 화미산은 꽃 ‘(花)’자 아름다울 ‘미(美)’자를 써서 화미산이라고 이름 지어졌다고 한다.

◎ 시곡리 지명유래

● 가무덤 → 개무덤
● 가랫골[추동] : 개무덤 동북쪽에 있는 마을, 가래나무가 많았음.
● 가창산(歌唱山) : 무동산 뒤쪽에 위치한 산.


  가창산(歌唱山)은 『여지도서』 에 “오작산(烏鵲山)은 일명 가창산으로 용두산의 남쪽 줄기이다. 현에서 동쪽으로 18리에 있는데, 꺾여 영춘(永春)의 중현(重峴)을 이루고, 다시 꺾여서 서쪽으로 부곡산(釜谷山)을 이른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 개무-덤[가무덤] : 시곡 동남쪽에 있는 마을. 개무덤이 있었음.
● 골미산[화이산, 꽃미산] : 쇳골의 남쪽에 위치한 산으로 골미산으로 구전되어 붙인 명칭.
● 금곡리(金谷里) → 쇳골.
● 기픈골[심곡동] : 송학산 남쪽에 있는 마을로 골이 깊어 깊은골.
● 너다리[널다리, 너더리, 판교] : 기픈골 남쪽에 있는 마을, 어귀에 널반자로 놓은 다리가 있었다골 함.
● 너더리 → 널다리.
● 너더리들 : 깊은골에서 너더리 앞 지역의 들.
● 널다리 → 나다리.
● 느릅재[유현] : 너다리 동남쪽에서 강원도 영월군 서면 쌍용리로 가는 재. 느릅나무가 많았다고 함.
● 덕재산(호랑바위산) : 쇳골이 동쪽에 위치한 산으로 호랑이와 비슷한 바위가 있어서 붙인 명칭.
● 돌무덤 : 칠종마을에 있는 돌의 무덤.
● 떡할미터 : 떡 장수 할머니의 무덤이 있었다고 붙여진 이름.
● 목고개 : 깊은 골에서 안골로 가는 고개.
● 뫼막골 : 산 끝자락이라 하여 붙인 명칭.
● 무동산 : 쇳골을 중심으로 동남쪽에 위치한 산.
● 물방아터 : 미륵대기 앞 지역.
● 미륵대기 : 미륵불이 위치한 곳을 중심으로 한 지역.
● 방아다리¹[양지 방아다리, 양방학] : 시곡 서남쪽 양지에 있는 다리.
● 방아다리²[방학교] → 무도리의 ‘방아다리’
● 방아다리못 : 방아다리에 있는 저수지. 원래는 작은 못이었는데 1966년 5월 30일 미국의 도움을 받아 저수지로 만듦, 몽리 면적 2,000평.
● 방학교(放學橋) → 방아다리.
● 벌담 : 시곡리 벌판에 있는 마을.
● 범덕골 : 호랑이가 자주 출현하여 붙인 명칭.
● 삼층석탑(三層石塔) : 소악사터에 있는 삼층석탑. 일제피탈시 12개의 사리(舍利)가 발견되었는데. 총독부에서 가져갔다 함.
● 새말 [신촌] : 정바우 동남쪽에서 있는 마을.
● 속개들 : 깊은골 앞 무도천 건너 들넠.
● 송학산(松鶴山) : 송학면 시곡리와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 용석리에 걸쳐 있는 산으로, 수종(樹種)이 거의 소나무로 이루어져 있는 산으로, 학이 소나무에 둥지를 틀고 있다 하여 송학산(松鶴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높이는 819m임


  송학산(松鶴山)은 문헌에 대덕산(大德山), 소악산(小岳山)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여지도서』 에 “대덕산은 현에서 북쪽으로 21리에 있으며, 용두산의 동쪽 지맥이다. 지금은 소악산이라고 칭하며, 동쪽으로 낮아지면서 사슬치를 이룬다.”라고 하였다. 제천 쪽 송학산에는 강천사(江天寺), 월명사(月明寺) 등의 사찰이 자리 잡고 있으며, 삼층석탑만 남아 있는 소악사지(小岳寺地)가 있다. 산 정상에 서면 동북쪽으로 굽이쳐 흐르는 주천강(酒泉江)이 내려다보이고, 남쪽으로는 무등산-왕박산-가창산-승리봉 등이, 서쪽으로는 용두산-감악봉이 첩첩이 포개져 있다. 서쪽 멀리로는 원주 치악산도 보인다. 산자락에는 한때 8개의 채석장이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질 좋은 화강암이 생산되었다.


● 쇳골[금곡리] : 정바우 동남쪽에 있는 마을.
● 수구막 : 마을 입구를 숲이 막았다고 붙인 명칭, 현재 마을회관이 위치한 곳.
● 시곡(柴谷) → 시곡리.
● 신촌(新村) → 새말.
● 심곡동(深谷洞) → 기픈골.
● 안골 : 깊은 골에서 동쪽에 위치한 골.
● 양방학(陽放鶴) → 방아다리.
● 양지방아다리 → 방아다리.
● 엄나무꼴 : 용터지기 윗 지역.
● 옻마루 [칠종] : 시곡 동쪽에 있는 마을. 옻나무가 많았음. 일설에 의하면 원급이상 벼슬아치가 살았다고 원마루가 되었다고도 하며, 99칸 집에 용인 이씨가 살았다고 전함.
● 마루[칠종] : 시곡 동쪽에 있는 마을, 옻나무가 많았음.
● 옻물 : 칠종마을에 있는 약수물로서 나병환자가 씻으면 낳는다고 하여 붙인 명칭.
● 용터골(용터지기) : 잔다리 북쪽의 골짜기.
● 월명사(月明寺) : 옻마루 서북쪽에 있는 절. 1929년 4월 30일 창건되었다. 대웅전, 삼성각, 범종각, 요사 2동이 있다.
● 유현(楡峴) → 느릅재.
● 음지 방아다리²[방학교] → 무도리의 ‘방아다리’
● 인간바위 : 삿갓봉 아랫부분에 위치한 바위로 사람과 비슷하여 붙인 바위 명칭.
● 자라봉 : 쇳골을 중심으로 덕재산의 앞부분의 봉우리가 자라 등과 비슷하여 붙인 명칭.
● 장등고개 : 깊은골에서 너러리로 가는 고개
● 장터골 : 장치기 놀이를 하던 터.
● 정바우¹(正岩) : 정바우가 있는 마을.
● 정바우²(正岩) : 옻마루 동 냇가에 있는 바위. 바위를 깨려고 정으로 쪼았더니 바위가 피처럼 붉은 빛깔로 되므로 그만 두었다 하는데 지금도 붉은 편임.
● 정지골 : 너더리 북쪽의 골짜기. 지형이 솥뚜껑과 비슷하여 붙인 명칭, 병자년 수해로 7가구가 매몰되었다 함.
● 지만교 : 송학초등학교 김치중이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아들 지만군에게 비만 오면 학교를 가지 못하는 사연을 담은 편지를 보내 1966년 다리를 건설하고 지만교라 칭하였음.
● 추동(楸洞) → 가랫골.
● 칠종(漆宗) → 옻마루(원마루라고도 함).
● 판교(板橋) → 너다리.

◎시곡리 문화유산

⦁대덕산성(大德山城)
소악시가 있었던 산의 남쪽 경사면까지 에워싼 석축의 성터로서 『조선보물고적사료(朝鮮寶物古蹟資料』 에 “송학면 시곡리에 있으며···, 계곡의 입구를 횡단하여 석성지(석성지)가 있음. 석벽은 거의 붕괴됨.”이라 기록되었다. 산성은 계곡부만을 축성하였으나 현재 모두 붕괴되어 그 흔적을 찾기 힘들며 나머지 성벽부는 자연능성을 그대로 이용하고 있다. 영월과의 경계에 위치하여 교통로가 합쳐지는 요충지의 중앙이며, 전망이 좋은 위치에 있으나, 사찰과 관련된 성터인지 군사적 용도의 산성인지 정확한 용도를 모르고 있다.

⦁강천사(江天寺)
송학산 정상부에 있는 사찰로 1945년 7월 15일 노노당(老老堂) 이대휘(李大徽) 선사가 지금의 위치에 초막을 짓고 수행 정진과 함께 기도를 시작하면서 창건되었다. 1800년에 제작된 제석⦁천룡탱화가 있으며, 근래에 조성된 대광면전, 범종각, 요사채, 나한전, 범종각 등의 당우가 있으며, 지금도 불사(佛事)가 진행 중이다. 현판은 선필(禪筆)로 유명한 통도사 홍경(弘經)스님의 글씨이다. 절 마당에서 내려다보면 제천 시내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오는 전망 좋은 사찰인데, 강천사에서 약 0.5km정도 아래쪽에 고려시대 정터인 소악사지(小岳寺址)가 있다.

⦁나무아미타불각자(南無阿彌陀佛刻字)
바위에는 ‘南無阿彌陀佛’ 6자가 각자되어 있고, 아래에는 ‘정해육년(丁亥六年)’이라고 쓰여 있다. 이 바위 아래로는 경사가 습한 계곡이 있으며, 이곳에서는 제천 시내가 한 눈에 조망된다. 새겨진 글씨의 내용으로 보아 사찰과 관련된 것임을 알 수 있는데, 가장 가까운 사찰이 소악사이므로 소악사와 관련된 유물이 아닌가 추정된다.

⦁석조여래입상(石造如來立像)
깊은 골 마을 앞 경작지 중앙에 서 있는 상으로 대좌와 광배를 갖추고 있으나 많이 파손되어 세부표현을 정확히 알 수 없는 상태다. 원래의 위치는 아니나 주변의 사지에서 봉안했던 상으로 추정되며, 1999년도에 도난되었다가 2002년도에 다시 찾아 세운 것이다. 불신(佛身)과 광배는 하나의 돌에 조각되어 있고, 대좌는 따로 만들어져 발부분이 끼워져 있다.
얼굴은 동그란 형태로 뺨에 살이 통통하게 오른듯하나 상호(相好)는 마멸로 인해 거의 알아볼 수 없다. 머리는 소발(素髮)이며 육계(肉계)가 희미하게 있다. 어깨는 넓고 허리는 잘록하여 가슴과 배분에는 양감이 있다. 대의는 편단우견(偏袒右肩)으로 입었고 허리 아래 옷자락이 옆으로 넓다. 왼손은 세 번째. 네 번째 손가락을 엄지와 맞대고 손바닥이 보이도록 가슴까지 들어 올렸고, 오른손은 손가락을 모은 채로 배에 대고 있다.
광배는 불신을 양각하고 남는 나머지 면에 표현하였다. 두 줄이 융기선으로 원형의 두광을 표현하였다. 두광과 신광의 내부에는 화염문이 표현되었으나 마멸되어 알아보기 어렵다. 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대좌는 조각수법이 좋지만 불신은 조각수법이 조잡하고 마멸도 심하다. 볼륨감이 큰 복련의 연화대석으로 윗부분에 2단의 팔각받침이 모각되어 있고 그 위에 불상의 발이 조각되어 붙어 있다. 이처럼 불신과 대좌 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대좌는 조각수법이 좋지만 불신은 조각수법이 치졸하고 마멸도 심하다. 따라서 대좌는 원래의 것으로 보이고 불상은 일단 파손된 후 후대에 다시 세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풍화와 인위적으로 훼손되었으나 전통적인 통일신라 여래입상의 양식을 따르고 있지만 조각기법은 양감이 떨어지고 옷주름이 형식적으로 표현되었고, 대자의 연판(連板)도 통일신라 전성기의 것과 비교해 볼 때 양식적(樣式的)으로 쇠퇴기(衰退期)에 접어든 시기의 조각수법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제작연대는 고려초기 무렵 제작으로 추정된다. 제천 시곡리 석조여래입상은 불상 및 연화문(蓮華門) 대좌의 조각 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전형적인 불상의 지방 양식화되는 변천 모습으 알려주는 석불로 그 작례가 많지 않은 귀중한 자료이다.

⦁소악사지(小岳寺址)
『신증동국여지승람』 제천현 불우조(佛宇條)에 “소악사가 대덕산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여지도서(輿地圖書)』 제천현 사찰조에 “소악사는 제천현 불똑 십오리 대덕산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절이 있었던 곳은 동남향으로 트이고 남서북의 삼면이 산으로 둘러져 있는 곳에 300평 규모의 3단을 이루고 있는데, 현재는 밭으로 경작되고 있다. 상단에 금당지가 있었으리라 보이며, 다듬지 아니한 주초석이 있다 북서쪽 구석에 돌맷돌의 밑 부분이 남아 있으며, 동북쪽 끝으로는 우물이 있다. 하단부 중앙에는 쓰임새를 알 수 없는 115×138cm 규모에 두께 15cm되는 대석이 있는데 양면으로 깨어져 있다. 이 사지로부터 북쪽으로 10m 떨어진 언덕 위에 나말려초로 추정되는 석탑이 있고,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해당하는 기와편이 다수 찾아지고 있어 고려시대에 창건하고 조선중기에 폐사된 듯하다. 현재 사지는 앞면(동남쪽)에 산 밑 마을과산 정상부에 최근에 이룩된 강천사로 통하는 좁은 길이 있다.

⦁소악사지(小岳寺址) 3층석탑
석탑의 높이는 220cm이며 단층 기단위에 3층 탑신을 세우고 정상에 상륜부(相輪部)를 올려놓은 일반 석탑이다. 현재 초층옥신은 상부가 두 개로 깨졌는데 보완한 것인지 확실치 않으며, 상륜부는 복발(覆鉢)만이 남아 있고, 그 외는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단층 기단은 1×1m의 정방형으로 비교적 얕고 탑신부는 옥신과 옥개가 각각 한덩이인데 초층옥신이 높은 편이고, 각층 옥신에는 우주가 모각되었다. 옥개받침은 각층 4단이고 낙수면의 경사는 완만하다. 상륜부는 모두 결실되고 복발만 남아 있다. 이 석탑의 양식이 단층기관이고 층급받침이 단인 점으로 보아 나말려초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소악사지에는 주춧돌과 이 3층 석탑만이 남아 있으며, 1932년경 일본인들이 산 밑 부락에서 전염병이 발생하자 환자를 이 사찰로 보내자 승려들이 도치한 후 이 절이 없어졌다고 한다.

⦁소악사지 마애각자
소악사지에 들어서기 전 북쪽 계곡에 있는 바위의 동쪽면에 마애각자가 새겨져 있다. 높이 2.2m, 폭 3.1m(각자가 새겨진 면)의 화강암 바위의 평평한 자연면을 이용해 비교적 얕게 글씨를 새겼다. 세월의 흔적으로 인한 마멸이 있어 몇몇 글자들은 확인 어려운 것도 있지만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大德山小岳寺佛粮田畓人屬置簿
〇〇比丘所〇日字香一卜八二斗落伏在O〇洞
〇〇比丘〇〇〇〇〇寺字沓七卜八大斗落口
居士李碩基果字沓七卜四七斗落口在故岩
房吉元(所)〇(成)字沓五斗落口在左宜實
咸OOO〇元木事字沓七卜大斗小岳野在
智得天竭字沓三 卜四二斗山〇
金武吉日字田二 卜三一日耕〇内洞
康熙 二十四年 乙丑 七書

이 마애각자는 강희 24년 즉 1685년에 제작한 것으로 소악사의 시주 목록을 적은 글로 보인다. 여기에는 시주자로 비구 2명과 이석기, 방길원, 함〇〇, 지득천(대), 김무길 등 7명의 이름이 보이며, 17세기 후반에 이미 전답에 대한 구획을 나누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토지에 대한 단위로 이 보이고 있어 당시의 사회 경제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또한 이와 같은 시주 목록으로 보건대 소악사는 당시 규모가 있었던 사찰로 추정된다.
한편 『여지도서(輿地圖書)』에서 소악사 내용과 동일한 내용이 확인됨에 따라 이 사지의 사찰명이 소악사임이 확실해졌으며, 지금의 송학산(松鶴山)은 예전에는 대덕산(大德山)으로 불리워졌음도 확인되었다. 또 17세기 후반까지는 소악사가 법맥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쇠골 서낭당
쇠골 서낭당은 마을 안쪽에 위치하고 있다. 당집은 없으며, 느티나무에 금줄을 둘러놓았다. 쇠골 서낭당에서의 당고사는 매년 정월 초에 지낸다. 제관 및 축관은 생기를 봐서 선정하며, 금줄을 쳐서 금기를 철저하게 지킨다. 제물로는 백설기 한 시루⦁포⦁밤⦁대추⦁곶감 등을 진설한다. 제의의 진행은 유교식 절차에 따라 초헌 – 독축 – 아헌 – 종헌 – 소지 – 음복의 순으로 이루어진다.

⦁시곡리 사지
 시곡리 사지는 남향을 향해 있으며, 총 3단의 석축대로 이루어진 대지에 자리하고 있다. 사지의 총면적은 약 2,000여 평으로 넓은 규모이며, 사지의 가장 북쪽에는 금당지로 추정되는 건물지가 있는데, 이곳의 면적은 약 350여 평 정도이다. 석축대의 규모는 사지의 입구에서부터 첫 번째 석축대의 높이(가장 높은 곳)가 약 220cm이며, 두 번째 석축대의 높이가 180cm이고, 세 번째 석축대의 높이가 90cm이다. 석축대는 커다란 돌을 쌓은 후 그 틈을 작은 돌과 흙으로 메워 쌓아 올린 것으로 성벽과 같이 견고하다.
 사지 내에서 수습되는 유물은 주로 조선시대의 기와편과 백자편이 대부분이며, 초석이나 건물의 대석(臺石)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여지는 석재들이 사지 곳곳에 산재되어 있다. 깊은골 마을 사람들은 이 시곡리 사지를 가리켜 ‘강릉 가는 길에 있는 절터’라 하는데, 아마도 강원도 영월로 가는 교통로상에 자리한 조선시대의 사찰터임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시곡리 유물산포지 ①
 시곡리 3구 앞의 밭으로 이 밭에서 수습된 유물은 고려시대 변형 어골문 기와 조각과 회청색 경질토기 구연부 조각 등이 수습되었다.

⦁시곡리 유물산포지 ②
 유물은 마을 주변의 밭에서 토기와 자기 조각이 수습되었다. 지형 조건으로 보아 마을 뒤쪽의 야트막한 구릉에 무덤이 자리하기에 알맞은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다. 이 유적의 북동쪽으로는 입석리 선돌이 있으며, 남서쪽으로는 석실분이 위치하고 있다.

⦁오인용효자비(吳仁庸孝子碑)
 오인용의 본관은 흥양(興陽), 자는 우원(宇元)으로 7대 독자이다. 그는 7세에 부친상을 당하고 편모 하에서 성장하여 학문은 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천성이 선량하고 효성이 지극하여 모친 생전에는 효를 다하였고, 별세하자 3년간 시묘하였다. 1951년 4월 61세로 별세하였다. 송한1리에 구비가 있고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하여 1990년 현재의 위치에 새로운 비석을 건립하였다. 새 효자비는 시곡4리로 들어가는 길가 작은 공원에 승지 ‘우기정창의숭모비’와 함께 세워져 있다.

⦁우기정창의기념비(禹冀鼎倡義紀念碑)
 제천에서 영월을 가다가 송학면을 벗어나면서 좌측을 아시아 시멘트 가는 길을 따라 철길을 넘어 200m정도 가면 우측 도로변에 조성된 공원에 오인용효자비와 함께 위치하고 있다. 우기정은 본관은 단양(丹陽)이고, 자는 이존(而尊)으로 승지 벼슬을 버리고 송학면 입석리로 낙향하여 있다가 1895년 유인석의 병의 좌군장이 되어 활동하였다. 비는 1985년 제천 유림에서 세웠다.

◎ 시곡리 이야기

⦁옻마루의 유래
 제천시에서 강원도 영월 방향으로 한 20리 가면 제천시 송학면 시곡리 옻마루라는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이 생긴 것은 대략 이삼 백년은 된다고 하는데 지금 옻마루라고 하는 사람보다는 ‘원마루’라고 부르는 사람이 더 많다. 이 마을이 생겨나기 전에는 이 일대는 옻나무가 많은 산골이었다.
 옛날 한 선비가 이곳을 지나고 있었다. 이 선비는 속병을 앓다가 강산이나 유람하여 좋은 약재나 구해보려고 길을 떠나 이곳저곳을 지나 마침내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선비는 몹시 피곤한데다가 속도 불편한 터에 갈등마저 심하여 땀을 드리려고 나무그늘 밑에서 앉아 쉬기로 했다. 한참 쉬고 있는데 어디선가 졸졸졸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산 속에 몹시 목이 말라 물소리가 나는 곳으로 가보았다. 옻나무가 빽빽이 들어 선 속에 바위가 있었고 그 바위 밑에서 맑은 샘이 솟고 있었다. 선비는 기다시피 하여 옻나무 사이를 빠져나가 샘물을 실컷 마셨다. 여느 때 물맛보다 향긋하고 시원하여 막혔던 속을 씻어 내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물을 마신 선비는 벌렁 누워서 잠이 들었다. 그런데 꿈속에 머리와 수염이 하얀 할아버지가 나타나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네가 내 물을 마셨으니 병이 나을 것이다.” 곧 선비는 자기 집에 돌아갔는데 신기하게도 선비의 속병은 씻은 듯 나아버렸다. 집에 돌아온 선비는 샘물을 먹은 일을 얘기했다. 이것을 들은 마을 사람들 중에 속이 나쁜 몇이 선비가 가르쳐준 샘물을 마셨더니 그 사람들의 병도 깨끗이 나았다. 이런 소문이 이 동네 저 동네 퍼지자 병이 있는 사람이 수없이 찾아가 그 샘물을 마시고 크게 효험을 보게 되었다. 그러더니 조정의 어느 고관이 이물을 마시고 병이 나았다는 소문이 퍼지자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꾸역꾸역 모여들었다.
 그러면서부터 이 약수터는 ‘약물래기’라 불리었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까닭에 이곳에 집을 짓고 이사하여 장사하는 사람이 생겨나기 시작하자 얼마 안있어 마을이 형성되었다. 약물래기 약수터 근방은 옻나무가 많았으므로 ‘옻마루’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가창산의 유래
 가창산은 제천시 두학동 장치미골 동쪽에 있는 산으로 단양군 어상천면과 접경에 위치한다. 연산군하면 폭군으로 이름이 나있다. 연산군(조선 10대왕 재위, 1496~1506)은 선비들을 죄 없이 살해 또는 귀양 보냈다. 선비들은 당쟁으로 많은 파벌로 갈라지고, 간신배들은 연산군의 독재를 부채질하는 바람에 뜻있는 선비들은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갑자사화(甲子士禍)로 부모를 잃은 서울의 명문집 두 아들이 양평 용문산으로 스승을 찾아 길을 떠났다. 용문산에서 열심히 공부에 몰두한 젊은이는 10년이 넘어 두 젊은이의 나이가 20을 바라보게 되었다. 어느 삼짇날 스승은 더 가르칠 것이 없으니 이곳을 떠나라고 하였고, 두 젊은이는 속세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들은 절대로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학자로써 후진을 가르치기만 하자고 맹세하였다. 당시 사회가 두려워 벼슬을 단념하고 초야에 묻혀 사는 선비가 많았던 때였다. 두 친구는 헤어져 자기 갈 길을 찾아 나섰다.
 얼마의 세월이 흐른 뒤 한 친구는 대장부로서 한 번 벼슬길에 나아가 자신의 높은 포부와 경륜을 펴보고 싶었다. 때마침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연산군이 쫓겨나고 중종이 등극하여 알성시가 있었다. 이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차차 벼슬이 높이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편안하고 부유한 새오할을 하는 동안 문득 우정을 배신한 자기 자신을 깨달았다. 친구를 찾아 사과해야 하겠다고 결심하고 각지의 수령방백에게 친구를 찾도록 부탁하였다. 그리고 얼마쯤 지나 제천현에 산다는 강원감사로부터의 소식이 있었다.
 그는 즉시 조정으로부터 말을 얻어 관복을 벗고 도포차림으로 친구를 찾아 나섰다. 마침내 제천현에서 30리 가량 떨어진 곳에 있는 산에 오르게 되었을 때 멀리 통나무집 한 채가 나무사이로 보였다. 세상을 등지고 은거하고 있는 친구의 집이었다. 낭랑한 글 읽는 소리가 집안에서 흘렀다. 몇 번인가 “이리오너라”라고 친구를 불렀다. 친구는 버선발로 뛰어나와 얼싸안아 주었다. 두 사람은 눈물만 흘리고 말을 잊었다. 방에 들어가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친구에게 사과하고 용서를 빌었다. 친구는 생각보다는 너그럽게 자기의 한 일이 잘했다고 용서해 주었다. 그리고 이도(吏道)에 관해서 간직했던 경륜을 들려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단칸방이니 어쩌랴 친구의 부인은 치마로 방의 반을 막았다. 저녁은 꽁보리밥에 감자를 섞어 산채로 만들어 왔다. 맛있게 먹고, 정담을 나누며 시를 지어 서로 화답하여 무릎을 치고 서로 칭찬하는 남편과 친구의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깊은 우정 속에 친구의 아내도 점차 빠져 들었다. 아내는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친구의 아내는 가만히 가야금을 벽에서 내려 무릎 위에 얹어놓고 두 사람의 정담에 맞춰 성심을 다해 가야금을 뜯었다. 높고 낮고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음률에 남편의 친구도 넋을 잃었고, 밤을 새던 풀벌레도 하늘의 달도 가야금 음률에 넋이 빠졌다. 이렇듯 한 여인의 간절한 지성으로 친구를 즐겁게 했다고 하여 뒷 사람들은 이 산을 가창산으로 불렀으며, 가창산은 지금도 제천과 단양의 경계에서 여전히 정취어린 모습으로 서 있다.

◎ 시곡리 마을신앙 - 송학산 산신제(2005년)

⦁송학면 산신제 제관분정기(祭官分定記)
 송학면 산신제는 2000년 송학면 한마음 대회 후 당시 마을 사람들이 의기투합하여 모시게 되었다. 2005년 당시 6번째 산신제를 진행하였다. 2001년부터 노인회가 주최하였다.

 초헌관 : 노인관 송학면 분회장 이필원(李弼元)
 아헌관 : 송학면장 김동석(金東錫)
 종헌관 : 시의회부의장 최종섭(崔鍾燮)
 축 관 : 조봉구(趙鳳九)
 집 례 : 김경수(金敬洙)
 좌집사 : 안병일(安炳一)
 우집사 : 이대희(李大熙)

⦁제당과 배경
 제당에는 80×100cm정도의 대리석 제단과 그 뒤에 산신제당이라고 쓴 비석을 세워 놓았다. 산신제당의 5m 정도 뒤, 위쪽에는 소악사지 3층 석탑이 있다. 비석을 정면으로 보고 왼쪽 분지에는 절이 있었을 듯한 터가 있는데 사람들의 이야기로는 소악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그 터는 층계식으로 되어 있었다. 절터였다고 짐작된다. 약수터로 사용되던 곳도 있는데 2005년 당시에는 농작물을 재배하고 있었다.

⦁산신제 진행 내용
 먼저 제관(祭官)을 선정한다. 제관은 미리 선정하는데 선정된 제관은 금기를 지킨다. 일주일 정도 몸을 단정하게 한다. 그리고 제의 전날에는 목욕재계를 한다. 제비는 22개 마을 노인회에서 찬조금 형식으로 한다. 산신제에 소요되는 경비는 60-70만원이다. 제물의 준비는 면사무소 주도로 이루어지고 마을 새마을회와 노인회에서 준비한다. 산신제 당일 제물을 진설하고 제의를 진행한다. 산신제의 순서는 강신례(초헌관) - 초헌 - 독축(축관) - 아헌 - 종헌 - 송축원(집례) - 분축(축관과 우집사) - 음복으로 이어졌다. 산신제가 끝나고 노인회의에서 운영과 결산을 한다.

⦁축원문
 복이길월양신(伏以吉月良辰)을 택(擇)하여 송학면(松鶴面) 수호신(守護神)이신 송학산신지위(松鶴山神之位)께 삼가 면민(面民)이 합심(合心)하여 지극정성(至極精誠)으로 빌어 원(願)하나이다. 태극(太極)이 조판하야 양의(兩儀)를 생(生)하고 양의(兩儀)가 사상(四象)을 생(生)하고 사상(四象)이 팔괘(八卦)를 생(生)하며 팔괘가 육의(六義)를 이루면 육의(六義)가 오행(五行)을 이루고 오행(五行)이 만물(萬物)을 이루어 금석초목조수권총사령(金石草木鳥獸권총사령)과 만물(萬物)의 영장(靈長)인 인간(人間)을 생하시고 인간으로 효체충신부국안민케 하시고 수신근행하여 가정과 사회를 화평케하고있으나 무지한 인간은 신의 가호 없이는 마음의 충족을 득할길 없나이다. 연하온데 무지한 인간이 영산을 파괴솔향하여 보기 흉이로소이다.
 태고로부터 이 지역을 수호하여 주신 송학산신이시여 노여움을 거두시고 영세득안하시어 송학면 가가호호 삼세팔난 관제부설 병새수해화해 소멸하시어 아무런 변고 없이 무사안과 태평하도록 보살피어 주시옵고 유일한 지역의 기업체인 아세아시멘트공장 일년 삼백육심오일 안전사고 하나 없이 가동되어 전국제일의 생산량을 올리도록 명찰하여 주시고 관공서도 무사안과 성실근면케 하시고 교육에 열중선도하는 면내학교의 학생일입증원 연구발전하도록 가호하시고 중소기업도 흥왕일이 번창하고 상가에는 빈객이 만발하고 농가에는 풍등연연 풍요로운 생활을 하도록 보살펴주시고 대로에 주야막론 질주하는 차량이 사시무사고 운행할 수 있도록 가호하여주심을 복원하나이다.
 송학산신이시여! 금일의 제물은 비록 피박하오나 면민의 정성은 지극하오니 응감하여 명찰하소서.

◎ 원마루지구 전원마을

제천시에는 쾌적한 주거환경 조성과 도시민의 농촌 유입 촉진을 위해 시곡리 일대 6만2천240m2에 대해 농림수산식품부로부터 마을정비구역 지정을 받아 국비 등 모두 135억원을 투입, 원마루지구 전원마을 조성사업을 추진키로 했다. 시는 이를 위해 올해 초 기본계획을 확정한 데 이어 오는 2008년 8월 기반시설과 주택건축을 시작해 2011년 준공과 함께 모두 51가구를 입주시킬 계획이다.
 특히 이 사업은 시가 두 번째로 전원마을을 조성하는 것으로 시곡리는 사업성이 우수하고 도시민이 바라는 전원마을의 지역적 이미지와 사업부지의 잠재적 가치를 갖춘 곳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 정주기반인 마을, 교육과 소통의 공간인 학교, 생산과 일터로서의 조합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계돼 자립형 지역생활 모델을 구현하는 전원마을로 자리매김할 전망이다. 한편, 이 마을을 친환경 주거공간의 미래형 농촌마을 모델로 삼아 앞으로 도시민과 은퇴자 등의 농촌 정착을 유도하기 위해 수요자의 요구에 맞춘 전원주거 단지를 조성하는 등 합리적 토지이용 및 기반시설을 갖춘 쾌적하고 풍요로운 주거공간으로 만들어 나갈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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