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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기행

제천문화원 마을기행 입니다.

제천의 역사와 전통을 알아 볼 수 있는 게시판 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제천의 지명과 행정구역의 변화 지역적 특성과 산물 등을 알려드립니다.

작성일 : 22-07-26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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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학면] 장곡리[長谷里]
 글쓴이 : 문화원
(조회 : 2,644)  
장곡리는 본래 제천군 북면 지역이다.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번자리(番自里)와 일곡리(日谷里)를 병합하여 긴 골짜기 안이 되므로 ‘장곡리’라 해서 송학면에 편입되었다. 1980년 4월 1일 제천시 승격에 따라 제원군 송학면 장곡리가 되었다가, 1995년 1월 1일 시군통합으로 제천시 송학면 장곡리가 되었다.
 제천시 북동쪽에 위치하고, 강원도 영월군과 경계한다. 전형적인 시골이며 남한강이 흐르고 있다. 자연 마을로는 음달편, 양지편, 샘골 마을 등이 있다. 음달편 마을은 음지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양지편 마을은 볕이 잘 드는 곳에 위치한다 하여 이름 붙여지게 되었다. 샘골 마을은 맑은 물이 나는 샘이 있다하여 불려진 이름이다.

◎ 장곡리 지명유래

⦁가두득[가둑, 음달편] : 번자리 남쪽 둔덕 음지에 있는 마을.
⦁가둑 → 가두둑.
⦁고자골 : 샘골과 번자리 사이의 골. 옛날에 연못이 있었으나 홍수가 우려되어 없애버렸다고  전함.
⦁나라치 : 가둑에서 삽둡으로 가는 고개. 무덤을 만들려고 땅을 파던 중 넓은 돌이 나왔는데 그 돌을 캐니까 꿩이 날아갔다고 함.
⦁노적봉(露積峯) : 일골 앞에 있는 산. 봉우리가 노적가리처럼 생겼다고 함.
⦁도동골 : 나라치 가는 골짜기
⦁마골 : 마골에서 명마가 태어났으나 말을 탈 장수가 없어서 말이 울다가 명마등(말마등)에서 죽어 묻었다고 함.
⦁먹구랭이 : 샘골 북쪽의 뒷산. 구렁이가 나타나면 비가 온다고 함.
⦁명마등(말마등) : 아세아 시멘트 공장앞 개천 건너의 산.
⦁미륵불(彌勒佛) : 번자리 서남쪽 길가에 서 있던 돌미륵. 밑 부분은 땅 속에 묻혔음. 높이 4.5자.
⦁미륵골 : 미륵이 위치한 곳으로 마골 아래 지역.
⦁ 바둑바위 : 원호 선생이 단종에 대한 충절로 혼자 그리움을 달래기 위해 바둑을 두었다는 바위.
⦁번자리(番自里)[양지편] : 장곡리의 중심 되는 마을.
⦁살당박이 : 가둑마을 뒤쪽의 들.
⦁삽둔(揷屯)[삽동] : 번자리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강원도 영월군 서면 쌍룡리와 인접해 있음.
⦁삽현(揷峴) → 삽둔고개.
⦁삽동(揷洞) → 삽둔.
⦁삽둔고개[삽현] : 일골에서 삽둔으로 가는 고개.
⦁삽둔 : 삽모양의 언덕.
⦁샘골[천곡동] : →가두둑 서쪽에 있는 마을. 수원이 좋으며 맑은 물이 나는 샘이 있음.
⦁샘골고개[삽현] : 샘골에서 가두둑으로 가는 고개
⦁아이고바위 : 관란정 아래 부분에 있는 바위. 주변의 경관이 뛰어난 곳으로 유명하고, 원호가 단종의 승하를 애통해 하며 이 바위에서 곡하였다 하여 붙여진 이름.
⦁안꼴 : 번자리 북쪽 안에 있는 골짜기.
⦁앞들 : 번자리 앞에 있는 들.
⦁양지편 → 번자리.
⦁음달편 → 가두둑.
⦁음지말 : 가득 마을 아래 마을.(1972년 수해로 마을은 소멸됨,)
⦁일골[일곡동] → 장곡리의 으뜸되는 마을.
⦁일곡동(일곡동) → 일골,
⦁임자동 : 1972년 수해로 인하여 형성된 마을(임자년에서 유래)
⦁잠방산 : 샘골의 앞에 위치한 산.
⦁장평고개 : 강원도 영월군 서면 신천리와 장곡리 사이의 경계(고개) 서면 신천리에 5일장이 열렸다하여 장평이라 불리었음.
⦁절골 : 번자리 북쪽 골짜기.(옛 절터가 있었음)
⦁천곡동(泉谷洞) → 샘골.

◎ 장곡리 문화유산

⦁관란정(觀瀾停)
 번자리 뒷산에 있는 정자. 조선 단종 때 충신 직제학(直提學) 원호(元昊)는 단종이 강원도 영월군에서 연금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알고, 벼슬을 내 놓고 번자리에 와 살면서 이곳에 정자를 지어 관란정(觀瀾停)이라 하였다. 그는 날마다 이 정자에 올라 단종이 계신 곳을 바라보면서 한숨을 짓고 탄식하다가 날이 저물면 비로소 돌아가고는 하였다. 철따라 과물(果物)을 나무 함지에 넣어 정자 밑에 흐르는 내에 띄워 단종에게 보냈다고 한다. 지방기념물 제92호(1994.6.24. 지정)로 지정되었으며, 정면 2간, 측면 2간의 규모로 1845에 건립되었다.

⦁원호유허비
 단종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영월에 안치된 후 관란 원호(觀瀾 元昊 : 생육신의 한사람)가 단종을 추모하여 이곳 서강(西江) 강물가에 단을 세우고, 아침저녁으로 눈물 흘리며 망배(望拜)하였다. 원호가 죽은 뒤 후손들과 유림들이 원호의 충절을 길이 양모하기 위하여 유허비가 세워졌다. 원호 유허비는 보호각이 설치되었고, 비신의 높이는 약 2m이다. 헌종 11년(1845) 그 자리에 정자를 세우고 원호의 호를 따라 ‘관란정’이라 하고 유허비를 세웠으며 1941년에 개축하였다. 건물 구조는 정면 2간, 측면 2간의 목조 기와집의 팔작지붕인데, 축대가 헐고 마루판이 파괴되어 1971년 당국에서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러 지방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낡은 비각안 목판에 다음과 같은 애절한 시구가 있다.

 간밤에 우던 여울, 슬피 울어 지나가다.
이제와 생각하니, 님이 울어 보내도다.
저 물이 거슬러 흐르고져, 나도 울어 보내도다.

그 후손들은 이 충절이 자랑스러워 관란정 중수약기(重修略記)에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내 선조 관란선생은 단종조의 생육신 중의 한분이신데 오직 선생만, 두려울 때 있었으면서도 신하의 도리를 다한 특별한 충절은 넉넉히 혜성으로 우주를 비추었다...

⦁마애불상(磨崖佛像)
 아세아시멘트(주) 제천공장 옆 도로를 따라 들어가다 보면 좌측으로 샘골마을이 위치해 있다. 이 샘골마을에서 능선모퉁이를 지나면 시멘트 농로가 있으며, 이 농로와 능선 끝자락이 만나는 지점에 마애불상이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장곡리사지 마애여래상은 고려시대의 불상으로 알려져 있는데 마을 사람들에 의하면 약 50여 년 전 쯤에 인근의 산중에 있던 불상을 옮기어 이곳에 세웠다 하며, 본래 불상이 있었다고 하는 능선을 조사하였으나 극히 소량의 기와편 만이 확인될 뿐 사역이나 규모를 추정할 만한 흔적은 찾아 볼 수 없다. 높이  5자. 너비 3.3자. 1990년 1월 1일 새벽에 도난당했다.

⦁샘골 동굴
샘골마을 동쪽 긑부분에 북에서 남으로 능선이 뻗어 내리고 있어, 마을을 감싸고 있는 형세이다. 동굴은 이 능선의 남동사면 끝자락인 평지와 맞닿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동굴의 북쪽으로는 계곡부를 형성하고 있으며, 동굴 앞은 현재 논으로 경작되고 있어 비교적 넓은 편이다. 동굴의 바로 앞으로는 계곡으로부터 작은 도랑이 흐르고 있는데, 이 도랑의 물 흐름으로 인해 동굴의 안쪽은 토사가 많이 쌓여 있어 원래의 동굴 입구와 바닥은 확인 할 수 없다. 동굴의 규모는 입구 너비 420cm, 입구 높이 100cm, 깊이 400cm로 작은 규모이고, 입구 방향은 남동 방향이다. 동굴은 입구로부터 210cm까지는 반달 모양의 천장부를 형성하여 비교적 넓은 공간을 형성하고 있으며, 안쪽으로 들어 가면서 점점 좁고 낮아지는 모습이다. 동굴의 앞쪽으로는 평창강의 지류인 시곡천이 흐르고 있으며, 동굴의 입지 등으로 보아 선사시대 사람들이 살았을 가능성이 높으나, 물의 흐름으로 인해 많이 파괴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샘골 서낭당
샘골 서낭당은 마을로 들어서는 입구에 위치하고 있다. 기와 지붕에 시멘트로 벽을 만들었다. 서낭당 내부에는 ‘성황지신위(城隍之神位)’라고 쓰여진 위패가 놓여 있다. 당고사는 매년 음력 정월 15일에 지낸다. 당고사 일주일 전에 제관(축관)과 당주 한 명씩을 생기(生氣)를 봐서 선정한다. 선정된 당주와 제관은 금줄을 쳐서 금기를 철저하게 지킨다. 황토도 아홉 군데 뿌린다. 제물로는 돼지머리⦁백설기 한 시루⦁우족⦁포⦁밤⦁대추⦁곶감 등을 진설한다. 제의의 진행은 유교식 절차에 따라 초헌 - 독축 - 아헌 - 종헌- 소지 - 음복의 순으로 이루어진다.

⦁장곡리 입석
 송학면 입석리 입석을 지나(주)아세아시멘트 제천 공장 옆 도로를 따라 가다보면 왼쪽으로 장곡리 샘골마을로 들어가는 굴다리가 나온다. 이 굴다리를 지나면 바로 민가가 나오고, 민가 두의 더덕밭을 따라 산길을 오르면 서쪽으로 북에서 남으로 산능선이 뻗어 내리고 있다. 입석은 이 능선 정상부를 따라 나있는 작은 길의 끝에 세워져 있으며, 둘레를 조망하기에 매우 좋은 위치에 있다. 장곡리 입석은 두께가 고른 화강암 판자 돌, 위 끝부분을 평편하게 만들었으며, 둘레에도 데어 내어 평면 장방형의 모습을 하고 있다. 입석의 크기는 90X68X22cm이며, 서 있는 방향은 능선과 나란한 방향이다. 서쪽으로 멀리 당곡 마을을 바라보고 있다.

⦁지록연(智祿延) 묘
 음보로 벼슬에 올라 동북면 병마판관을 지내고 고려 숙종 9년(1104) 여진정벌에 공을 세워 전중대어사(전중대어사)가 되었으며, 인종 3년(1125) 동지추밀원사(동지추밀원사)에 이르렀다. 묘소는 원래 괴산군 청천면 운교리에 있던 것을 1995년 현재의 위치로 이장하면서 새로이 신도비를 건립하였다.

⦁장곡리 지석묘
(주)아세아시멘트 제천공장 지나면서 왼쪽으로 장곡리 샘골마을로 들어가는 굴다리가 낭ㄴ다. 이 굴다리를 지나 민가 뒤로 능선의 끝자락부분을 개간한 계단식 밭의 둑에 지석묘의 덮개돌로 추정되는 평면 네모꼴의 돌이 놓여져 있다. 이 지석묘는 능선의 흐름 방향과 나란하게 놓여져 있으며, 산사면부 중턱에 위치하여 비교적 조망이 좋은 편이다. 크기는 170X150X47cm이며, 암질은 화강암이다. 둘레에서 약간의 뗀 흔적이 관찰된다. 이 지석묘의 형식은 덮개돌 밑의 하부 구조가 보이지 않는 개석식이다.

◎ 장곡리 이야기

⦁관란정의 유래
 원호는 왕께 향한 충절을 어찌할 길 없어 골짜기의 서강 기슭으로 거닐며 님그리는 단심을 강물에 흘려보내며 울었다, 철쭉꽃 붉게 물들이는 바위 위에 불쌍하신 어린 임금을 생각하고 몸부림쳤다. 단종이 불귀의 길을 떠나 승화되시매, 뒤에도 이곳에서 3년 상을 복상하고 원주로 돌아가 치악산 초막에 묻히어 집 밖에 나가지도 아니하였다. 세조가 호조 참의로 불렀으나 나가지 아니하였고, 앉을 때는 동쪽을 향하여 앉고 누울 때도 동쪽으로 머리를 두니 영월 장릉이 동쪽에 있기 때문이다. 원호의 충절에 찬 애절한 사연은 글로 적어 표현할 길이 없다고 하는데, 주위의 과일과 산나물을 저성을 들여 채취하여 표주박에 글월과 함께 넣어 서강에 띄우면 빈 표주박은 거슬러 올라와 원호가 바닸다고 하니 그 지극한 충절은 아무도 따를 길이 없었다고 한다.

◎ 장곡리 역사인물

⦁원호(元昊)
 자는 자허(子虛), 호는 무항(霧巷) 또는 관란(觀瀾), 본관은 원주(原州)로 별장(別將) 원헌(元憲)의 아들이다. 세종 5년(1423) 식년(式年)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거쳐 문종 때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에 이르렀다. 문종이 승하하고 단종이 열두 살에 왕위에 올랐다. 등극하자마자 숙부 수양대군의 음모로 왕위에서 물러나자 원호는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성삼문을 위시한 사육신이 충절을 지켜 희생되고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유배됨에 따라 원호는 이곳 서강(西江) 물가에 초옥을 짓고 단을 마련하여 매일 조석으로 청령포(淸怜浦)를 향해 눈물을 흘리며 망배하였다. 그리고 주변의 과실, 채소 등을 정성들여 표주박에 넣어 서강에 띄우면 흐르고 흘러 청령포 기슭에 이르러 단종께서 이를 받으셨다고 전해진다. 숙종 29년(1703) 고향에 정려문이 세워졌으며, 원천석(元天鉐)의 사당에 배향되었다. 정조 5년(1782)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원주의 칠봉서원(七峰書院), 함안(咸安)의 서산서원(西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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