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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기행

제천문화원 마을기행 입니다.

제천의 역사와 전통을 알아 볼 수 있는 게시판 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제천의 지명과 행정구역의 변화 지역적 특성과 산물 등을 알려드립니다.

작성일 : 22-07-26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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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학면] 포전리[浦田里]
 글쓴이 : 문화원
(조회 : 2,641)  
포전리는 본래 제천군 북면(북면)의 지역으로서, 개울가에 있었으므로 ‘개발’, ‘개앗’ 또는 ‘포전’(포전)‘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노동리(노동리)를 병합하여 포전리라 해서 송학면에 편입되었다. 1980년 4월 1일 제천시 승격에 따라 제원군 송학면 포전리가 되었다가, 1995년 1월 1일 시군 통합으로 제천시 송학면 포전리가 되었다.
 마을 뒤로는 용두산이 있고, 앞으로는 송학산이 있으며, 마을 가운데로 무도천이 흐르고 있다. 해발 430m의 고랭지 석회암지대이다. 선사유적지 점말동굴이 있다. 이 동굴에서 다량의 동물 화석과 선인들이 쓰던 골각기, 석기 등의 연모가 발견되었다. 자연마을로는 웃담, 점촌, 지장골 등이 잇다. 사과, 배, 고추가 특산물이다.

◎ 포전리 지명유래

⦁갈골[노동, 앞말] : 개앗 앞에 있는 마을. 갈밭이 있었다 함.
⦁갈발구랭이 : 개앗에 서남쪽 그렁에 있는 마을. 갈대밭이 있음.
⦁개그늘 : 개앗에 있는 논. 음지에 있으므로 그늘이 짐.
⦁교동(橋洞) → 다릿거리.
⦁노동(盧洞) → 갈골. 작은 갈골.
⦁다릿거리[교동] : 포전교 옆에 있는 마을.
⦁뒤실고개 : 뒤실에서 송한리로 가는 고개.
⦁뒤실못 : 뒤실에 있는 못.
⦁뒤실1 : 개앗 뒤쪽에 있는 마을.
⦁뒤실2 : 뒤실에 있는 마을.
⦁벌밭 : 옷담 밑 벌판에 있는 들.
⦁송장봉 : 지장골 뒤쪽에 있는 산. 봉우리가 송장을 담은 널처럼 생김.
⦁시장곡(屍臟谷) → 지장골.
⦁앞말 → 갈골
⦁앞말못 : 앞말에 있는 못.
⦁용가둔굴(龍加屯窟) : 포전리에 있는 굴.
⦁웃담[울말] : 개앗 위쪽에 있는 마을.
⦁작은갈골 : 갈골 옆에 있는 작은 마을.
⦁점말[점촌] : 갈골 서남쪽에 있는 마을. 조선 말엽에 천주교의 박해를 피하여 천주교인들이 숨어 살면서 그릇을 만들었는데 그 품질이 좋았다고 함.
⦁점촌(店村) → 점말.
⦁주막거리 ; 개앗 북쪽에 있는 마을. 강원도 영월로 가는 옛 관행길가에 주막이 있었음.
⦁주막삼거리(酒幕三巨里) : 주막거리 앞에 있는 세 갈림길.
⦁지장골[시장곡] : 개앗 서쪽에 있는 마을. 기장이 많았다 함. 송장봉 밑이 됨.
⦁포전교(浦田橋) : 포전 남쪽에 있는 다리. 1936년에 놓음.
⦁푯대봉 : 웃담 뒤에 있는 산. 높이 456m. 측량기점인 푯말이 있음.
⦁한밭고개 : 포전 사남쪽에서 도화리로 가는 고개. 큰 밭이 있었음.

◎ 포전리 문화유산

⦁포전리 가마터
 백자가마터는 송학초등학교에서 포전리 방향으로 1.3km 가다보면 우측으로 뒷산에 오르는 소로가 나온다. 이 소로를 따라 약 30m 가면 넓은 경작지가 있는데 이 일대에서 다량의 도자편과 도지미가 수습되었다. 이곳은 예로부터 ‘사기장고개’라 불리웠으며, 곳곳에 자기편들이 산재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곳에 많은 양의 도편, 도지미, 불탄 흙 등이 집중 산포되어 있어 가마터임을 알 수 있을 뿐, 개간과 과수 식재로 파괴되어 가마의 외형은 확인할 수 없다.

⦁포전리 점말 가마터
 38번 국도에서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으로 향하는 597번 지방도로 들어서 포전리 주막거리 삼거리에서 자회전한다. 점말 동굴을 향하여 약 2km정도 가면 왼쪽에 작은 개울을 가로지르는 시멘트 다리가 있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만나는 점말동굴 푯말앞에서 왼쪽 길을 따라 약 50m 정도 가면 커다란 은행나무 옆에 민가가 한 채 있으며, 그 민가 아래 개울쪽으로 기운 경사면의 밭에 옹기편과 가마벽편이 흩어져있다. 옹기편은 평저바닥, 넓고 편평한 구연부, 동체 측면의 손잡이, 손으로 누른 듯한 덧띠장식 등의 특징을 보이며, 가마 벽편이 많이 보이지 않는 점과 지형이 그대로 유지된 점으로 볼 때 가마가 잘 남아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개화 산지당(山地堂)
 개화 산지당은 당집은 없으며, 나무에 금줄을 둘러놓고 아래에는 돌로 된 제단이 있다. 예전에는 당집도 있었다고 하나, 1970년대 새마을운동 때 당집을 없앴다고 한다. 제의의 명칭은 당고사다. 제물로는 돼지머리⦁백설기 한 시루⦁편⦁포⦁밤⦁대추⦁곶감⦁채소 등을 진설한다. 전에는 소머리를 올렸었다고 한다. 제의의 진행은 유교식 절차에 따라 초헌 - 독축 - 아헌 - 종헌 - 소지 - 음복의 순으로 이루어진다.

⦁점말동굴
 점말동굴은 용두산(龍頭山 : 608m)에 있는 천연거주지(天然居住地)h 굴의 길이는 현재 13m로 확인되었다. 유물이 집중적으로 발굴된 곳은 굴의 입구에서 11m되는 지점이며, 지층으로 4m까지에 이른다. 포전리 점말동굴은 1973년부터 1980년까지 8차에 걸쳐 연차사업으로 발굴 조사하였다. 이에 대한 중간보고 형식으로 연세대 손보기 교수는 <제천 점말동굴 발굴 중간 보고>를 발표하였고, 꽃가루 분석 결과로 자연환경을 복원하여 보는 논문으로 <한국 구석기 시대의 자연-특히 점말용굴의 지층별 꽃가루 분석과 기후의 측정>을 발표하였다.
 중간보고에서 손보기 교수는 1973년 조사 결과를 문화층위, 지층구분, 표준화석(標準化石)을 통하여 살펴보고 있다. 당시까지로는 13문화층으로 구분하고 있는데 유문토기(有紋土器), 약간 간 돌도끼 등이 출토되는 후빙기의 층위를 13층으로 분류하고, 그 이하는 홍적세의 문화층으로 12개의 문화층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손보기 교수는 또한 석회암 낙반석 크기에 따라 4cm~10cm되는 석회암 부스러기는 추운 기후에 만들어지고, 10cm이상의 것은 더운 기후에서 만들어지는 것으로 해석하고 그 상관 관계에 따라 염토, 뻘 등의 자료와 꽃가루 분석 자료까지를 합하여서 자연층위를 구분하여 설명했다.
 남한강유역과 중원지방의 구석기 연구에 박차를 가한 점말용굴 중간보고에 이은 지금까지의 연구에서 층위는 크게 7개로 구분되고 있다. 문화층으로는 Ⅲ층(흰 모래층)에서 사냥으로 잡힌 큰 짐승의 뼈화석과 뼈연모들이 많이 발굴되었다. 특히 이 층에서 발굴된 털코뿔이 앞팔뼈에 새겨진 사람얼굴 모습은 당시 실시한 우라늄계열(U/Th/Pa) 원소 연대측정으로 66,000 B.P.나타나 제4빙기(뷔름) 시기로 추정되며, 추운 동물이 많이 출토되고 있다. Ⅵ층은 방사성탄소 연대측정으로 18,660 B.P. 임이 확인되었으며, 이 층들의 동⦁식물상을 통한 분석이 전개되었다. 또한 동굴곰⦁짧은꼬리원숭이 등과 같은 표준화석에 대한 형질적인 계측과, 다른 유적의 자료와 비교 검토하여, 연대 결정의 기준을 삼고 있다. 이렇게 석회암 동굴에서 밝혀진 여러 자료를 통한 층위 구분, 동⦁식물상의 비교연구 등은 종래의 구석기문화 연구와 해석에 커다란 과학적 기준을 세웠다. 여러 자료를 종합해서 밝혀진 사실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점말동굴은 우리나라 선사시대의 기후⦁환경⦁동물군⦁식물군을 찾아내게 하고, 석기⦁뼈연모 등의 제작수법이 당시의 문화를 복원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둘째, 1975년의 발굴에서는 동물 뼈에 새긴 선각화(線刻畵)를 비롯 23~7만년 전에 이르는 원시 예술품과 신종으로 확인된 동물화석 등을 발견하여 우리나라의 구석기문화를 23만 년 전까지 올려놓았다는 것이다.
 최근 점말동굴 재조사 과정에서 발견된 각자를 분석한 결과 점말동굴은 신라시대 화랑들이 다녀간 유적지로 추정하고 있다. 동굴 입구 암벽에 새겨진 ‘禮府(예부)’는 교육과 의례를 관장했던 신라의 관청명이고, ‘金郞(김랑)’, ‘詳蘭(상란)’ 등 옛 화랑들의 이름도 새겨져 있다. 특히 일부 화랑 또는 낭도(郎徒)의 이름은 울주군 천천리에서도 발견된 적이 있고, 각자 주변에 행(行)자가 있어 이들이 점말동굴을 다녀갔음을 표시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석조탄생불상(石造誕生佛像)은 통일신라 말기나 고려전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점말동굴 앞 광장에서 출토된 이 불상은 일반적인 탄생불상은 금동상인데 반해 석상이라는 점, 탄생불과 달리 왼손을 들고 있다는 점 등이 특징이다. 광배와 연화대좌의 폭이 넓어서 예배상으로서의 안정된 형태를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점말동굴에 절이 세워졌던 사실을 확인해 주고 있다.
 제천 시청에서는 포전리 점말 용굴의 역사적 가치를 인정하여 새로이 정비계획을 세우고 있어 앞으로 선사시대의 현장 체험 학습장으로 널리 활용될 것이다.

◎ 포전리 이야기

⦁의림지와 연결된 점말동굴
 점말동굴에 홍두깨를 넣으면 의림지 연못에 모두 떴다.

 지동철 : 옛날에 홍두깨를 넣으면은 의림지로.
 조사자 : 어다 넣었다는 얘기예요?
 지동철 : 고 굴에.
 조사자 : 굴에?
 지동철 : 어, 단지굴 같은 데 이제 그걸 그래 말하는 거여. 걸 넣으면 뭐. 넣어가지고 저 의림지 굴로. 저, “의림지 못으로 빠졌다.” 이렇게 이제 뭐 말을 하드라구 노인네가. 근데 그건 니리오는 괜히 전설이, 저 그짓말이지. 거짓말이지. 그게 뭐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난리 때 베를 짜던 안말 동굴
 점말 동굴은 들어가기 어렵지만, 안말에 있는 동굴에는 들어가기가 쉽다. 난리 때 그곳에서 처녀들이 베를 짰다고 한다.

 지동철 : 점말{점말동굴}은 들어가기가 참, 아주 참 좋질 않은데. 안말{작은 갈골 용굴}에는 이래 기들어가면 아주 넙진{넓진} 않애두. 그래 뭐, 말로는 여길{작은 갈골 용굴} 그러는지 저 점말을 그러는지. 뭐 어느 난리 때 거기서 뭐 처녀가 들어가 뭐 베틀꺼정 갖다 놓고 베를 짜고 뭐 이랬다구 해는데. 이 안말서 그런거 같애. 안말굴에서. 예, 점말굴에는 베틀 놓고 그랠 수가 없어. 안말엔 들렸더라구요. 엄청 널러요. 넙질{넓질}않애 그렇지.

⦁개화동에 있는 구씨네 무덤
 개화동에는 큰 무덤이 있다. 구씨네 무덤이라고 하는데, 예전에 고을 수령을 했던 분의 무덤이고, 일곱 개 마을 사람들이 부역으로 만들었다고 전한다.

 조사자 : 구씨, 구씨네 무덤 얘기를 한 번 해 보세요. 구씨네 그 무덤 왜 그게 있게 된가.
 지동철 : 그러게 된 걸 내가 그걸 세밀히 다 알 수가 없죠.
 조사자 : 옛날 어르신한테 아버님이나 할아버지한테 들은게 없어요?
 지동철 ; 그, 그리고 글쎄 거 구, 저 내려오던 전설에 내려오는 말은. 그 구개령이라고 구개, 개령 골을 했대요. 그, 골, 고사리를 한 분인데 그 일곱 골에 여, 이 불역{부역}을 이뤄가지고. 전부 지금으로 말하면 그냥 불러, 불러다가 거 그걸 전부 그렇게 등짐으로 뫘다매요. 손으로 다 했지요.
 조사자 : 아, 무덤을 만들기 위해서?
 지동철 : 예, 그래 맨들었대요. 자연으로 그렇게 된 가 아니고. 그래 근데, 그래 시방은 뭐 묵고 있어요. 거 묵고 있는데.
 조사자 : 누가 그 파헤치진 않았어요?
 지동철 : 아니 그렇긴.
 조사자 : 도굴, 도굴 안 했어요?
 지동철 : 그러, 그렇진 않아요. 그 안적, 그 전에 자손이 뭐 있긴 있었어두. 거 그 전에 옛날에 소 많이 맥일 때 시방, 시방은 소를 일절 갔다 안 매죠. 그런데 그 전엔 산에나 들에나 여 갱변이나 갔다 멕, 멕였잔항요, 옛날엔. 맸다가 소도 매고, 거 소도 매고 이래는 매는 사람이 좀 잘못된 거지. 나무{남의} 묘에. 묘에 그 매, 소를 매는 건 그 사람이 잘 못 된거다. 그건 너무 안, 안 되는 얘기죠. 그래 그 일곱 골에 그 깃대가 그, 꼽히구 인제 그렇게 했다는 말은 그런 말은 내려와요.
 조사자 : 아, 깃대를 꼽고.
 지동철 : 기대가 일곱(7)골에 일곱골 고, 고, 골에서. 그래 여기로 말하면 구, 이름이, 군 제천군, 군하면 제천군에 깃대 하나여 이기. 어디서 그렇게 일곱 골 뭐 골, 골사리 그 기가 와서 꺾였다구 말은 그래유 그래기를. 그래서 그렇게 그걸 묘를 쓴거라구 {하더라구요}.

⦁영험한 호랑바위와 명당자리
 호랑바우 근처의 밭이 명당자리인데, 그곳에 묘를 쓰거나 집을 지으면, 부자는 되는데, 후손 중에 혼환을 당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또한 마을의 최경길이라는 분이 호랑바우 입 부근을 도끼로 깼는데, 그 이후로부터 실성을 하였다고 한다.

 지동철 : 그러니까 여기 인제 호랑바우라는 게 있어요.
 조사자 : 예, 호랑바우 예.
 지동철 : 바로 여기 이 산 요 뒤에 솔밭 이기, 우리 산인데 이짝으로 뻘겋게 든 그기 그것두. 우리 산은 십이(12)번지고 여 십삼(13)번지 산인대. 거기 호랑바우라는 게 참 아주 호랭이가 앉아서 이래게 내려다보는 것 같이 된 데가 있어요. 그랬는데, 그야 여 가산이라는 데 밭때기가 근 삼백육십(360) 평짜리 그 내 밭을 있어요, 또 한때기. 있는데, 거 바로 산 밑에. 거 논 있는 닷 마지기 있는데 내가 시방 나이가 먹어 가지고 밭도 못 붙이고. 우리 사촌을 줘서 이제 해 먹고 그래는데. 하마 한, 그래 농사도 나도 못해요 인젠. 그 전에 많이 했는데 농사를. 거기다 말루 그 집 밭에다가. 우리 인제 여기서 내려가는 집에서 이렇게 바로 다른 쪽으로 들어가서 이제 논에 말뚝을 해서 그 들어가야 되거든요. 거기다 집을 지면 아주 참 부자는 되는데.
 조사자 : 네.
 지동철 : 그 집에 사는 사람은 호환에 가야 된다고 그래두 그 집이 그 집터는 좋은데 못 짔다구. 또 그 전설이 그렇게 내려와요. 예, 전설이. 거기다 집을 지믄.
 조사자 : 아, 그래도 명당인데.
 지동철 : 예, 집은 거기다 지으면 부자는 되는데. 자손은 호환에 간다고 그래서 그걸 전설에 그렇게 흉악하잖아요, 여간 사람. 호환에 가면 뭘 해. 글쎄 그 호랑바우라는 게 있는데 그런데 그기. 그래니까 그기 히언해유. 하긴 그래니 미신을 아주 참 읎다고 할 수도 없구. 그래서 여기 이 동네 그 분들 다 돌아가셨지만은. 한 분은 최씬데, 최경길이라고 하는 양반인데. 그이가 살았으면. 아이 살아, 돌아 벌, 돌아가셨는데, 백살이 넘을거래요 이 양반이. 그런데 그걸 가서 마음이 어떻게 돌았는지 그걸 그 지금 겉이 그 갯노나 그런걸 가지고 그랬으면 더 깨져 있을건데. 도꾸를 가져 가서 이이가, 그러니까 마음이 돌았다고 모두 그랬어요. 그 주대이 쪽을 막 다 깨버렸어요. 아주 이렇게 호랭이가 아주 이렇게 하구 여기를 내리다 보고 바로 계단을 내리다보는 것처럼. 저기 시방은 조 낭기{나무}, 낭기 웃구덩은 치다보면 꽤 커요. 또 이렇게. 되게 높진 않애두 이렇게 아주. 그런 호랑바우가 있었는데 그걸 다 그 이가 깨 가지고. 그 이가 한 동안 그걸 그래 그렇다구그램 실성 실성 또 마음이 돌았다 그래구 그랬었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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