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천의 역사와 전통을 알아 볼 수 있는 게시판 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제천의 지명과 행정구역의 변화 지역적 특성과 산물 등을 알려드립니다.
작성일 : 22-07-26 14:41
[봉양읍] 구학리[九鶴里]
글쓴이 :
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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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구학리[九鶴里]
구학리는 마을 한 가운데로 시원한 계곡물이 흐른다. 옛 전설에 의하면 백운산맥 ‘탈왕재’에서 아홉 마리의 학이 날아와 탁사정 소나무 숲에 앉았다고 하여 ‘구학리’라 칭하였다고 한다. 본래 제천군 근우면 지역으로서, 구학산(九鶴山)의 아래가 되므로 구학동(九鶴洞)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동점리(銅店里)로 병합하여 구학리라 해서 1920년 9월에 봉양면에 편입되었다. 1980년 4월 1일 제천시 승격에 따라 제원군 봉양면 구학리가 되었다가 1991년 1월 1일 제천시 봉양면이 되었다. 1995년 1월 1일 시군통합과 동시에 봉양면이 읍으로 승격하며 제천시 봉양읍 구학리가 되었다.
◎ 구학리 지명유래
· 갈골[노동] : 통점 서쪽에 있는 마을. 전에 갈대가 많았음.
· 갈골-재 : 갈골 서남쪽에서 배론으로 가는 고개.
· 구학(九鶴) → 구학리.
· 구학교(九鶴橋)[구학다리] : 통점 북쪽에 있는 다리. 1949년에 놓았는데, 6.25 사변 때 파괴되어 다시 놓았음. 길이 20m, 너비 6m.
· 구학동(九鶴洞) → 구학리.
· 구학역(九鶴驛) : 구학 남쪽에 있는 기차역. 중앙선 개통에 따라 세움.
· 궁꼴[궁동] : 갈골 북쪽 구렁에 있는 마을.
· 궁동(弓洞) → 굴꼴.
· 노동(籚洞) → 갈골.
· 노쟁이고개 : 조백석골 북쪽에서 옥전리 노쟁이로 가는 고개.
· 대암(岱岩) : 용대암 북쪽 냇가에 있는 바위. 깊이 패인 곳이 되어 바위 위에 자루를 놓으면 고기가 저절로 들어오므로 쉽게 잡을 수 있다고 한다.
· 덕령산(德岺山) : 배론산 동남쪽에 있는 산.
· 동점(銅店) → 통점.
· 매내밋재 : 배론 남쪽에서 연박리로 가는 고개.
· 박달나뭇골 : 배론 위에 있는 골짜기. 전에 박달나무가 많았음.
· 배론[주론] : 가롤 서남쪽에 있는 마을. 주유산 아래가 됨.
· 배론산[주유산] : 배론 위쪽에 있는 산.
배론산은 문헌에 주유산(舟遊山)으로 기록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주유산은 현 서쪽 15리에 있다.”라고 기록하였으며, 『여지도서』에는 “주유산은 현에서 서쪽으로 15리에 있으며, 감암산의 남쪽 줄기이다.”라고 하였다.
· 불당골 : 갈골 위에 있는 골짜기. 불당이 있었음.
· 어약정터(魚躍亭-) : 구학리에 있는 정자 터. 옥호(玉壺) 홍설모(洪設謀)가 창건하여 그의 호를 따서 옥호정(玉壺亭)이라 하였다가, 그 뒤 헐어진 것을 1940년 면장 한진학(韓鎭學)이 다시 세워 어약정이라 하였다. 그 뒤 면장 박이양(朴怡陽)과 허담(許談)이 중수하였으나 1958년에 허물어졌다.
· 옥호정(玉壺亭) → 어약정 터(魚躍亭-)
· 용소(龍沼) : 탁사정 아래에 있는 깊은 소. 용이 등천하였다고 함.
· 용대암(龍帶岩) : 궁골 북쪽에 있는 마을. 용소와 대암이 있음.
· 유송골 : 배론에 있는 골짜기.
· 절골 : 절골 위에 있는 골자기. 절이 있었음.
· 점말[점골] : 배론 동북쪽에 있는 마을. 옹기점이 있었음. 조선 순조(純祖) 원년(1801) 신유사옥(辛酉邪獄) 때 천주교도 황사영(黃嗣永)이 교난(敎難)을 피하여 이곳에 와서 토굴 속에 숨어 있었다. 그는 위기에 놓인 조선 교회를 구출할 방법으로 교회의 박해 실정을 자세히 적고, 구원을 청하는 글을 가로 62cm, 세로 38cm의 비단에 1줄에 110자씩 121줄 13,000여 자를 적어서 황심(黃心)과 옥천희(玉千禧)로 하여금 중국으로 떠나는 동지사(冬至使) 일행에 끼워서 북경 주교에게 전달하려 하였다. 그러나 백서(帛書)가 관헌에게 발각되어, 황사영이 그 해 9월 29일에 잡혀 11월 5일에 처형되었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이 문제가 국제적으로 심각하게 됨을 염려하여 사건의 변명책으로서 백서의 불리한 대목은 모두 고쳐 명주비단에 다시 써서, 동지사 겸 진주사(陳奏使)로 하여금 북경 청제(淸帝)에게 보고하여 양해를 구하였으며, 백서 원본은 의금부 창고에 보관하다가 갑오경장 뒤 발견되어 조선 교회의 주교 뮈텔(Mutel)이 가지게 되었다. 1925년 7월 5일 로마에서 조선교회 79명의 시복식을 할 때, 로마 교황에게 주어 현재 로마 교황청에서 보관하고 있다.
· 조백석골 : 배론 서쪽에 있는 마을. 조 농사를 백석한 부자가 살았다 함.
· 주론(舟論) → 배론.
· 통점[동점] : 구학리 동쪽에 있는 마을. 통점이 있었다 함.
· 통점들 : 통점 앞에 있는 들.
· 파랑재 : 조백석골 서쪽에서 백운면으로 가는 높은 재.
· 팔송정(八松亭) → 탁사정.
◎ 구학리 문화유산
· 배론성지
2001년 3월 2일 충청북도기념물 제118호로 지정되었다. 제단법인 천주교원주교구에서 소유 · 관리한다. ‘배론’은 이곳의 지형이 배 밑바닥과 같은 모양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천주교 전래 당시 천주교인들이 박해를 피하여 숨어 지내던 곳으로 옹기를 구워 생계를 유지하며 신앙공동체를 이루었고, 조선 후기 천주교도 황사영(黃嗣永:1775~1801)이 머무르며 백서(帛書)를 썼던 토굴과 최양업(崔良業:1821~1861) 신부의 묘가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교인 성 요셉 신학교가 세워진 곳이기도 하다. 또한 천주교에 공헌한 분들이 잠들어 있는 묘역에 위치해 있다.
1801년(순조 1) 신유박해(辛酉迫害)가 일어나자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어 권철신(權哲身) · 이가환(李家煥) · 이승훈(李承薰) · 정약종(丁若鍾) · 주문모(周文謨) 등이 처형되었다. 이때 많은 천주교도가 구학리 배론 산골에 숨어살았다. 황사영도 배론에 숨어 있었는데, 그는 조선교회의 박해 사실을 자세히 기록하고 신앙의 자유와 교회의 재건 방안을 호소하는 백서를 써서 황심(黃沁) · 옥천희(玉千禧)에게 중국에 가는 동지사(冬至使) 일행을 따라가 베이징[北京] 주교에게 전달하려다 발각되었다. 이 배론의 토굴에서 쓴 밀서를 ‘황사영백서’라고 한다.
1856년(철종 7)에는 프랑스 신부들이 이곳에 한국 최초의 신학교인 성 요셉 신학교를 세우고 성직자를 양성하였으나,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로 신부들이 처형당하고 신학교가 폐쇄되었다. 또한, 조선 천주교사상 두 번째로 신부가 된 최양업도 이곳에서 1861년 순교하였는데 뒷산에 그의 묘가 있다. 배론은 전국 각지의 성지순례 신자들이 끊임없이 찾는 한국 천주교의 성지이다.
· 배론신학교
배론 동북쪽에 있는 한국 최초의 서양식 대학인 신학교이다. 1855년 조선교구의 장상인던 메스트로(1808~1857)신부는 박해 아래서 장주기(長周基:1803~1866)의 집에 우리나라 첫 교구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이 신학교에서 1856년 교장으로 부임한 푸르티에(1830~1866)신부와 1861년 말에 부임한 프티니콜라(1828~1866)신부는 김사도요한⦁권요한⦁유안드레아⦁임빈첸시오⦁박필립보⦁이만돌(바울리노)⦁이토마스 등 신학생들에게 라틴어, 수사학, 철학 및 신학 등 서양학문을 가르쳤다. 신학생들은 몇 명씩 세 개의 마을에 기숙하면서 신학교를 오가며 공부하였다. 신학교의 주보성인은 성요셉이다.
신학교는 박해와 신변 상의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교구장 베르뇌(1814~1866) 주교의 전폭적인 지원, 선교사들의 애정 그리고 신자들의 기도에 힘입어 사제양성소로서의 역할을 다했으며, 그 결과 1866년 라틴어 과정 4명, 신학 과정 2명, 삭발례자(削髮禮者) 1명, 소품자(小品者) 1명 등 8명의 신학생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병인박해가 일어나면서 두 명의 신부와 장주기, 그리고 세 명의 신학생이 순교함으로써 신학교는 문을 닫았다. 옛 신학교 건물은 한국전쟁 당시 소실되었으며, 현 건물은 2003년 충청북도의 지원으로 복원된 것이다. 배론신학교는 우리나라 최초의 공인된 근대적 교육기관이었다.
⦁황사영 백서가 쓰여진 토굴
황사영(黃嗣永:1775~1801)은 1801년 2월 말 신유박해를 피해 배론에 살던 신자인 김귀동(金貴同)의 집으로 왔다. 그는 옹기 저장고로 위장한 토굴 속에 8개월 간 은신해 있으면서 9월 22일 백서(帛書)를 완성하였다. 백서는 모두 122행으로 구성된 13,384자의 글자를 비단에 쓴 것으로 북경교구장 구베아(1751~1808) 주교에게 보내기 위해 작성되었다. 백서의 내용은 인사말(1-5행), 신유박해의 발단과 진행 과정(6-32행), 주문모(周文謨:1752~1801)신부와 총회장 최창현(崔昌賢)을 비롯한 순교자들의 열전(32-90행), 교회의 재건과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5가지 방안(90-119행), 관면 요청과 맺음말(119-122행)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황사영은 9월 29일 의금부에 체포되었고, 백서도 압수되었으며, 박해는 더욱 심해졌다. 황사영은 같은 해 11월 5일 서울 서소문 밖에서 대역부도(大逆不道)의 죄로 처형 되었다. 백서는 1925년 79위 시복식(諡福式)때 교황 바이오 11세에게 증정되었고, 현재 교황청 민속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현재의 토굴은 1987년 서월대 이원순 교수의 고증에 의거해서 복원된 것이다.
⦁탁사정(濯斯亭)[팔송정]
궁골 동쪽 냇가에 있는 정자이다. 물 맑은 계곡이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에 세워져있다. 1568년(명종19) 제주수사(濟州水使)로 있던 임응룡(任應龍)이 고향에 돌아올 때 해송(海松) 여덟 그루를 얻어 와서 이곳에 심고 팔송(八松)이라 하였으며, 그 뒤 정자를 짓고 팔송정(八松亭)이라 하였는데, 그후 오래되어 헐어진 것을 1925년 그의 후손 윤근(潤根)이 다시 세웠고, 한말의병좌군장을 지낸 옥파(玉波) 원규상(元奎常)이 ‘청사탁영 탁사탁족(淸斯濁纓 濯斯濯足)’의 글귀에서 따 탁사정이라 하였다. 팔송은 모두 쓰러지고 송석정 위에 한 그루가 남아 있으며, 반석이 깔린 위로 폭포수가 떨어지고, 아래로 깊은 소를 이루어 경치가 매우 아름다운 곳이다. 탁사정이란 정자인 동시에 정자 아래의 계곡유원지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제천시가 제천10경 중 제9경으로 선정한 곳이며, 제천 근교의 유일한 자연발생유원지로 여름이면 많은 피서객들이 모여든다.
⦁어약정지(魚躍亭址)
옥호 홍설모가 창건하여 그의 호를 따서 ‘옥호정’이라 하였다가 그 뒤 헐린 것을 1940년 면장 한진학이 다시 세워 어약정이라 하였는데, 그 뒤 면장 박이양과 허담이 중수하였으나 1958년에 허물어졌다. 어약정은 탁사정 주차장에서 오른쪽으로 난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능선이 끝나는 지점에 휴게소가 있고, 그 휴게소 앞에 5평 정도의 평평한 지대가 있는데, 이곳이 어약정터이다. 계곡 건너 반대편에 탁사정과 마주 바라볼 수 있는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구학 서낭당
구학 서낭당은 당집이 없고 서낭목으로 물푸레나무가 있으며, 그 주위에 금줄을 둘러놓았다. 구학역 뒤편에 위치하고 있다. 구학서낭당에서의 당고사는 음력 정월 초에 날을 받아서 지낸다. 생기를 봐서 제관 및 축관을 선정한다. 제관으로 선정되면 금줄을 쳐서 금기를 지킨다. 제물로는 돼지머리⦁백설기 한시루⦁뫼⦁탕⦁포⦁밤⦁대추⦁곶감 등을 진설한다. 제의의 진행은 초헌-독축-아헌-종헌-소지 음복의 순으로 이루어진다.
⦁구학역(九鶴驛)
코레일(Korail) 충북지사 소속으로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읍 구학리 43에 위치해 있다. 중앙선에 속해 있으며 연교역과 봉양역 사이에 있다. 1941년 7월 1일 보통역으로 영업을 시작하였다. 1951년 5월 20일 1.4후퇴 시에 역사를 소실하였다가, 1957년 10월 15일 현재 역사를 신축하였다. 1994년 화물취급을 중단하고 2004년 여객영업을 중단하였다. 2009년에는 지붕을 개량하면서 역사의 외양이 바뀌었다. 1년에 10회 정도 배론성지 순례 목적의 단체관광열차가 구학역에 정차한다.
◎ 구학리 이야기
⦁탁사정 전설
수백 년 전 구학리에는 임씨네가 살고 있었다. 임씨네 일가는 부자이면서도 마음씨가 착했다. 어느 날 나이 먹은 스님이 탁발을 청해 왔다. 주인 임씨는 쌀을 듬뿍 시주해 주었다. 늙은 스님은 고맙다는 말을 하고 뒤돌아서더니 혀를 한 번 차고는 “참 안 되었군!”하고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주인 임씨가 이것을 듣고 스님을 잡고 그 연유를 물었다. 그러자 스님은 “이 집터를 보아 손은 귀하지 않으나 방종한 사람이 많이 나올 것입니다. 만일 방종한 기운을 누르고 싶거든 정자 한 채를 지으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임씨는 아들이 모두 방탕하던 터라 정자를 짓겠다는 마음을 먹었으나, 연로하여 정자를 짓지 못하고 작고하였다. 그러나 자식들에게 정자 한 채를 꼭 짓도록 유언을 남겼다. 그 뒤 아들들은 유언을 잊어버렸는지 정자를 지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던 가운데 아들 중 하나가 자식을 여럿 두었는데 아들들이 장성하자 방탕이 극심하였다. 이렇게 되자 문득 부친의 유언이 생각나 그때서야 정자를 지었다. 정자가 생긴 후로는 임씨 일가의 방탕하는 버릇이 깨끗하게 가시고 더욱 번성하는 집안이 되었다고 한다.
⦁조백석골의 유래
배론성지 안쪽에 ‘조백석골’이라는 곳이 있다. 이곳은 예전에 화전으로 조를 많이 해서 ‘조백석골’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조사자 : 저 위에 봤더니 그 조백석골이 있던데, 왜 조백석골이라고 그랬어요?
최완규 : 그런데 그거 서석{조}을 하다 보니까 참 많이 했어요. 그때는, 옛날에. 그 유래가 내려오는 게 있는데. 그게 하다보니까 뭐 한 손이 모지라더라나. 그래니깐 한 손, 한 집에 백석 채울라고 “한 가마를 달라.”고 이러더라 이랬다는 얘기가 나왔어. 한 섬 달라고 그러더라구. 그래가지고 조백석골이라고 그랬는데, 그 옛날에 유래가 그렇게 돼 있어요. 그래서 그 조백석골이라고 그러는거여, 조를 거기서 많이 했어, 옛날에. 거기도 올라가보면 들 같애.
⦁물탕바우의 유래
배론성지 안쪽 마을에 ‘물탕바우’라고 불리는 바위가 있다. 물탕바위는 마을제사의 대상이었다. 바위틈에서 물이 나오는데 가물 때나 장마 때도 똑 같은 양의 물이 나와서 유래되었다. 자식 못 낳는 사람들이 물탕바위에 가서 치성을 드리기도 하였다.
조사자 : 물탕바우가 또 있던데?
최완규 : 예, 거기, 거기는 물탕바우는 내가 거기 옛날에 거, 물탕바우라고 거기 저, 치성도 드리고 맨날 그랬어요. 이런 바우틈 사이에서 물이 가물어도 똑같이 날이 장마가 져도 그렇고 물이 맨날 매일 똑같이 나와 물이 안 떨어지고. 바우 틈 사이에서. 그래서 거 물탕바우라고 그래요. 치성도 드려. 지금도 치성 드려. 집 겉이 저, 저, 요렇게 요렇게 생겼어. 치성 지내 가지고 아들 낳은 사람도 있고 그렇다고. 거기 저 옛날에 참 아들 딸 못 낳고 그래서 치성도 많이 지냈어. 거 노인들이 저, 린 신자니까 안 해지만. 하얗게 옷을 입고 두 내우가 와서 쌀 싸 짊어지고 와서, 이래 갖다 놓고 촛불 키놓고 절도 하고 치성도 드리고 그랬거덩. 그래서 그, 그래서 아들 낳은 집도 있어 치성 드려가지고. 그래서 거 물탕바우라 그러는 거여. 물이 만날 똑같이 나와. 비가 가물어도 줄지도 않고.
⦁용터지기의 유래
현재 탁사정 앞을 지나는 물줄기가 예전에는 백운면 방향으로 흘렀었는데, 용이 나오면서 물줄기가 봉양읍쪽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조사자 : 저 밑에 용대암이라고, 용터지기라고 있는 것 같던데.
최완규 : 저기도 구학도 그 소리가 있긴 있어. 옛날에 거기 저, 물이 저 쪽으로 돌았는데 거기 돌민서. 거 용이 나와서 물이 글루 터졌다 그런 소리가 있어. 일리 똑바로 나갔다는 그러는 소리가 있는데 그건 확실히 몰러요 나두, 저-쪽으로 저쪽으로 물이 돌았어 이렇게 귀탱이로 해서 이렇게. 그런데 이제 뭐냐면 용이 거서 나면서 거게 골이 터져 가지고 그물이 개울이 이쪽으로 났다 그러더라구.
◎ 구학리 역사인물
⦁주용규(朱庸奎)
주용규(1845-1896)는 자가 여중(汝中), 호는 입암(立菴)으로, 유인석의 문인이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 친일내각이 조직되어 국정이 날로 어려워지자 통분한 애국지사들과 1895년 유인석 의전에 참여하여, 조선 13도에 보내는 격문을 기초하기도 하였으며 후에 참모가 되었다. 1896년 1월 19일 왜적의 재침으로 충주전투에 독려 차 나갔다가 북문루 아래에서 전사하였다. 1963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공로의 대통령 표창이 수여 되었다. 묘소는 탁사정 주차장에 있는 주용규 승모비에서 남서쪽 봉우리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