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천의 역사와 전통을 알아 볼 수 있는 게시판 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제천의 지명과 행정구역의 변화 지역적 특성과 산물 등을 알려드립니다.
작성일 : 22-07-26 15:39
[송학면] 무도리[務道里]
글쓴이 :
문화원
(조회 : 6,878)
무도리는 동남쪽으로 왕박산(王朴山)이 병풍처럼 둘러 있고, 서쪽으로 안산(案山)이 용의 모양으로 마을 입구까지 감싸고 있는 마을이다, 전형적인 농촌으로 제천 시내와 인접하여 교통이 편리하다. 논농사와 밭농사의 비율이 거의 같으며, 화전(火田)은 많이 하지 않았다. 무도리는 산의 경사가 심해 화전을 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개국하면서 이성계가 고려의 왕씨 일가를 처형하자 왕씨의 한 사람인 ‘왕을규’가 지금의 왕박산으로 피신하였다. 그리고 성씨를 ‘박’씨로 고치고 숨어 살았는데, 그때부터 왕씨가 박씨가 되었다고 한다. 또 그 산은 ‘왕박산’이라 불렀다. 토착 성씨가 박씨이며, 의흥 박씨가 제천, 단양 등지에 흩어져 살고 있다.
본래 제천군 북면 지역으로서 뭇두, 뭇도, 뭇도위, 무도(務道), 무도위(務道尉)라 하였다. 마을 주민들은 ‘방아다리’, ‘화랑뜰’(역전 앞) 등으로 기억하고 있다.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만전리(晩田里)와 신문리(新聞里)를 병합하고, 동면(東面)의 송타리(松峙里) 일부지역을 편입하여 ‘무도리’라 해서 송학면에 편입되었다. 1980년 4월 1일 제천시 승격에 따라 제원군 송학면 무도리가 되었다가, 1995년 1월 1일 시군통합으로 제천시 송학면 무도리가 되었다.
마을의 대동계가 있었으나, 지금은 총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마을에서 관리하는 물품들 가운데 가장 큰 것이 상여다. 예전에는 가마도 있었으나, 소실되었다고 한다. 명절은 설과 추석 이 크며, 단오 등은 큰 명절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웃담의 경우 현재 22가구가 살고 있는데, 가장 많이 살았을 때가 27가구였다고 한다. 곧 인구의 변동이 크지 않은 편이다. 웃담, 아랫담은 6.25한국전쟁에 피해를 본 집이 거의 없다고 한다. 그래서 예전 집들이 이수 마을인 시곡리에 비해서 많이 남아있다.
◎ 무도리 지명유래
● 개근래, 장성거리 : 마을 앞의 들녘
● 갱기 : 서문리에서부터 내려오는 골짜기.
● 골담 : 뚝으로 된 지역을 부르는 명칭
● 기동(基洞) → 턱골.
● 도둑골(무도2리) : 사기장공에서 도자기를 훔쳐가는 골짜기의 명칭.
● 독바위 : 아이 못 낳는 여성이 돌을 던져 맞추면 아이를 낳는다는 이야기가 구전됨.
● 만곡(晩谷) → 만지실.
● 만전리(晩田里) → 만지실.
● 만지실[만전리, 만곡] : 뭇도 서남쪽에 있는 마을. 양지만지실과 음지만지실로 나뉘어 있음.
● 무도교(務道橋) : 무도 어귀에 있는 다리. 길이 29m. 1961년 9월에 놓은.
● 무재등 : 수리봉. 정월 보름날 달맞이를 하는 곳.
● 방아다리[방학교] : 무도 서남쪽에 있는 다리. 방아채를 놓았다고 함.
● 방축 : 들을 막았다하여 붙인 명칭.
● 방학교(放鶴橋) → 방아다리.
● 배고개 → 뱃재
● 본동(本洞)[원무도] : 무도리의 원이름.
● 북바위 : 왕박산에 있는 바위. 바위 밑에 의흥 박씨가 피난하였다고 함.
● 불당골(佛堂-) : 서무니 남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 불당이 있었다함.
● 사기장공(무도2리) : 도자기를 구었다고 해서 붙인 명칭.
● 사동(師洞) → 시시골
● 삭고개¹ : 무도3리 마을회관 있는 마을.
● 삭고개² : 마을로 올라가는 고개.
● 산지당 : 큰골 위에 위치한 옛날 치성을 드리던 곳.
● 삼박골 : 박씨 성씨를 가진 3가구가 살았다 하여 붙인 명칭.
● 삼밭골 : 치성을 드려 삼을 캤다하여 붙인 명칭. 무도1리 남쪽의 골짜기.
● 삼상 : 뱃재에서 양만전에 이르는 구릉으로서 훗날 재상이 태어날 것이라는 뜻으로 전해짐.
● 서무니[신문리, 신문] : 만지실 남쪽에 있는 마을. 어귀에 길 양쪽으로 큰 돌이 문처럼 서 있었다고 함.
● 소나무 : 마을 입구에 있는 수령 300년 정도의 소나무로 수형이 수려하여 마을 사람의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 정초에 이곳에서 동제를 지냄.
● 송학역(松鶴驛) : 화랑뜰 앞에 있는 기차역. 함백선의 첫째 역으로 함백선 개통 때 세움
● 수구제(守口祭) : 마을 어귀에 있는 용암. 매년 정월 초사흘에 제사를 지내고 있음.
● 시루봉 : 큰골 위의 뒷산.
● 신문(新聞) → 서무니.
● 신문리(新聞里) → 서무니.
● 안산 : 왕박산에서 마을로 이어지는 작은 산.
● 양만전(陽晩田) → 양지만지실.
● 와둥지 : 옛날에 기와를 굽던 곳이라고 함.
● 왕박산 : 강원도와 접경에 있는 산으로 금반옥녀(金飯玉女)의 명당자리가 있다고 전해짐.
● 왕백산 : 무도1리 남쪽에 위치한 산.
● 웃담. 아랫담 : 무도1리로 우회도로 윗마을, 아랫마을을 부르는 명칭.
● 원무도(元務道) → 본동.
● 음만전(陰晩田) → 음지만지실.
● 음방학(陰放鶴) → 음지방아다리.
● 이티(梨峙) → 뱃재. 배고개.
● 이현(梨峴) → 뱃재.
● 절골 : 만전에 있는 골짜기. 전에 절이 있었다고 함.
● 절골재 : 무도1리에서 절터로 넘어가는 작은 고개.
● 점재¹ : 불당골 윗마을.
● 점재² : 불당골에서 점재 마을로 올라가는 고개.
● 정지너머 : 양만전에서 동쪽에 위치한 지역. 현재 상수도 사업소가 위치함.
● 조리재[조을티, 조올티] : 『제천현지』 에 “조올치는 현에서 동쪽으로 10리에 있는데, 영월관로(寧越官路)는 이곳에 경유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한국지명총람』 에는 “서무니 동쪽에서 강원도 영월군 남면 토교리(土橋里)로 가는 재. 지형이 조리처럼 생겼다 하는데, 조선시대 여월로 가는 관행길이었다.”라고 기록함.
● 조올티(曺兀峙) → 조리재.
● 조흘티(曺屹峙) → 조리재.
● 큰골 : 무도1리 남쪽의 골짜기.
● 통불사 : 사기장골에 있는 절.
● 패현(敗峴) → 뱃재.
● 팻재 → 뱃재
● 현좌(縣佐) : 현좌, 동막골. 고암농공단지가 들어섬.
● 화랑뜰¹ : 뭇도 앞에 있는 마을. 화랑뜰이 있음.
● 화랑뜰² : 뭇도 서남쪽에 있는 들. 옛날에 화랑이 놀다 갔다함.
◎ 무도리 문화유산
● 무도리 유물산포지
유물은 길 양 옆으로 있는 수수밭과 무밭, 두충나무 단지 일대에서 고려~조선시대의 토기와 자기 조각이 수습되었다. 이 주변의 지형조건을 볼 때 이 일대에 거눔ㄹ지와 무덤이 조성되기에 알맞은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다.
● 불당골 유물산포지 ①
유물은 길 남쪽 밭 일대와 산의 사면 하단 절토된 지역에서 수습되었는데, 수습된 유물을 보면 고려~조선시대의 회청색 경질토기조각들과 암회색의 대장파수(帶狀把手) 조각 등이다. 이 유물들이 수습된 지역에서 150m 정도 서쪽으로 떨어진 점제마을 바로 앞의 밭에서 토기조각들이 수습되어 토기가마터의 존재가능성이 보고되어 있다.
● 불당공 유물산포지 ②
유물은 골짜기 안쪽 밭 일대와 계곡에서 고려시대 청자조각, 회청색 경질토기조각, 흑색 슬립이 입혀진 연질의 도기조각 등이 수습 되었다. 일부 건물의 축대로 볼 수 있는 석축이 보이고 있어 건물지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마을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이 골짜기 안쪽에 옛날 절터가 있었다고 전해 내려 왔으며, 밭 가운데 우물이 1개 있고, 논에서 기와조각과 그릇 조각이 많이 나왔다고 한 것으로 보면 이 일대에 절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서문리 보호수
서문리 보호수는 마을로 들어서는 입구에 위치한다. 소나무로 제천시 보호수 제77호로 2003년 4월에 지정되었다. 수령은 약 600년 정도 되었으며, 나무의 높이는 13m이고, 둘레는 45.3m 이다. 서문리 보호수는 마을 수호신의 역할을 하는 서낭목이다. 서문리 보호수에서의 당고사는 매년 음력 정월 15일 밤 9시 경에 지낸다. 제관과 축관은 거의 정해져 있다. 금줄은 당고사 3일 전에 치며, 황토는 여섯 무더기를 서낭당 주변에 뿌린다. 제물로는 여서낭이기 때문에 술과 고기를 쓰지 않고, 백설기 한 시루밤⦁대추⦁곶감⦁무나물 등을 진설한다. 제의의 진행은 유교식 절차에 따라 초헌 – 독축 – 아헌 – 종헌 – 소지 – 음복의 순으로 이루어진다. 당고사가 끝나면 노인정에서 남은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
● 송학역(松鶴驛)
송학역은 코레인(Korail) 충북지사 소속으로 충청북도 제천시 송학면 무도1리 144에 있다. 태백선에 있는 기차역으로 장락역과 입석리역에 사이에 위치한다. 1949년 11월 15일 보통역으로 영업을 시작하였으나, 1977년 여객 취급을 중단하였다.
● 양지만지실 할아버지 서낭당
마을로 들어서는 입구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다. 당집은 없으며 나무에 금줄을 둘러놓았다. 양지 만지실 할아버지 서낭당에서의 당고사는 매년 음력 정월 3일 새벽 1시에 지낸다. 정월 초하루에 금줄을 쳐서 금기를 철저하게 지킨다. 제관은 돌아가면서 한다. 제물로는 백설기 한시루⦁포⦁대추⦁곶감 등을 진설한다. 제의의 진행은 초헌 – 독축 – 아헌 – 종헌 - 소지 – 음복의 순으로 진행된다. 특히 소지는 할아버지 서낭당에서만 지낸다.
● 양지만지실 할머니 서낭당
양지만지실 할머니 서낭당은 마을로 들어서는 입구 왼편에 위치하고 있다. 제일이나, 제물, 제의 절차는 할아버지 서낭당에서의 당고사와 동일하다. 다만 소지를 올리지 않는다는 점이 차이가 난다.
● 용암(龍巖)
음지만지실에서는 용암(공알바위)에서 연 1회 제를 올려 마을의 평안을 기원한다. 용암(龍巖)을 ‘공알바위’라고도 부른다. 마을 입구 길가의 튀어나온 산자락에 직경 150cm의 타원형으로 된 자연암의 바위가 옴폭 패이고, 그 속에 직경 100cm의 계란형 바위가 볼록하게 솟아서 마치 여자의 성기 모양으로 되어 있다.
이 바위에서 길을 건너 20m 거리 논둑 밑에 볼록하게 솟아오른 사방 170cm 가량의 바위가 있다. 이 바위에 올라서서 돌 세 개를 던져서 그중에 하나가 맞은 편의 공알바위 속으로 들어가 얹히면 첫 아들을 낳는다고 한다. 또한 이 공알바위의 구멍을 작대기로 쑤시면 동네 처녀가 바람이 난다고 한다.
마을 당고사를 매년 정초에 지낸다. 제사의 차례는 설상(設床), 초헌(初獻), 아헌(亞獻), 종헌(終獻), 고축(告祝), 소지(燒紙)의 순서로 먼저 공알바위에 제(祭)하고 다음 서낭당에 가서 동일하게 제를 지낸다. 돌을 던져 공알바위 속으로 들어가야 애를 낳게 된다는 데에는 성교의 상징성이 잠재되어 있고, 또 논둑 밑에 있는 바위(올라서서 돌을 던지는 곳)를 남근으로 상지하는 것이라 보아진다.
● 웃담 서낭당
웃담 서낭당은 마을 뒤편에 위치하고 있다. 슬레이트 지붕에 시멘트로 벽을 만들었다. 서낭당 내부에는 ‘성황지신(城隍之神)’ 이라고 쓰여진 위패가 있다. 웃담 서낭당에서의 당고사는 매년 음력 정월 4일 밤 9시경에 지낸다. 예전에는 날을 받아서 지냈으며, 밤 12시 넘어서 지냈었다. 현재는 날을 정해 놓았다. 회장과 총무가 생기를 봐서 제관과 유사를 선출한다. 제물을 준비하는 집을 ‘유사’라고 부른다. 제물로는 돼지머리⦁백설기 한 시루⦁뫼⦁포⦁밤⦁대추⦁곶감 등을 진설한다. 서낭제를 지내기 위해 서낭계가 만들어져 있다. 금줄은 제를 지내기 3일 전에 유사가 친다. 금줄을 치고 난 후 황토를 뿌린다. 황토는 유사 집 앞과 서낭당 주위에 뿌린다. 황토는 해마다 뒷산에서 퍼온다. 유사는 금기를 철저하게 지킨다. 제의의 진행은 유교식 절차에 따라 초헌 – 독축 – 아헌 – 종헌 – 소지 – 음복의 순으로 진행된다. 소지는 보통 200여 장을 올린다. 당고사가 끝나고 나서 남은 음식들은 다음날 경로당에서 나누어 먹는다. 한 동안 반별로 나누어 먹었으나 지금은 하지 않는다.
● 음지만지실 백자요지
가마터는 소로를 내면서 능선의 아랫부분이 잘려져 가마의 아래끝부분이 파괴된 상태로 상당량릐 도편들이 외부로 노출되어져 있다. 다행히 가마의 중간 및 윗부분은 어느 정도 보존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보여진다. 수습된 백자편들은 대접, 발, 접시 등으로 대체로 동제부의 기벽 두께에 비해 저부와 굽의 기벽이 두껍고 투박하다. 내저면은 곡면형(曲面形)과 원각형(圓覺形)이 있으며, 구연부가 남아있는 두 점의 접시는 모두 직구형(直球形)이다. 굽의 형태는 외형은 동체의 저부와 뚜렷하게 두분되지 않는 죽절형과 직립형이고, 내면은 중심이 볼록하고 곡면형을 띤 오목굽형이다. 태토는 비교적 정선되었으며, 기면전체를 시유했다. 유색은 회백색이 주류를 이룬다. 접지면에 갈색의 점토를 묻힌 다음 접지면과 내저면에 굵은 규석질의 모래를 받쳐 포개어 번조했다.
● 점재유적
왕박산에서 서쪽으로 뻗는 능선의 남쪽사면에 위치한 점제마을 바로 앞의 밭에서 토기조각은 경질토기의 구연부조각과 동체조각이 대부분이다. 한편 의림지 주변일대 지표조사(충북대학교박물관, 1999~2000) 당시 완만하게 경사진 밭의 한쪽 가장자리에 검게 탄 부분이 반경 3m정도로 나타나며, 이곳을 중심으로 토기조각들이 흩어져 있었다. 특히 높은 열로 인해 녹아내린 흔적이 있는 가마벽 조각이 채집되어 이곳에 토기가마가 존재할 것으로 추정된다.
● 추원재
추원재는 충주 최씨의 제실로 삼대에 걸쳐서 실묘를 해 건축하게 되었다. 큰 집은 충주시 동량면 대전리로 그곳의 영모사(靈姥寺) 재실은 충청북도 민속자료 제19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러나 추원재는 건립한지 37년 정도밖에 안되기 때문에 문화재로 지정되지 못했다. 문중의 재정이 넉넉하지 못해 ‘상량문비’는 세우지 못했고, 지붕을 3번이나 고치는 등 계속해서 보수를 하고 있다고 한다. 처음 건립했을 당시에는 상량문까지 지을 생각을 하지 못했었다. 추원재 상량문은 2007년 집안 어른 가운데 ‘최병석’이라는 분에게 부탁을 해서 지었다.
충주 최씨가 제천으로 오게 된 시기는 조선이 건국 되면서부터다. 집안에서 고려시대에 벼슬을 많이 했기에 제천으로 들어왔다. 충주 최씨가 처음 들어온 곳은 현재의 음지만지실이 아니라 송한이었다고 한다. 그 곳에 14대조에서 16대조 까지의 묘소가 있었다. 그런데 자손이 많이 번창하지 못하고, 과부가 아홉 가구가 날 정도로 많이 어려웠다. 그래서 어느 풍수에 의해서 음지만지실로 이장을 하게 되고, 그 이후에 거처를 옮겼다.
음지만지실에자리를 잡은 것은 400~450여 년 정도 되며, 현재 음지만지실에는 20여 가구 정도 살고 있다. 청풍의 문화 유씨와 세거 연도가 같다고 한다. 많이 살았을 때는 마을의 50% 정도가 충주 최씨였다. 추원재는 문중에서 관리를 한다. 시제는 원래 10월 초아루에 지냈으나, 지금은 자손들의 사정에 따라 그 쯤 주말로 정해 지낸다. 40-50여명의 자손들이 참여해서 제를 지낸다. 현재,‘산 사람 수보다 조상 수가 많다.’는 말처럼 70위 정도를 모신다.
◎ 무도리 이야기
● 왕박시루의 유래
무도리 뒷산을 왕박산(王朴山 : 왕박시루)이라 한다. 고려가 망하고 이성계가 새로 나라를 세워 등극하자 고려의 왕족과 유신들은 뿔뿔이 흩어져 초야에 묻히기나 멀리 낙도에 은신하거나 하였다. 세 조정에서는 유신들을 찾아 회유하여 등용하기도 했지만 많은 왕족과 유신들은 숨어 버리고 말았다.
이곳에서도 개경(開京)에서 고려 왕족이 내려와 왕박산에 은신하여 성을 박씨(朴氏)로 고치고 살았다. 낙향한 박씨는 그 후 별탈없이 조용히 살았으며 자손들도 번성해 나갔다. 그래서 사람들은 고령 왕족인 왕씨가 박씨로 성을 갈아 살았다 하여 ‘왕박산’ 또는 ‘왕박시루’라 하게 된 것이다. 또 새로 생긴 박씨 자손들을 동네 사람들은 흔히 왕박씨라 불렀다.
조사자 : 거 왕박산은 이제 의령 박씨네들이 그 와 살다보니까 그래 된거죠?
최병석 : 그렇죠, 거 와서 피란을 했어
조사자 : 예, 임호 박수검 선생이 이제.
최병석 : 그 저 터가 있어.
조사자 : 예, 임호.
최병석 : 어, 이 박임호.
조사자 : 예.
최병석 : 어, 그물넨데. 원래 우리 마을이 처음 지접하기를 그 박씨들이 지접했어, 왕씨들이. 그래 왕씨들이 거 피란했다고 해서 그 왕씨 어머니가 박씨여. 그래, 모성을 따라가자고 왕박씨라 그래.
조사자 : 왕박씨로.
최병석 : 그 전에, 그 의미 없는 왕자 성 가졌다고, 그 나라에서 그렇게 전멸을 시킬라구 그랬어.
조사자 : 그렇죠 ,예, 예.
최병석 : 그래서지구서 지금, 저 그 의령 박씨들이 중시조가 여기여, 장락탑안 고기 있어.
조사자 : 아 그래요, 중시조가? 탑안이요? 에, 예, 예. 장락탑안.
● 뱃재의 유래
예전에 신혼부부들은 고암리 고척마을에서 무도리로 가는 고개를 신행길로 피해 다녔다. 이 고개는 보통 ‘뱃재’ 라고 부르는데, ‘팟재’ 또는 패현(敗峴)이라고도 부른다. 임진왜란이나면서 이곳까지 들어온 왜군은 우리 관군과 의병들과 이 고개에서 충돌하였다. 우리 관군과 의병들은 열심히 싸웠지만, 그만 패배하고말았다. 그래서 이고개를 ‘팻재’또는 ‘패현’이라고 불렀다. 신혼부부들은 우리 군사들이 패한 곳이라 불길하다고 생각해서 이 고개를 피해서 다녔다고 한다.
● 용암의 유래
음지만지시리 입구에는 용암 또는 공알바위라고 부르는 바위가 있는데 마을제사의 대상ㄹ이 된다. 아들을 못 낳는 사람들이 길 건너에서 용암을 향해 돌을 던지면 아들을 낳는다고 한다.
최병석 : 들어가는 입구에, 거 용암이라고, 어. 그기 이런 얘기하기 뭣하지만 바위가 이상스레 생겼었는데.
조사자 : 예, 예, 예.
최병석 : 그래서 그기, 전설이 내려오기는 아들 못 난 사람은 그, 그 지금 가 보셨는지 몰라도.
조사자 : 예, 가 봤습니다.
최병석 : 그 도랑 건너로 질이 놨어.
조사자 : 예, 예, 예.
최병석 : 길이 나 가지구 그, 거기서 돌을 그리 던지면 들어가면 아들을 낳느니 뭐 이런 전설이 있었어. 그런데 그기, 바위를 모두 여럿이 떠들기를 그기 바우 이름을 좋게 못 불러. 무신 뭐 공알 바우니 뭐니 이래. 그래서 내가 그냥 둬 가지고는 안 되겠으니까. 그 산이 내려오기를 저 왕박산 주령으로 내려 왔어.
조사자 : 글쎄 말이에요.
최병석 : 그런데 그기, 산이 기다맣게 내려오는 걸 용이. 용이라고 그래, 용.
조사자 : 예, 예, 예.
최병석 : 그래 그, 용암이라고 이름을 지었단 말이야.
조사자 : 예, 예, 예.
최병석 : 그래서 그 저, 재랑비{자랑비}를 거기다 세웠지.
● 조리재의 유래
옛날 경상도 어느 마을에 키가 작고 몸이 왜소한 김씨가 살고 있었다. 행동하는 것이 너무 가벼워 항상 사람들은 그를 ‘김조리’리고 불렀다. 조리는 쌀을 일 때 쓰는 도구인데, 그 조리를 이용해서 쌀을 일 때의 모습이 촐랑대는 듯 보여 촐랑대는 김씨를 ‘김조리’라고 불렀던 것이다. 김조리는 농사를 지어 보아도 잘 되지 않고, 장사를 해 봐도 잘 되지를 않았다. 흔히 사람들이 ‘안 되면 조상 탓, 잘되면 내 탓’이라는 말을 하는 것처럼, 김조리도 아버지의 산소를 좋은 자리로 옮길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산수(山水)가 뛰어난 강원도로 가서, 아버지 산소 자리를 구해볼까 생각을 하였다. 그리고 아버지의 묘를 과 유골을 정중하게 싸서, 괴나리봇짐으로 만들어 짊어지고 강원도로 행했다.
영주, 딘양, 제천을 지나 영월을 향해 가는 길이었는데, 제천과 영월의 경계인 서문동에 도착했을 때 날이 저물어 그 마을에 있는 주막집에서 쉬게 되었다. 그 당시만 해도 제천시 영월로 가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에 장사꾼들이 많이 왕래하였다. 그래서 주막집에서 다른 장사꾼들과 함께 묵게 되었다. 그건데 김조라는 자기 아버지의 유골이 든 괴나리봇짐을 갖고 다니는 것이므로, 항상 소중하고 조심스럽게 다루었다.
그날 밤을 주막집에서 푹 자고, 아침에 깨어보니 다른 사람들은 이미 모두 길을 떠나고 주막집에 혼자 남아있었다. 그런데 아버지의 유골이 든 괴나리봇짐이 없어지고 참빗보따리가 하나 남아 있었다. 아버지의 유골을 잃어버린 그는 앞이 캄캄하였다. 아버지의 유골을 아무리 찾아봐도 찾을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체념을 하고 유골과 바뀐 참빗보따리를 둘러메고 장사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참빗장사는 의외로 돈벌이가 잘 되어, 많은 돈을 벌게 되었다. 그 후 고향으로 돌아가 논과 밭을 많이 장만하여 살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그 주막집에서 같이 자던 참빗장사는 도무지 장사가 잘 되지를 않고 있었는데, 방에 투숙한 키 작은 사람이 괴나리봇짐을 유난히 조심스럽게 다루는 것을 보고, ‘필시 귀중한 물건이 들어 있을 것이다’라고 혼자 생각을 하였다. 그래서 새벽에 그 유골이 든 괴나리봇짐을 훔쳐 영월로 향했다. 고갯마루를 넘어 영월 땅 으슥한 곳에 이르렀는데, 아직 새벽이라 사람의 왕래가 별로 없으므로 괴나리봇짐의 내용이 궁금하여 풀어 보았다. 그 안에는 뜻 밖에도 유골이 들어 있었다. 참빗장사는 참빗 보따리만 잃어버린 것이 화가 나서 그 유골을 홧김에 팽개쳐 버리고 하는 수 없이 농촌으로 들어가 머슴으로 이 마을 저 마을을 돌아다니게 되었다, 그러다 어느 해 경상도 어느 부잣집 머슴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 집 주인은 이상한 것이 추석이 다가와도 아버지 산소에 벌초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추석날이 되니 주인과 머슴은 한가하게 술상을 차려 놓고, 술을 같이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집주인이 머슴을 위로하기 위해 “나도 젊었을 때는 그대와 같이 머슴도 살았고, 행상도 하면서 무척 고생을 해보았다네. 그러니 그대의 사정도 알만하다. 때가 되면 성공할 수도 있으니, 참고 살아가라.”고 하면서 머슴을 격려하였다.
그러면서 주인이 지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머슴은 깜짝 놀랐다. 바로 자신이 저질렀던 그 이야기였다. 주인의 말을 모두 들은 머슴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엎드려 사죄하며 용서를 빌었다. 그러나 그 주인은 반색을 하며 자기 아버지의 유골을 어디에다 묻었는지 그것을 찾게 해달라고 도리어 사정을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영월로 향하게 되고, 조리재를 다시 찾게 되었는데, 그냥 팽개친 유골을 수 십년 후에 찾으려니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하루 종일 찾다가 물이 있는 골짜기를 찾아가 점심을 먹다가 보니, 그 물웅덩이 아래 바로 유골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자리에다 봉분을 쌓고, 소중하게 산소를 만들었다. 그 후 이곳은 김조리 아버지의 유골을 묻었다고 하여 ‘조리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무도리 세시풍속
● 1월
설
설날에는 차례를 하고 세배를 드린 후 친척들과 성묘를 간다. 성묘 후 마을에서 놀이를 한다. 무도1리 웃담 마을은 떡과 만두를 섞은 떡국차례를 지냈고, 차례를 지낸 후 아침을 먹고 친척들과 얘기하다 한 10시쯤 “앞으로 건강하시라.”는 의미로 세배를 한다. 과거에는 마을 집집마다 다녔으나 요즘은 친적집만 다닌다. 성묘하러 갈 때는 음식을 가져가지 않고 한꺼번에 다 돌아 내려온다. 한군데만 가는 집은 더러 음식을 해가기도 한다. 그 외에 설날에 하는 놀이로는 윷놀이(가락윷), 연날리기, 스케이트(송판+철사), 토정비결, 부적받기 등이 있다.
정월대보름
정월대보름에는 용알을 떠다가 찰밥을 해 먹는데 밤에 누가 먼저 샘에 와서 물을 떠갔는지 표시하기 위해 샘물에 ‘똬리’를 던져 띄운다. 대보름 달에 소원을 비는 달맞이를 한다. 또한 달을 보고 한 홰 농사를 점치기도 하였는데 달이 뿌옇게 보이면 ‘무달’이라고 해서 올해 비가 많이 올 것이라고 예측하고 반면에 뚜렷하게 보이면 가물 것 이라고 예측한다. 더위팔기는 이름을 부른 후 대답하면 “내 더위 사가” 라고 말하는 놀이고, 웃담 마을에서는 ‘망우리’라 불리는 쥐불놀이도 행해진다. 또한 귀밝이술을 마시고 부럼을 깨먹는다.
귀신날
귀신날에는 귀신이 집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화로에 왕겨, 고추씨, 목화씨, 머리카락 등을 넣고 태운다. 그러면 귀신이 그 냄새가 독해 집안으로 들어오지 못한다고 한다. 또 체를 대문 기둥에 세워놓고, 바늘을 꽂아 놓는 ‘삽작 걸기’를 하는데 이는 귀신이 바늘로 체구멍을 세다가 날이 새서 돌아가게 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현재는 거의 하지 않는다.
● 2월
머슴날
‘나이떡’이라고 해서 가족의 나이 수만큼 숟갈로 쌀을 떠서 떡을 해먹는다.
좀생이날
초생달과 좀생이별의 거리로 흉년, 풍년을 점쳤는데 거리가 가까우면 흉년이고, 멀리 떨어지면 풍년이 든다고 한다. 또한 좀생이떡을 해먹는다.
입춘
입춘에는 보통 ‘입춘대길’이라고 쓴 입춘첩을 붙이는데 제보자의 말로는 “배운 학자들 집안에서나 하는 건데 이 마을에는 학자가 없어 그래가지고 뭐 입춘 대길 써 붙이고 그런 건 없었어.” 라고 한다. 제보자 집에 있는 입춘첩은 자제 분들이 사다 주어서 붙였다고 한다.
● 3월
삼짇날
삼짇날에는 절에 가는데 웃담 마을 주위의 절로는 강천사, 월명사, 통불사 등이 있다.
● 4월
초파일
사월 초파일에는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린다.
● 5월
단오
집집마다 짚을 모아서 물에 축여놨다가 서낭당 옆 벚나무에 그네를 매고 남녀 관계없이 그네를 뛰었다. 또 떡을 해먹었는데 요즘은 쑥으로 떡을 해먹으나 예전에는 쑥보다는 수리취를 주로 사용했다. 약쑥을 뜯어 말려놨다가 아플 때 먹었는데 단오 무렵의 쑥이 가장 연하다고 한다.
● 6월
유두
집에서 창포를 삶아 머리를 감았다.
● 7월
호미씻이
봄철 일을 마친 후, 집집마다 음식과 술을 내고 한바탕 흥풀이 하는 것으로 호무씻이의 유래를 제보자는 “호무씻이는 밭 메고 논메고 그래는 걸 보고 호무를 씻는다는 뜻이래, 호무씻이 다 인제 해서 다 써먹고 그런 뜻을, 그런 소리라는 것을 들었는데 나도 아주 정확하게는 몰라” 라고 말했다. 달맞이 하던 언덕에서 주로 했다.
칠석
칠석날에도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린다.
복날
개고기나 달고기로 몸보신을 한다.
● 8월
추석
차례는 집집마다 젤 높은 집에서부터 가서 지내고, 그 다음 차손, 그 다음 작은집으로 다니면서 들린다. 송편은 콩을 넣은 콩떡, 팥을 넣은 팥떡이 있고, 밤을 넣기도 하였다. 떡을 찔 때는 솔잎을 넣고 쪘는데 향이 좋고 떡이 빨리 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성묘는 요즘 바쁘다보니 추석과 설 중 한 번만 가는 집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 9월
구중날
구중차례는 추석에 형편 때문에 제사를 못 지낸 집에서 차례를 지낸다.
● 10월
안택고사
떡을 해 놓고, 동전과 솔가지를 넣은 성주를 새로 맨다. 터주항아리에 벼를 넣고 장독대에 놓는 터주항아리는 현재 하지 않는다고 한다. 또 쌀을 한 섬 들어서 성주 밑에 갖다놓고 나중에 떡을 해 먹는 ‘떡떼기’가 있다. 안택고사를 위해 날을 받고 그날에 떡을 하는데 마침 초상집의 상주가 잠깐 방문했었는데 그 후 떡이 안 익었다. 그런데 아무리 쪄도 익지 않던 떡이 그 다음날 되니까 안 쪄지던 떡이 익었다고 한다. “지난 10월 달에도 해먹었어, 그 해먹었는데 참 그게 묘해요, 날을 받아서 하는데, 요기 초상이 났어, 근데 상주가 인제 옛날에는 금줄을 다치고 우리가 황토를 파다가 이래 놓고 그랬는데 지금은 그렇게는 할 필요도 없고, 그냥 맘적으로 이래 기도하는데, 상주가 장사지내고서 나 뭘 먹으로 오라고 여기 들어왔어, 야 근데 떡이 그렇게 안 익어, 암만 불을 때도 안 익어, 부정을 타서, 그러니까 그게 참 미신이라는 게 희안해요 눈에 안보여도여, 그래서 인제 우리 같은 나이는 그런 게 느껴지는데 우리 집 할머니도 그렇고, 꼬쟁이를 쑤시고 뭐 불을 이렇게 해도 안 익어가지고서 결국 그냥 떡을 쪄서 고사를 지내고 기도하고서는 쏟으니까 엄청 많이 설었어, 그래가지고서는 거 인제 익은 것만 몇 집이 나눠 먹고, 옛날 사람은 옛날에 그리 하믄은 떡함지를 해 이고, 사라에다 20개면 20개, 서른 개면 서른 개 담아서 이고, 한사람이 따라 댕기면, 한집에 주고 또 가서 주고, 이래 다 노나 먹었어요 여기도 다, 그런데 지금은 그러지는 안하고 그냥 뭐 같이 하는 집에나 노나 먹고 그러지 그런데, 그 안 익은 거를 그 이튿날 집에다 놓고 찌니까 금방 익어”
⦁11월
동지
팥죽을 쑤어서 먹었는데 주로 찹쌀이고, 찹쌀이 없는 집은 찰수수를 쓰기도 했다. 10일 안쪽에 동지가 들어있을 경우는 애동지라고 해서팥죽을 해먹지 않았으나, 다른 날에는 팥죽을 해먹었다. 또 팥죽을 밖에 뿌려 귀신을 쫓았다.
⦁12월
섣달그믐
한 해 동안 돌봐 주셔서 감사한다는 의미로 마을 어르신들에게 인사를 다녔으나 요즘은 하지 않는다.
⦁기타 정기행사
반 기금으로 2년에 한번은 관광을 다니시는데 금년은 3월 16에 낙산사로 다녀왔다고 한다.
◎무도리 일생의례
⦁출생의례
합방
옛날 선비들은 ‘안방마님’, ‘바깥샛님’이라 하며, 평소에는 각방을 사용하고 좋은 날을 정해 합방을 했다.
기자치성
집 뒤, 아주 깨끗한 자리의 장독대 위에 정한수를 떠놓고 치성을 드렸다. 마을 앞에, 독바위와 용암바위는 남근상 여근상이라고 해서 독바위에서 돌을 던져 용암바위 안으로 들어가면 아들을 낳는다는 설이 있다. 그 곳에서 치성도 많이 드리며 매년 수구제를 지낸다. 그런데 독바위는 한일합방 시절에 거설을 위해 사용해 부서지고 터만 남았다.
이름 짓기
아이 이름은 할아버지들이 가문마다, 행렬자에서 따온 이름을 지어주었다.
임신 중 금기
보태. 태아를 보아하기 음식과 약을 가려먹고, 앉는 자리까지도 가려서 앉았다. 뾰족한 자리나 더럽고 차가운 자리는 피했다.
아이 성별
산모의 외형이나 뒷모습을 보고 아이의 성별을 점쳤다.
배냇저고리
미리 만들어 놓지 않고 한 달 전이나 출산할 쯤에 배냇저고리를 준비하였다. 배냇저고리는 세상에 태어나서 자라나는 과정을 하나로 묶는 치성의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예전에 과거시험을 보러가는 선비들이 시험 합격을 기원하며 몸의 배냇저고리를 붙이고 가기도 했다.
⦁혼례
혼인
옛날에는 맞선보는 일이 없었고 중매를 통해 혼인하였다.
중매
가까운 친척이나 측근들이 중신을 섰다.
청혼서, 허혼서 보내기
신랑측에서 생시까지 다 적은 청혼서를 신부측으로 보내면, 신부측에서 허혼서를 보낸다.
초행
신랑은 신부집 결혼식에 보통 당나귀를 타고 갔다. 시대의 변천에 따라 가마나 트럭을 타고 가기도 했다.
재항
대례를 치르기 전에 마을 총각들이 신랑에게 장난을 쳤다.
첫날밤
예전에는 신부댁에서 하룻밤 지냈으나, 훗날에는 대례를 마치고 바로 신랑집에 가서 첫날밤을 보냈다. 현대에는 결혼식을 마친 후 신혼여행을 떠난다.
전안례
동제, 서제라 하여 신랑은 동쪽에 신부는 서쪽에 서게 되고, 전안이라 하여 그 때 신랑이 기러기를 안고 들어가 상에 올려놓는다. 혼례를 도와주시는 친척이 기러기를 받아 청실홍실이라는 서약을 한다.
합근례
표주박으로 술을 돌리는데 그 의미는 순수성을 뜻한다.
교배례
신부가 먼저하고, 그 다음에 신랑이 한다. 이것은 음과 양이라는 오행에 따라 순서와 횟수를 행하는 것이다.
페백
신부집에서 혼례를 마치고, 신랑집에 와서 시부모님과 친척분들에게 인사를 드리기 위해 행해지는 것이다. 자손번성을 위해 밤이나 대추를 주었고, 지금은 신혼여행을 가서 돈을 주는 경우도 있다.
신부단장
옛날에는 미장원이 없었기 때문에 주변 친척들이 해주었다.
혼수품
옛날에는 자급자족하던 시대에는 부귀와 단아함을 뜻하는 수를 놓는 원앙금침을 준비해 갔다.
친정나들이
시댁에 살다가 3일후에 처음으로 신부가 친정 나들이를 간다. 떡, 술, 고기 등 많은 음식을 준비해 간다.
⦁산장례
객사
집안으로 모시지 않고 밖에 모셨다. 남의 눈총 받지 않게끔 돌아가신 분들은 집안에서 모시기도 했다.
토룡(가매장)
장례식장이 없고 삼일장이 아니었기 때문에 시신의 부패를 막기 위해서 토룡이라는 가매장을 했다.
초혼
돌아가신 분의 속옷을 한 서너번 휘두르면서 ‘○○ ○공 무슨생’ 보국 세 번을 하고 속옷은 지붕에다 올린다. 그리고 그 속옷은 입관할 때 염할 때 내려가지고 관에다 넣는다.
사자상
밥 세그릇, 세목만 떠놓고 (나물은 놓지 않음), 고인의 신을 앞에다 놓았다.
염 / 속광
염할 때 속과이라고 해서 버드나무 숟가락으로 불린 쌀을 천석, 이천석, 산천석 소리 내면서 입에 넣어드렸다. 저승길 가는 길에 시장하지 않게 하기 위해이다. 동전을 넣어드리는 경우도 있는데, 동전은 쇠라 좋지 않다고 해서 안 넣는 곳도 있다.
문상
입관을 하고, 성복제를 지내고 옷을 입은 후, 문상을 받는다. 그런데 현대에는 옛 절차를 따르지 않고 입관하기도 전에 문상을 받는다.
조문
예전에는 술, 쌀, 초와 같은 장례절차에 필요한 물품을 가져갔다.
시신위치
방안에서는 북향으로 두지만, 집 구조에 따라 머리가 동쪽으로 가게끔 두기도 한다.
상중금기
마을에 상이 나면 줄초상을 막기 위해서 마을 주민 전체가 머리를 감지 않고, 기름붙이기도 했다
대돋음
호상일 경우에, 상요가 나가기 전날 ‘대돋음’라고 하는 상여놀이를 하였다. 마을을 다니는 것이 아니라 집안에서 행하였다.(다른 마을은 대마지라고 함. 마을을 다님.) 하지만 요즘은 행하지 않는다.
운구 의례
관을 가지고 나갈 때 앞 사람이 바가지를 밟아서 깬다.
발인제
제물을 예전에는 어느 며느리 사돈이나, 어느 집안의 누가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개 상가에서 마련을 한다.
상여
나무 대틀로 만들고 32명이 매게끔 되어있다. 하지만 현대에는 나무 상여는 너무 무겁기 때문에 간략한 구조의 조립식으로 만든 상여를 사용한다.
노제
한 마을에 맏상주가 있고, 둘째상주가 있어 이웃에 가는 경우에 끝을 이어가기 위해서 노제를 지낸다.
화다지기
시신을 안장하고 난 다음에 회를 홀수로 3캐, 5캐, 7캐를 다진다. 회는 포전에서 석회석을 구워서 풍화가 된 것을 사용한다. 회를 다지면서 하는 노래도 있다.
봉분
봉분을 둥글게 만드는 이유는 빗물이 안 들어 가게 위해서다.
시묘살이
요즘은 간편하게 3일장을 지내지만, 지금도 3년 시묘살이를 하는 분들도 계신다.
매장금기
육탈이 안되면 자손들이 해를 보기 때문에 육탈이 잘 되게 하기 위해 관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 (하관을 할 때 집안에 따라 파관을 해 시신만 안장하는 경우도 있고, 관채로 하는 경우도 있음.) 상여 나가는 날 관을 들고 나가는데, 중상일 경우에는 입관도 하지 않고, 장례도 지내지 않고 역시 상여도 나가지 않고 모두 피하였다. 하지만 요즘은 방비문이 있어 축을 하듯이 읽는다.
⦁제례
대물림과 위계질서를 위해 제사는 맏아들이 지낸다.
◎ 무도리 무후제
무도리에서는 매년 음력 시월 보름에 마을 노인회 주관으로 무후제를 지낸다. 마을에 자손 없는 묘가 여섯기가 있는데, 그 명단이 구체적으로 전해지지는 않느다. 다만, ‘단양 우씨’라고 하는 분만알고 있느데, 그나마도 이름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래서 제사지낼 때 쓰는 지방에도 ‘단양 우씨 외 육외’라고 적어서 지낸다. 웃담에 한 곳이 있고, 마을 서낭당 있는 곳에 두 기, 뱃재에 세 기가 있다.
신현복 : 제사를 그 제사를. 그 토지가 한 천팔백 평, 이천 평 정도 되는데. 소주 한 병하고 포하고, 잔하고 가지고 가서. 여섯 기인데. 가서 부어 놓고, 절만하고 내려와. 야 이건 아니다. 그렇게 너무 저거 하게 할 수 없지는 않은가. 그래가지고 조금 젊은 이장한테다가 이건 아니다. 그래도 그 사람이 마을에 돈을 주었을 때는 뭔가 제대로 해달라고 들여놓았는데, 너무 소홀하게 하지 않냐? 그걸 우리 노인정을 주면 우리가 제사를 잘 지내고. 우리 돈 들여서 회식 하느니. 우리가 그걸 가지고 회식을 하면, 일거양득이 아니냐. 그래서 우리가 잘 지낼테니, 우리한테 맡겨라. 아 그거 좋은 생각이다. 그래가지고서 우리 노인정에서 맡았어. 그래서 ᄄᆞᆼ을 매각을 하고. 해가지고서 경노당 짓는데. 예전에는 보조가 많지 않았잖아. 그래서 인저 경노당 짓는데다가 그 돈을 조금 투자를 하고, 그래가지고 해가지고 제사를 우리가 백프로 맡아가지고서 지내고. 지금은 제사 지내는 비용을 써서 이장에게 주면 이장이 줘. 그러면 제사를 아주 잘 지내지.
조사자 : 제사를 언제 지내세요?
신현복 : 시월 보름에. 그래고. 무후제 명단이 수십 년 내려왔는데, 명단이 하나도 없어
조사자 : 명단이 없나요?
신현복 : 예. 이거는 아니다. 산소 자리가 여기저기 있는데. 여섯 기가 있느데. 그 전에는 반장도 모르고. 이장도 모르고. 아무도 몰랐어. 이장도 알고 있어야 되고, 지도자도 알고 있어야 다음으로 넘겨주어야지.
조사자 : 그 명단이 어느 정도 확인이 되었나요?
신현복 : 그 인제. 명단이. 내려오는 저거가 없기 때문에. 그래도. 우씨라는 것 하나는 있어. 단양 우씨라고. 그냥 지방도 단양 우씨 외 육위 이래가지고. 여기는 여기 하나 있고, 서낭당 있는데 두 기가 있고, 뱃재에 세 기가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