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흐르고 흘러 어느새 고려시대로 접어든 제천의 이름은 ‘제주(堤州)’로 바뀌었고, 의천(義川) 또는 의원(義原)이라 했다 전해집니다. 고려시대는 국가적으로 불교를 장려하는 시기였던 만큼, 제천에도 불교가 크게 융성했는데요. 바로 각종 절터(사지)가 이를 말해줍니다. 이 시기와 관련된 재미있는 설화 중 하나로 ‘월악산’ 의 이름에 얽힌 이야기인데요. 달이 뜨면 영봉에 걸린다 하여 월악산이라는 이름을 갖게된 이 산은, ‘와락산’ 이라고 불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 유래를 살펴보면 먼저 첫 번째는 후백제의 견훤이 이곳에 궁궐을 지으려다 ‘와락’ 무산되었다는 설, 두 번째는 고려 태조왕건의 수도 후보지로 개성 송악산과 중원 월형산(월악산)이 경쟁하다, 개성 송악산으로 결정되자 도읍의 꿈이 ‘와락’ 무너져 와락산으로 지칭되었다는 설이 있었다고 하네요. 결과가 어찌 되었건, 한 국가의 수도로 거론될 만큼 월악산이 영험하고 유명한 산이었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한편 고려시대 중기 이후 중앙정부에서 무신정변이 일어나며 독재체제를 구축하는 와중에, 고려 내부에서는 삼국부흥운동이 일어나는 등 혼란이 가속화되어 갔습니다. 금나라와 고려의 혼란을 틈타 급격히 성장한 몽골은 이후 고려에 수차례 침입하며 국토를 유린했습니다. 당시 무신정권은 수전에 취약한 몽골군의 약점을 이용하여 강화도 섬에 들어가 방어하였는데요. 결국 이는 한반도 전 내륙지역의 참화를 그대로 방치한 것과 동일한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중원 내륙의 중심지였던 제천 등지에서는 몽골군에 침입에 맞서 격렬히 저항하며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한 전투가 벌어졌는데요. 몽골군의 침략은 총 일곱차례로 그 중 후반기인 5~7차 침입 때 이르러 몽골군이 제천지역까지 이르렀다고 합니다. 특히 6차 침입 때는 몽골군을 피해 주민들이 월악산의 신사로 대피하였고, 이를 잡으러 가던 몽골군에 비바람과 안개, 우레와 우박이 쏟아지자 신령의 조화라 생각한 몽골군이 물러섰다는 설화가 있습니다. 이 후 몽골의 마지막 침입 때 박달재에서 기습하여 물자와 포로를 노획하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충주산성이라 적힌 기록은 오늘날의 덕주산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진다고 하여 제천에서 항쟁이 꽤 크게 일어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후 원간섭기를 거친 고려는 말기에도 왜구의 침략에 시달렸고, 역시나 제천, 충주, 단양 근처에서 여러번 싸워 이겼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여담이지만 2000년대 선풍적 인기를 끈 드라마 태조왕건의 세트장이 제천시 금성면 성내리에 소재하였었는데(현재 한국 환경공단 리조트 연수원 부지입니다), 천년을 넘나드는 고려와 제천의 인연이 꽤나 흥미롭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