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의 혼란을 끝내고, 태조 이성계는 서울을 수도로 새 나라 조선의 역사를 열었습니다. 조선은 유교를 국가의 기본으로 삼아 불교를 억제하고, 중앙 중심의 왕권을 강화해 나갔습니다. 따라서 조선시대는 정치, 사회, 문화 등을 유교로 설명할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한편 제천에서도 이러한 변화에 따라 유학을 깊게 연구하며 심화시켜 나갔는데요. 그러던 중 조선 현종의 왕비가 청풍 김씨 가문에서 배출되었고, 이에 힘을 얻은 청풍 김씨가 정치적 실세로 등장하며, 황강서원, 봉강서원 두 개의 사액사원을 건립하고 청풍을 도호부로 승격시키는 등 지지기반을 마련함과 동시에 학문적 기반을 공고히 더해나갔습니다.
특히 조선 현종대는 예송논쟁이 활발해지며, 유학의 학문적 심화가 극에 달하던 시기였습니다. 이런 학문적 격렬한 대립이 정치에 까지 이어지며 숙종 대 3차에 달하는 환국이 발생하는 가운데, 제천지역은 노론의 이론적 기반을 심화시키며 권상하, 한원진 등 유명 유학자들을 배출하여 노론의 정치, 사상적 기반으로 자리매김 하였습니다.
한편 조선후기로 들어서며 사상적 기반이 기존의 학문적인 경향에서 실증적인 경향으로 변화하자 제천에도 새로운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먼저 제천 깊은 산중에 조그만 마을이 자리잡은 것이 바로 그 시작이었는데요. 지금은 ‘배론성지’로 유명해진 배론마을은 조선후기 박해를 피해 천주교 신자들이 모여사는 마을이었다고 합니다. 실학자 정약용의 조카사위이기도 한 황사영은 신유박해가 발생하자 배론의 산 속 토굴에 몸을 숨기고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천주교 포교방안을 몇가지 제안한 백서를 씁니다. 이후 그는 검문에 발각되며 거열형을 당해 사망하였습니다.(해당 내용은 대부분 선교사를 파견하여 조선의 천주교를 전파하자는 내용이었으나, 이 중 외군 개입으로 목표를 달성하자는 내용이 일부 있어 논란이 있었고, 결국 순교자로 지정되지 못하기도 했습니다. 다만 그의 백서는 수많은 박해 속에서도 포교활동을 한 점, 글귀가 뛰어난 점 등으로 현재 교황청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한편 외세의 등장과 정치, 사회의 혼란 속에서 서학에 맞서 등장한 동학은 농민 중심의 교세를 확장해나갔습니다. 조선 말기에는 청풍에서 농민항쟁이 대단하였는데, 이는 훗날 동학농민전쟁으로 이어지기도 할 정도였습니다. 이런 제천민중의 굳건함은 일제침략이 노골적으로 변하자 스스로 의병을 칭하며 그 기세를 떨쳐나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