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욕적인 조약 이후 개항이 진행되며 외세들의 내정간섭이 심화되었습니다. 그 간섭 속에 조선 민중을 향한 관심은 없었기에, 제천 지역의 주민들 역시 곤궁한 삶을 면키 어려웠다고 합니다. 특히나 의병이 분연히 일어났던 제천지역은 무자비한 학살의 중심장이 되었으며(이 때의 영향으로 지금도 제천에는 100년 이상 된 건축물이 남아있지 않다고 하니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런 분위기를 배경으로 제천 민초들의 항일감정은 더욱 거세져, 이후 중부지방 내륙권 3·1운동 및 독립운동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국권침탈 후 일제는 군대식 무단통치를 앞세워 민중에 폭압적인 지배를 자행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 의병도시였던 제천은 대토벌로 터전이 초토화되며 일제에 대한 반일감정이 더욱 격화되었고, 이는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 속에서도 무럭무럭 자라났습니다. 그러던 중 고종황제의 승하소식으로 민중의 감정이 더욱 격해졌고, 고종황제의 인산에 참여하는 이범우가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아 원주, 단양, 영월 등에 동참을 권하는 한편 제천에서 만세운동을 거의하기에 이르자 장날이 열리는 4월 17일 천여 군중들이 대규모 만세운동을 벌이게 됩니다. 이처럼 지지치 않는 반일 정신으로 무장한 제천민중은 일제의 지속적인 주목에도 굴하지 않으며 제천공립보통학교 맹휴투쟁, 김정호 등의 제천청년회 활동 등을 지속하며 그 저항정신을 지속적으로 이어나갑니다.
한편 일제강점기 제천 지역은 사회간접자본이 확충되는 시기였습니다. 단순히 들으면 도로망, 철도망의 발전으로 제천이 철도교통의 요지가 됨에 기여했다고 주장할 수 있겠지만, 결국 이는 일제의 효율적인 수탈을 위한 기반 시설이었다는 것이 많은 실제연구를 통해 밝혀지기도 하여 공분을 자아내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일례로 의림지 수리를 누리는 좋은 땅을 일본인이 전부 잠식했던 점, 엽연초 전매 및 잡화점 운영 등을 통해 수익을 독점하였던 점, 마지막으로 당시 제천 주민들은 식량 자급자족이 불가능한 농가가 대부분일 정도로 궁핍을 면하지 못했다는 점 등이 이를 증명한다고 하니 그 당시 민초들의 삶이 얼마나 삭막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