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약재의 예전 이름은 염수재(念修齋)로 진주강씨 문중에서 자녀 교육을 목적으로 세운 학당인데 조선 선조 때 강천민 선생이 건립하였다. 1905년 의병재기를 다지고 서사결속(誓死結束)을 앞세운다는 취지에서 염수재 현판을 박약재로 고쳤는데 유인석의 친필로 써서 게시하였다. 박약재의 뜻은 『염수선조지덕(念修先祖之德)하고, 박약선생지의야(博約先生之義也)』라 하였다. 이는 선조들의 충의의 덕을 생각하며 닦고, 유인석에 창의하는 일을 전국적으로 널리 약속하자는 뜻이 곧 박약재이다.
정미의병 때 왜적이 제천향교를 방화 했는데 이 때 문묘위패를 1년간 박약재에 봉안했었다2. 또 그 뒤 유인석이 만주에서 운명하자 모든 유림이 박약재에 모여 영연(靈筵)을 설치하고 애통해 하며 제사를 지냈다. 그 후에 다시 창의를 재도모하기 위하여 박약재에 유림들이 모여 융의계(隆義契)를 조직하여 충의지사들이 늘 모인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운강 이강연이 사형 당한 후 『운강선생창의사실기』를 박정수 · 강순희 두 사람이 비밀리에 편찬하였고, 박약재는 치평대도(治平大道)를 강습하는 수학요지(修學要地)로 또 의병전쟁 시 연락처로, 다시 문묘로, 의병사편찬소로 위정척사의 정신을 실천한 장소성을 지닌다.
건물 구조는 정명 3간, 측면 2간, 목조 기와집으로 홑처마 팔작집이다. 중앙은 대청마루이고, 좌측에 방 2개, 우측에 방 1개이며, 툇마루를 두었다.